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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 전쟁의 총평, 그리고 유산들 (2)







 2.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예루살렘 왕국의 북쪽에는 사실 예루살렘 왕국과는 거의 별도로 설립된 3 개의 봉건 영지들이 존재했다. 안티오크 공작령 (Principality of Antioch ), 에데사 백작령 (Count of Edessa), 트리폴리 백작령 (Count of Tripoli) 가 그것이다. 이들은 사실 규모나 독립성 면에서 하나의 소국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예루살렘 왕국 및 십자군 역사에 일부로 남았다. 


 안티오크 공작령은 안티오크가 함락되고 보에몽 1세 (Bohemond I) 가 이 도시를 차지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심가인 보에몽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가 노렸던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결국 이 야심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에몽 1세는 더 큰 것을 놓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알렉시우스 1 세 콤네누스에게 무리하게 대항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계자인 보에몽 2세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해서 안티오크 공작령은 (사실상 공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안티오크를 점령하는 보에몽. 1840 년대 삽화.  Painting by L.Gallait, 1840, "Croisades, origines et consequences" ) 


 이럴 때 공작령을 지켜낸 것은 후세에 평가가 엇갈리지만 아무튼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Tancred) 였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살레르노의 로게르 (Roger of Salerno) 가 대리 섭정에 자리에 올랐다. 커다란 야심으로 주변과 항상 충돌을 일으킨 초대 안티오크 공작령의 지배자 -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 - 들이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북부의 십자군 국가 사이는 물론 주변의 다른 세력과의 긴장이 다소 감소할 수 있었다. 


 만약 탕크레드라도 오래 살았다면 나중에 보두앵 2세 시절 이후 십자군 국가는 내분 상태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보두앵 2세는 탕크레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더 나아가 탕크레드는 주변 영토에 대한 야심이 꽤 있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탕크레드는 로게르로 교체 되었다. 로게르 시대에 안티오크는 트리폴리 및 에데사 백작령,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를 호전시켰지만 (하지만 여전히 갈등이 있긴 했다) 1119 년 사르마다 전투 (Battle of Ager Sanguinis, = Battle of the Field of Blood, the Battle of Sarmada ) 에서의 엄청난 패배로 인해 로게르 본인도 사망하고 안티오크 공작령도 위기에 빠졌다. 


 이 시기 이후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크의 보에몽 2세의 섭정 대리를 맡았고 안티오크, 트리폴리, 에데사의 3대 북부 십자군 국가는 예루살렘 왕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된다. 일단 반목을 거듭하던 십자군 1세대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창업의 군주인 레몽, 보에몽, 그리고 보두앵은 모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론 탕크레드와도 사이가 나빴다.) 현실적으로 주변 무슬림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이 힘을 합쳤던 것이다.


 보두앵 2세는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도 십자군 국가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군주였다. 1125 년의 아자즈 전투 (Battle of Azaz)의 승리 이후 어느 정도 주변의 위기에서 벋어난 왕국은 후계 문제 해결과 내부 결속을 다질 목적으로 일련의 결혼 정책을 추진했다. 보두앵 2세에게는 딸은 넷이 있지만 장성한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첫째 멜리장드는 플랜테저넷 왕조의 시조인 풀크 5세와 결혼해 보두앵 3세를 낳았고, 둘째인 앨리스는 보에몽 2세와 결혼 공녀 앨리스를 낳았다. 셋째 딸 오에르디나 (Hodierna) 는 트리폴리의 레몽 2세와 결혼해 북부의 영주들과 예루살렘 왕국은 혈연으로 동맹을 이루게되었다. 이후의 안티오크 공국은 예루살렘 왕국과는 친밀한 관계로 접어들지만 새롭게 친정을 한 젊은 보에몽 2세가 주변 십자군 국가 및 다른 세력들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결국 1130 년 사망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안티오크 공작령의 지배자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푸아티에의 레몽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1137 년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2세의 공격을 받은 후 그의 가신이 되었다. 요한네스 2세는 특히 이 일대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큰 관심이 있었으나 결국 군사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덕분에 안티오크는 가신 상태로라도 독립은 유지했다. 


