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9





16. 공격측의 준비 


 역사상 아크레를 공격했던 많은 시도들은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앞서 여러차례 설명한 천혜의 요새로써의 특징들 때문이다. 따라서 아크레는 레반트 (지중해 동부,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분수령을 만들어 냈는데 중요한 아크레 포위전 (Siege of Acre) 만 생각해봐도 3 차 십자군 (1189 - 1191), 최후의 십자군 (1291),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1799), 오토만 제국 내전 당시 (1821), 오토만 제국 - 이집트 전쟁 (1832)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실상 근대화로 인해 성벽의 가치가 거의 사라지기 전까지 이 요새도시는 그 점령하기 어려움으로 인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이 도시가 매우 점령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3차 십자군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앞서 이야기 했듯이 3차 십자군 이후로 예루살렘 왕국 망명 정부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도시의 방어는 한층 견고해져 그야말로 난공불락, 금성탕지의 요새였다. 그로인해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은 팔레스타인 해변가에 다른 도시들은 대부분 함락시켜도 그 한가운데 위치한 이 도시만큼은 번번이 함락시키는데 실패했다. 


 이전에 여러차례 맘루크 조 술탄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했던 도시를 공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임 술탄 알 아슈라프 카릴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일단 무슬림 보호를 위해 성전을 일으킨다는 명분하에 시리아와 이집트 각지에서 병력을 모아들였다. 각지의 태수들이 이 부름에 응해 병력을 모아 집결했는데 역사상 기록에 의하면 16 만의 보병과 6만의 기병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전성기 시절의 살라딘조차 동원하지 못했던 병력이고 과거 훌라구가 이끌고 서남아시아를 유린했던 병력보다 많기 때문에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맘루크조의 사정을 고려할 때 수만명의 병력을 편성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므로 일단 성을 방어하는 측을 압도할 수준은 충분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크레는 삼각형으로 바다로 돌출된 지형에 건설되어 있어 육지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크게 보면 거의 삼각형의 한변만 지상군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실 10 만이 아니라 100 만 대군이라 할 지라도 한번 공격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매우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순수 보병으로 사다리를 이용하여 올라가는 전법은 높은 지형에 건설된 성벽 때문에 불리했으며 공성탑 역시 비슷한 이유로 활용이 어려웠다. 


 이전에 아크레를 공격하는데 검증된 방법은 바로 투석기와 공성 지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카릴이 택한 방법은 바로 투석기였는데 중세의 투석기는 병력보다는 성벽을 부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어디든 성벽이 무너지면 이곳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해 공성전을 마무리 짓는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1290 년 - 1291 년 사이에 많은 목재를 베어 100 대 정도의 투석기가 완성되었다. 


 술탄이 걱정한 것은 포위전이 장기화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집트와 시리아가 빈틈을 타고 외적이 처들어올 가능성도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식량 조달 문제와 질병 창궐의 우려가 있었다. 실제 3차 십자군 당시 증명되었듯이 상당수 병사가 오랜 포위전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사실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끌고 왔으므로 빨리 결판을 내야지 3차 십자군 당시 처럼 2년 이상 끌게 되면 설령 이긴다 해도 작은 도시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너무 엄청난 손실을 강요당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끌고가려는 십자군 측과 이를 빨리 해결하려는 맘루크 군 측 전략은 좀 지나치게 말하면 아크레의 성벽이 튼튼한지 아니면 투석기가 더 강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100 대의 투석기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맘루크 군은 아크레를 향해 진격해 1291 년 3월부터 그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7. 아크레 포위전 


 아크레 포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291 년 4월부터이다. 1291 년 4월 5일. 하마의 태수가 이끄는 병력이 성전 기사단의 탑 (Templar's Tower) 앞에 병력을 주둔시켰고 이집트에서 온 주력 부대는 Montmusard 의 끝에서 아크레 만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디흐리즈 (Dihliz) 라고 불리는 술탄의 붉은 텐트 (사령부를 겸하는 의미) 는 교황 특사의 탑 (Tower of the Legate) 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에 그 자리를 잡았다.  




(1291 년 당시 아크레 공방전 시점에서의 지도  


 공격 위치를 잡은 다음날인 4월 6일 마침내 맘루크 군의 투석기에서 아크레의 성벽을 목표로 엄청난 돌 포탄 세례가 쏟아졌다. 물론 방어하는 측도 당하지만은 않고 육지에서는 물론이고 바다에서도 투석기로 응사했다. 다만 이 경우 시간이 흐를 수록 공격하는 측이 더 유리해졌다. 왜냐하면 많은 인원으로 인해 투석기를 쉬지 않고 포병을 교대해 가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전 시작 후 8일간 아크레의 성벽에는 돌 포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가 않았다. 


 이 공격후 자신감을 얻은 맘루크 군은 본래 공격선에서 더 앞으로 전진해서 성벽에 상당히 근접했다. 그런 만큼 투석기 공격은 더 거세질 상황이었다. 또 충분히 가까운 위치에 이르게 되면 여기서 부터 성벽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다. 비록 이 시기에 키프로스 왕국에서 지원병력이 도달하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크레의 성벽도 적의 투석기의 공격을 결국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십자군 측은 비장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특공대였는데 야간에 기사들을 주력으로 구성된 특공대가 적의 투석기를 파괴시키거나 혹은 불태우기 위해서 출격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시도는 4월 15일 이었는데 재수없게도 무슬림 군대의 막사 줄에 말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들통나 적지 않은 병력만 손실하고 말았다. 수일 후 시행된 2차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미리 준비된 맘루크 군대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월 5일, 마침내 키프로스 왕국의 앙리 2세가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병력을 태우고 40 척의 배와 함께 아크레 항에 도달했다. 따라서 의기 소침했던 방어군은 잠시나마 다시 희망을 되찾지만 곧 이들을 포함 앙리 2 세 역시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식으로 투석기의 공격이 계속되면 2차 성벽까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곧 십자군 측에서 마지막으로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을 본 알 아슈라프 카릴은 항복하려는 의사로 생각했는지 도시의 열쇠를 가져왔는지 물어왔다. (중세 서양에서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는 것이 도시가 항복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절들은 아크레가 그렇게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은 다만 고통받는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왔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이어 이들은 신뢰를 회복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그냥 휴전 협상을 위해 왔음을 밝혔다. 술탄은 십자군이 평화롭게 도시를 양도한다면 누구도 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물론 이 대답은 사절단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말 최후에 순간에서야 항복하거나 혹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매우 타이밍이 좋지 않게도 마침 아크레에서 발사한 투석기가 술탄의 텐트 옆에 돌을 날렸다. 이를 본 카릴은 사절단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들 중 2명을 죽이라고 명했으나 옆에 있던 에미르의 만류로 사절단은 다행히 목숨만은 보전해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로써 아크레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투석기의 맹렬한 공격과 더불어 충분히 가까운 위치까지 군대를 진격시킨 맘루크 군은 5월 8일 부터 탑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거나 점령했다. 뒤집어 말하면 십자군이 탑들을 하나씩 포기했다. 상황은 이제 함락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