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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7






13. 칼라운의 반응 


 칼라운 (Qalawun) 은 바이바르스의 자식들을 축출하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지만 기본적으로 바이바르스와 같은 정책을 고수했다. 즉 지금의 레바논, 이스라엘, 그리고 시리아 지역까지 합친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을 이집트의 세력권안에 두는 것이었다. 이는 이집트 입장에서는 적의 침공을 막아줄 든든한 방벽임과 동시에 동서 상업 루트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대로 심지어 협상 기간 동안에도 칼라운은 십자군 잔존 세력들의 항구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1289 년 트리폴리가 함락된 이후 누가 보더라도 다음 표적은 아크레였다. 당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앞서 말한 아크레의 학살극의 생존자와 유족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희생자들의 피가 묻어 있는 옷을 들고가서 카이로의 술탄앞에 보여주고 무도하고 신의없는 프랑크인들 (당시 중동에서는 서방인들을 이렇게 불렀다) 에게 복수해줄 것을 탄원했다. 이를 본 칼라운은 크나큰 분노를 표시하며 (이를 꼭 연기라고만 생각할 순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본래 칼라운은 십자군을 싫어했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정의를 되찾아주겠노라고 맹세했다. 


 칼라운은 사절을 아크레로 보내 당장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신병을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아크레 측이 느꼈을 심리적 부담은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힘들게 해외에서 데려온 용병들을 적에 손에 넘긴다면 서방측에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과연 누가 아크레를 도우러 올 것인가 ? 반면 이 요구를 거절하면 이를 구실로 평화 협정을 깨고 칼라운이 공격하는 상황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고심끝에 아크레 측이 칼라운에 보낸 답장에는 범인들이 아크레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베네치아 영역에서 일어나 자신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물론 이런 뻔한 답변에 칼라운이 만족했을 리는 없다. (아니면 만족했을 수도 있다. 아크레를 공격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면 말이다) 결국 칼라운은 아크레를 최종적으로 함락시켜 십자군 잔존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키기로 결심했다. 


 1289 년 10월 십자군 측과 이집트 측은 10 년간의 평화 협정에 서명했지만 칼라운은 이 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일으켜 아크레 원정에 나섰다. 1290 년 10월, 술탄의 군대가 아크레를 향해 진격했지만 이 역사적 과업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칼라운은 1290 년 11월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알 아슈라프 카릴 (Al-Ashraf Khalil  /   Al-Malik al-Ashraf Salāh al-Dīn Khalil ibn Qalawūn ) 이었다. 당시 나이 28세로 한창인 나이의 젊은이었다. 


 칼라운은 임종 때 카릴에게 반드시 자신이 못 이룬 과업 - 즉 아크레를 정복하고 나머지 십자군 영토를 장악해서 불신자 (십자군) 의 무리를 영원히 이 땅에서 추방하는 것 - 을 달성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카릴은 부친의 뜻을 이어 반드시 이 과업을 달성하겠다고 맹세했다. 



 14. 십자군의 반응


 당시 상황을 보면 놀랍게도 아크레에 있는 십자군과 주민들은 앞서의 학살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 한명이 예외였는데 바로 템플 기사단의 단장 기욤 드 보죄 ( Guillaume de Beaujeu 재임 1273 - 1291 년) 가 그 주인공이었다. 텀플 기사단의 21대 단장인 그는 당시 돌아가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앞서 이야기한데로 이탈리아 북부 (주로 투스카니 및 롬바르디) 지역에서 모은 대략 1600 명 정도의 병력은 제대로 훈련도 안되었을 뿐 아니라 급료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그들이 폭동을 일이킨 것은 1290 년 8월이었는데 당시에 무슬림은 물론 기독교도도 약탈과 살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칼라운이 관련자를 모두 인도할 것을 요구하자 일단 이 위기를 피해가고 싶었던 기욤 드 보죄는 현재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신 보내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아크레 수뇌부는 이를 거절했고 사실상 칼라운의 모든 요구를 묵살했다. 그들이 왜 이런 배짱을 부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화 협상을 지나치게 믿었던게 아니라면 난공 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높은 아크레의 성벽을 과신했던 게 분명하다. 여기에 칼라운이 아크레 시민들의 몸값으로 적지 않은 금액까지 요구했으므로 이를 거절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결국 기사단장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막을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가고 있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새로운 술탄이 된 카릴에게 사절을 보내긴 했으나 카릴은 그들이 바친 선물도 받지 않았고 그들 모두를 수감해버렸다. 즉 이제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크레 측에 통보했던 것이다. 


 그해 겨울 카릴의 명령으로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신규 병력이 대거 모집되었으며 여기에 많은 나무를 베어 막대한 수의 투석기들이 건설되었다. 일단 새로운 술탄의 부친의 유지를 지킬 것이라는 데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아크레의 십자군은 매우 다급해 질 수 밖에 없었다. 1291 년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전 그들은 유럽의 모든 유력자들에게 급전을 띄워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 가운데는 영국의 에드워드 1 세, 독일의 튜튼 기사단의 단장 부르카르트 폰 슈반덴 ( Burchard von Schwanden) 등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반응은 차가웠다. 튜튼 기사단이야 아크레에도 기지가 있고 기사단의 의무로써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급하게 병력을 모았지만 이 역시 충분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소수나마 병력을 보내 곳 가운데 하나는 키프로스 왕국도 있었다.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앙리 2세는 사실 명목상의 예루살렘 국왕이기도 했다. 그런만큼 직접 병력을 지휘할 수 있을 만한 명분도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아크레는 독립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크레가 함락되도록 지켜 볼 수 만은 없었으므로 급하게 동생에게 약간의 병력을 붙여 아크레를 방어하도록 했다. 


 한편 에드워드 1 세의 신하인 오토 드 그랜드손 (Otto de Grandson) 역시 늦지 않게 아크레에 합류했는데 소수의 기사들이나마 더 충원해 줄 수 있었다. 이외에 병력을 보낼 수 있는 동맹군은 바로 베네치아, 피사 같은 해상 도시들로 이들은 이 도시에 자신들의 거류지와 무역 거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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