 에데사 백작령이 함락되고 (1144년), 2차 십자군이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으며 푸아티에의 레몽 역시 이나브 전투에서 사망했으나 (1149년) 나중에 그 아들인 보에몽 3세가 공작의 자리에 오르면서 공작령은 그 후 100 여년간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 보에몽의 혈통에 의해 비교적 순조롭게 계승되었다. 보에몽 3세는 무능한 르노 드 샤티옹 이후 권좌에 올라 1163 년부터 1201 년까지 여러 우여곡적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티오크 공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안티오크의 지배자들은 단명하거나 혹은 상속권이 있는 여자와 결혼해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는 통치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통치자가 없어져 어쩔 수 없이 섭정을 들여야 했던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무모하기까지한 주변 세력과의 전쟁으로 통치자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힌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비록 보에몽 3세 역시 포로로 잡힌 역사가 있으나 그래도 역대 안티오크 공작 중 가장 긴 통치기간 동안 비교적 안전하게 공국을 다스렸다. 또 누레딘의 시대 이후로 중요한 공격 목표가 예루살렘 왕국이 되고 살라딘 이후로는 주로 이집트 쪽에서 공격이 들어왔던 것 역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3 세기에 들어오면서 안티오크 공국은 결국 트리폴리 백작령과 합쳐졌다. 이것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안티오크 가의 레몽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북부 십자군 국가가 탄생하는 셈인데 레몽 3세의 대승적 조치로 인해서 안티오크 - 트리폴리가 오래 살아남는 계기가 된다. 



(13세기의 북부 십자군 국가는 사실 여기서 표시하는 것보다 그 영역이 작을 때도 있었다. 이들은 13세기 후반에 들어 맘루크 조의 북상과 더불어 몰락했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LittleArmeniaPrincipality_of_AntiochTripoli.jpg  ) 


 후계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기는 해도 보에몽 4세 이후에는 안티오크 - 트리폴리는 하나의 통치자에 의해서 지배된다. 이후 13 세기 후반에는 점증하는 맘루크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티오크는 몽골 제국의 가신이 된다. 이를 주도한 것은 보에몽 6세로 당시에는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국 몽골 세력이 이 지역에서 맘루크조를 이기지는 못했기 때문에 안티오크 공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보에몽 6 세 시절에 안티오크를 상실한 이후 보에몽 7세의 누이인 루시아 시절에 트리폴리까지 상실하므로써 당대의 풍운아 보에몽에서 부터 시작된 안티오크 공작가는 대략 191 년만에 몰락했다. 



 (안티오크 공작가. 보에몽 4세 이후에는 트리폴리 백작을 겸함 )


 북부의 십자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안티오크 공작령은 12세기 전반기 동안 통치자가 자주 변경되고 주변 세력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면서 다소 불안했으나 보에몽 3세 이후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구축했으며 사실 하틴 전투 이후에는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의 잔재들 보다 더 큰 영토를 유지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맘루크조의 북상에서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몽골 제국 (일한국) 의 속국으로 들어갔으나 불행히 13 세기 후반의 맘루크 - 몽골 전쟁에서 결국은 맘루크 쪽으로 승세가 기울면서 이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안티오크 공작령이 가장 중요한 북방 십자군 국가였지만 나머지 두 백작령도 간단히 언급할 필요는 있다. 일단 에데사 백작령은 초기에 보두앵 1세가 개척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사촌뻘인 보두앵 2세에게 이를 물려주고 자신은 국왕자리에 올랐는데, 이후보두앵 2세 역시 자신의 친척인 조슬랭 1세 (Joscelin I, Prince of Galilee, Lord of Turbessel, Count of Edessa ) 백작 자리를 물려주고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에데사 백작령은 초기부터 예루살렘 왕국과는 일체였으며 안티오크 공작령이나 트리폴리 백작령과는 때때로 긴장 상태에 놓였다. 


