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칼라운의 외교
당시 맘루크조의 술탄이 된 칼라운은 약간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칼라운의 최대 과제는 자신이 찬탈한 왕위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그것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당시 맘루크조는 아프리카 방면에서는 큰 위협이 없었지만 유럽의 잠재적 위협 (즉 십자군) 과 이보다 더 직접 적인 몽골 제국이라는 위협 요소가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칼라운은 1284 년까지는 한 시름 덜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285 년 이후 그 역시 동서간의 연합군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이 외교적 고립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칼라운은 이제는 거의 쇠락한 상태였지만 복원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8 세 팔라이올로고스 (Michael VIII Palaiologos ) 와 연합했다. 미카엘 8 세는 호시탐탐 비잔틴 제국의 황위를 노리는 샤를 1세와 그를 지지하는 교황과 대립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에 충분한 동맹이라곤 할 수 없었다.
칼라운은 추가적으로 나중에 시칠리아 왕국이 샤를 2세의 손에서 벗어나 전쟁을 치루는 중에 시칠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제노바와도 무역 조약을 맺긴 했지만 이것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였고 제노바는 특히 장사이외의 영역에서는 믿을 수 없는 동맹이었다.
결국 칼라운은 방위를 위한 선제적 공격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병력면에서 우세한 일한국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으며 이전에 아인 잘루트 전투나 2차 홈즈 전투처럼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훌륭한 대처법이 될 수 있었다. 즉 적이 침공하면 이전처럼 시리아에서 이를 요격한다는 생각이었다. 칼라운이 선제 공격의 목표로 생각한 것은 만만한 십자군의 잔존 보루들 이었다. 적어도 십자군이 결성되더라도 상륙 루트가 없다면 상당한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285 년 이후 칼라운의 공세가 시작되게 된다.
사실 프랑크 – 몽골 동맹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군사 동맹이지만 결과적으로 이의 추진이 레반트의 무역 거점으로 살아남은 일부 십자군 잔존 도시들이 최종적으로 몰락을 걷는데 일조한 셈이었다. 이미 십자군 국가라는 것은 사라진지 오래였으나 최종적으로 분쇄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면 당시 십자군 잔존 세력은 어떻게 이 위기를 대처했을까 ?
10. 십자군의 마지막 나날
이 마지막 시기에 현지의 십자군이나 베네치아, 제노바 상인들이 힘을 합쳐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했다고 생각한다면 인간 본성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본래 십자군은 마지막 9차 십자군에서 10년간의 휴전에 동의했다. 그 시기 십자군을 대표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칭 예루살렘 국왕인 키프로스 국왕이 아니라 샤를 1세였는데 그 대리인인 루지에로 디 산세베리노는 1282 년 시칠리아 만종 전쟁 이후 다시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며 그를 대신해서 오도 드 푸아레상 (Odo of Poilechien) 이 지역으로 와서 다시 10년간의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것으로 위협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현지의 십자군 세력들 – 기사단 및 상인들 – 은 이전에 했던 대로 서로를 향해 다시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칼라운의 위협은 착실하게 그들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1285 년, 당시 아크레와 티레, 트리폴리등 주요 도시를 제외하고 가장 큰 십자군 요새이자 구호 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마르카브 (Marqab, 현재는 Margat 로 부름)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요새는 360 미터 높이 언덕위에 세워져 십자군 성채 가운데서도 견고하기로 이름이 난 요새였는데 과연 한달동안의 포위 공격에도 칼라운은 이 요새를 점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사들이 구덩이를 판후 여기에 목재 지지대를 놓고 불을 붙여 기반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공성 지뢰를 사용해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도 요새의 완전히 파괴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칼라운은 항복하면 무장한채 퇴각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와는 달리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 요새의 높은 가치를 알아본 칼라운은 여기에 자신의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아무튼 이렇게 남아있는 십자군의 요새들이 거의 대부분 사라지게 되자 이제 남아있는 십자군 도시들에 대한 방어를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287 년 마침내 라타키아가 함락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지진 덕이기도 했다. 이제 십자군 수중에는 티레, 아크레,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만이 지켜주는 주변 요새도 거의 없이 외롭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십자군 기사단과 이탈리아 상인 세력등은 서로 반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역으로 맘루크조에 이익을 주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칼라운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역도 좋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왕조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더구나 1280 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일한국과 서방측의 협력이 가시화 되는 시기라 칼라운의 발걸음은 더 바뻐질 수 밖에 없었다. 칼라운이 다음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트리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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