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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3






 5. 1270 년대 후반의 상황


 1276 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승하한 후 교황청은 혼돈에 빠졌지만 알프스 맑은 산자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루돌프 1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로마 교황청이나 이탈리아가 아니었다. 그는 충실하게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물론 루돌프 1세가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것은 이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이 그렇게 된 사이 십자군 잔존 세력은 어떻게 지냈을까 ?


 일단 십자군 잔존 세력의 규모는 사실성 거의 몇개의 도시 국가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크레는 이제 그 자체로써 거의 도시 국가화 되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로인해 이전보다 더 번성했다. 일단 3대 기사단인 튜튼, 구호, 성전 기사단이 여기에 모두 본부 내지는 (튜튼 기사단은 사실 근거지는 이곳이 아니지만 아무튼 구호, 성전 보다는 작아도 본부를 건설했다) 기지를 건설했으므로 아크레의 안전을 보장하는 상비군으로 작용을 뿐만 아니라 인구를 유입시키는 역활도 했다. 


 이렇게 어느 정도 병력이 모여 도시를 방어할 뿐 아니라 앞서 여러차례 설명했듯이 아크레 자체가 난공불락, 금성탕지의 요새였기 때문에 바이바르스 마저도 번번히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각 기사단 중 구호 및 성전 기사단은 아크레와 남은 도시 몇개가 사실상 마지막 남은 보루였으므로 여기서 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더 용맹을 발휘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아크레가 마지막까지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가 된 이유일 것이다. 


 아크레 번영의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서방측의 대 오리엔트 창구라는 사실에도 있었다. 즉 이미 십자군 국가 초기 시절부터 이 지역에 무역망을 건설한 피사, 제노바 및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 지역에 거류지를 형성하고 대 중동 무역의 창구로 삼게되자 아크레는 더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 즈음 되면 다른 쓸만한 항구는 거의가 맘루크조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또 서방측에서 끊임없이 성지를 순례하는 모험을 즐기는 순례자들 - 사실 성지 순례는 예루살렘 왕국이 멀정하던 시절에도 모험이었다. 물론 동시대의 유럽에서도 장거리 여행은 질병, 기아, 도적, 악천후 등을 피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 은 이 항구를 거쳐지나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남은 십자군 세력들은 이제 벼랑 끝에 몰린 수세이긴 하지만 나름 살길을 찾아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번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사실 내부적인 부분보단 외부적인 상황이었다. 즉 맘루크 조와 그 주변 상황이 큰 변수였다. 


 십자군에겐 다행하게도 아크레와 잔존 십자군 세력을 위협하던 바이바르스는 1277년 죽었다. 뒤를 이은 것은 일단 그의 아들인 알 사이드 바라카 (Al-Said Barakah) 였다. 즉위 당시 그의 당시 나이는 대략 17 세 정도였고 사실 왕위 계승은 당대의 이집트의 하극상을 고려했을 때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다만 이 새로운 통치자의 재능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므로 결국 2년만에 그는 아버지 시절부터 용맹을 떨치던 다른 맘루크 출신 에미르인 칼라운 (Qalawun) - 그는 1000 디나르에 알 카밀에게 팔려왔다고 한다 -  으로 대체된다. 칼라운은 1279 년 바라카를 축출하고 그의 7 살 된 동생을 허수아비 술탄으로 세운 후 역시 축출한다. 


 그러나 1280 년에 그가 술탄임을 선포하자 트러블이 발생했다. 다마스쿠스를 다스리던 관리인 순구르 (Sungur) 가 이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전투에서 칼라운이 승리했으므로 사실상 칼라운은 이집트와 맘루크조의 술탄이 되었다. 이들의 트러블은 일 한국의 아바카 칸이 다시 맘루크 조를 위협하자 일단 중단되었다. 즉 이들이 같이 몽골의 침공에 대비했던 것이다. (물론 순구르가 칼라운을 인정하는 선에서 화친이 이루어졌다) 



6. 2차 홈스 전투 (Second Battle of Homes)


 일한국은 오랜 세월 절치부심 맘루크조에 대한 복수를 꿈꿔왔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치욕을 다시 갚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바카 칸이 실제로 충분한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던 것은 1280 년에 와서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사실상 십자군 세력은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져 의미 있는 동맹군이 되기는 힘들었다. 여기에다 십자군 잔존 세력들은 이제는 적극 전쟁에 참여하기 보단 사태를 강건너 불보듯 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므로 (사실 보낼 병력도 없었다) 함께 맘루크 조를 공격하자는 일 한국의 제의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솔직히 그레고리오 10세가 살아있었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일 한국은 1281 년 아주 대규모 병력을 모처럼 시리아 방면에 투입할 수 있었다. 몽골군을 지휘하는 것은 아바카 칸의 동생인 몽케 테무르 ( Mongke Temur ) 였는데 5만명의 몽골 군에 3만명에 달하는 보조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 보조군의 대부분은 아르메니아군 (Armenia) 과 조지아(Georgia 그루지아) 군으로 각각 국왕인 데메트리우스 2세 (Demetrius II, 조지아 국왕) 와 레오 2세 (Leo II, 아르메니아 국왕) 가 이끌고 있었다. 만약 십자군이 참전했다면 당시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을 생각할 때 이들보다 훨씬 더 적은 규모였을 것이므로 솔직히 프랑크 - 몽골 동맹 같은 단어는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맞서는 칼라운의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무튼 몽골군에 비해 맘루크 군이 열세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는 맘루크 군이 딱히 열세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최대 위기라고 할 정도로 적의 대군과 마주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라의 뜻이었는지 역시 승리는 맘루크조의 것이었다.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지만 아무튼 칼라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몽골군의 본진을 공격했으며 몽케 테무르는 부상을 입고 후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2차 홈스 전투의 기록화   14 세기 작품.  "Histoire des Tartares", Hayton of Coricos, 14th century,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publid domain image )  


 사실 이 전투에서 칼라운은 간신히 몽골군의 침공을 저지했을 뿐이고 다시 아바카 칸이 복수를 위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칼라운은 신의 가호가 계속 따라줬다. 1282 년 아바카 칸이 죽었던 것이다. 그를 계승한 테쿠데르 (Ahmed Tekuder) 는 술탄 아흐메드로 알려진 인물로 불교도인 형과는 달리 이슬람 교도였다. 결국 그의 짧은 재위 기간 (1282 - 1284 년) 동안 그는 맘루크조와 화해했기 때문에 한동안 칼라운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한가지 불행한 일은 이 무슬림 지배자의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다. 그의 조카인 아르군 칸 (Arghun Khan) 의 재위가 되자 다시 칼라운에게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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