 에데사는 1144년 함락되었으며 투베르베실에서 저항하던 조슬랭 2세가 죽은 후 남은 영지는 모두 무슬림들의 손에 넘어갔다. 에데사는 본래가 무슬림의 반격의 거점인 알레포와 가까이 있어 적에게 노출되기 쉬었을 뿐 아니라 당시엔 안티오크 등 주변 십자군 국가와도 유기적으로 협력하기는 커녕 대립했기 때문에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트리폴리 백작령은 자신도 우트르메르에 영지를 가져야 겠다고 마음먹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에 의해 개척되었다. 트리폴리 백작 중 가장 걸출한 인재는 레몽 3세였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등을 맡으며 왕국이 어려운 시절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나 하틴 전투의 재앙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후사없이 죽기전 가장 현명한 판단으로 결국 트리폴리 백작령을 안티오크 공작령에 합쳤기에 북부 십자군 국가들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본래 1 차 십자군의 결과 생겨난 국가는 아니지만 위치상 십자군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말기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가져가는 국가가 키프로스 왕국이다. 키프로스 왕국은 3차 십자군의 결과 탄생했는데 그 초대 국왕은 뜻밖에도 뤼지냥의 기 였다. 이렇게 생긴 뤼지냥 가문은 1192 년 부터 1489 년까지 키프로스 섬을 지배했으며 이후에는 베네치아에 사실상 합병되었다. 


 역대 키프로스 왕은 1291 년 이후에도 자신들이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임을 주장할 때가 있었는데 때때로 이를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365 년에 피에르 1세 (Peter I of Cyprus) 는 구호기사단, 베네치아와 협력해서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Alexandrian Crusade) 라는 이집트 원정군을 결성한 바 있다. 여기에는 사실 경제적 동기도 많이 작용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예시당초 키프로스의 국력으로 이집트가 정복 가능한 대상은 아니었다. 15세기에 들어와 왕국은 맘루크 및 제노바, 베네치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며 결국 베네치아에 합병되는 (판매되는 형식이긴 했지만) 운명을 맞게 되는데 약소국으로써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이었고 오히려 300 년 가까이 버틴게 더 신기한 경우였다. 



 앞서 설명한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한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될 수 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이미 본론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무슬림들 세력의 극심한 분열 덕분이었다. 물론 십자군 내부 분열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슬람 세력권 내의 분열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준이었다. 일단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으로 오랜 반목을 해왔고 셀주크 투르크가 점령했던 지역들에는 수많은 에미르 (Emir : 태수 정도로 번역) 와 그 비슷한 지역 군주들이 마치 비가 온 후 여기저기서 풀이 자라나듯 생겨났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거의 무정부 상태에 이른 덕에 십자군은 성공했고 더 나아가 버틸 수도 있었다. 물론 장기간 버틴 이유들은 여러가지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주기적인 십자군과 기사단의 존재,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와의 상업, 이후에는 몽골 제국의 등장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분열로 인해 가능하지 않았던 군사적 도박이 성공하고 이들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이를 두고 이슬람 무정부 상태에 대한 프랑스 군주제의 승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변 이슬람 세력이 통일 됨에 따라 이들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 왕국 스스로가 주변 지역을 통합해서 규모를 키우지 않는 이상 새롭게 등장한 아이유브 제국이나 맘루크 조, 그리고 몽골 제국의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주기적인 십자군은 최종적인 멸망만 조금 늦췄을 뿐이었다. 


 점차 이슬람 세력이 통일됨에 따라 장거리 군사 원정이 성공할 가능성은 크게 줄었고 실제로 1차 말고는 군사적으로 성공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대규모 십자군은 없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이 군사적 도박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급격히 증가했고 결국 서유럽의 유력 군주는 물론 일반 기사들도 나중에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 참가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어 십자군 운동 자체도 위축되었다. 그리고 13 세기 후반에는 십자군 운동이나 십자군 잔존 세력이나 모두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만 한정했을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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