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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1






 1. 10 차 십자군을 위한 노력


 역대 십자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군사적 도박이었던 7/8/9 차 십자군은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루이 9 세나 에드워드 1세등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군주들을 제외한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13 세기 후반 십자군의 인기는 역대 최저수준으로 감소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지가 이교도에 손에 있다는 사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1차 - 3차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십자군과 십자군이 세운 국가들은 대개 상시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종종 드물지 않게 유럽에서 십자군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한 신규 병력들이 당도했었다. 그들은 성지만 방문하고 바로 귀국하는 일도 흔했지만 일부는 현지에 오래 머물거나 혹은 정착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 이슬람 세력들이 혼란에서 벋어난 이후에는 소수의 외부 세력이었던 십자군 세력들은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무슬림 국가들의 상대가 되긴 힘들었고 간신히 해안가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의 후반기 100 년을 요약하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말해 1차 십자군은 상당한 전리품과 새로운 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원정이었으나 5차 이후의 십자군은 전리품은 고사하고 생명의 안전도 보장하기 힘든 도박이었다. 


 더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등 서유럽에서는 쟁쟁한 권위를 지닌 군주들도 사실상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하는 일이 늘어나자 유럽에서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가 증가했다. 후반기의 십자군들은 대개 군주 개인이 시도했던 일인데 대부분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만 가져오고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13 세기 후반에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이 널리 시대착오적인 아이디어로 생각되었다고 해도 놀랄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러하듯이 이런 와중에서도 십자군의 이상을 계속 불태우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었다. 


 사실 8/9 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기도 전에 그 다음 십자군에 대한 논의가 존재했다. 첫번째는 루이 9세가 죽은 후 프랑스 왕국의 유력자 및 그의 동생인 샤를 1세가 다음 십자군에 대해 맹세한 것이고 두번째는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오 10 세 (Gregory X  1271 - 1276) 가 새로운 십자군을 계획한 것이었다. 



 2. 그레고리오 10세 


 여기서 우선 설명할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오 10 세 이다. 본래 그는 이탈리아 피아첸차 출신으로 본명은 테오발도 비스콘티 ( Tedaldo Visconti ) 였는데 매우 독특한 과정을 거쳐 교황좌에 올랐다. 선대 교황인 클레멘스 4 세 (Clement IV) 가 1268 년 서거한 후 교황청은 한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 처럼 차기 교황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중세 유럽의 세속과 신앙의 두 지도자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연출된 이유는 무엇보다 당시 이탈리아와 교황청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프랑스 왕실에 있었다. 당시 상황은 사자가 없는 틈을 타서 여우가 왕노릇을 하는 상태로 표현할 수 있는데 호엔 슈타우펜 왕조가 붕괴되자 그 때까지 큰 발언력이 없던 프랑스 카페 왕조의 힘이 대폭 강화되었던 것이다. 대공위시대의 혼란을 적절히 활용한 샤를 1세는 앞서 설명했듯이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더 나아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자리까지 노리는 야심가였다. 


 그런 만큼 프랑스 세력들은 교황좌에 새로운 프랑스인 교황을 앉히려고 노력했다. 반면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은 여기에 반대표를 던져 무려 3년이나 (1268 - 1271 년) 교황이 선출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교착 상황은 교황파나 혹은 프랑스파 모두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추기경들이 모여있던 비테르보에서 추기경들을 감금한 후 빵과 물만 주고 교황을 선출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다고 못밖은 3일 후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이탈리아 인이지만 대부분의 임기를 알프스 북쪽에서 지낸 인물로 당시 교황청이 미묘한 외교적 상황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본래 교황측은 기벨린파의 공격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였으나 일단 외세를 끌어들이면 그냥 빈손으로 나갈리는 만무한 것이 역사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의 가장 큰 적수인 황제는 당시 없었지만 대신 앞서 언급한대로 프랑스 왕실의 영향력이 이전 신성 로마 제국만큼 커지고 있었으므로 이 미묘한 시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인물로 국제적인 감각에 능하고 명망가인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이 교황 선출 소식은 그레고리오 10 세 본인에게는 매우 놀라운 소식이었는데 특히 그가 에드워드 왕자와 더불어 9차 십자군에 종군하기 위해 아크레에 있는 중에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교황으로써 가장 공들인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10차 십자군 결성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초상화    Public domain image )  


 여담이지만 그레고리오 10세는 여러가지 과단성 있는 조치로 5년의 재위기간 동안 여러 업적을 남긴 교황이었다. 특히 교황이 선출되지 않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1274 년 2 차 리옹 공의회 (Council of Lyon)  에서 신속한 교황 선출을 위한 새로운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했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더 이상 3년씩이나 교황좌가 공석으로 남는 일은 없었다. 여기에 대공위 시대를 종식 시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를 지지해 그가 황제가 되도록 도왔다. 


 이는 물론 프랑스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본래 미미한 소영주 출신이던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왕조를 창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이외에도 동서 교회의 화해와 기벨린파와 구엘프파와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여전히 십자군이라는 시대 착오적인 이상에 매달린 인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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