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몽골과의 외교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의 마지막 수십년간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손발이 맞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십자군이 몽골 제국과 협력을 하려고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십자군 시대 말기에 최후로 대규모 십자군을 파견하려는 노력을 했던 그레고리오 10 세 (Gregory X)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번에는 몽골 제국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1271 년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황좌에 즉위한 거의 동시에 베네치아 상인인 니콜로 폴로 (Niccolo Polo) 와 마페오 폴로 (Maffeo Polo) 가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 (Kublai Khan) 으로부터 서신을 가지고 교황을 찾아왔다. 이들은 대칸으로부터 여러가지 임무를 받아 유럽으로 귀국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성묘 교회의 램프의 기름을 가져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역사상 유명한 마르코 폴로 Marco Polo 를 데리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왔다)
(쿠빌라이 칸의 서신을 받은 그레고리오 10세. 14 세기 기록화이다. public domain image)
아무튼 대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교황은 몽골 제국과 동서로 협력해서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는 역대 십자군 사상 한번도 이루어진적이 없는 과업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힘은 이제 서남아시아까지 거의 도달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여전히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대상은 일한국 ( Ilkhanate) 의 아바카 칸이었다.
사실 아바카 칸은 이전에 설명했듯이 서방측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맘루크조에 복수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협력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1274 년에는 몽골로써는 최초로 서방의 공의회 (리옹 공의회) 에 몽골측이 인원을 파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군사협력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물론 일 한국이 킵차크 한국 및 차카타이 한국등과 항상 군사적 긴장 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9 차 십자군 때처럼 약속만 하고 실제로 동서 합동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서방측 사정 역시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전에 약속을 어긴 측은 몽골측이었으나 이번에 약속을 파기한 건 바로 서방측이었다.
4. 무산된 십자군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몽골 측과 군사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방측도 병력을 동원해서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냥 몽골 제국이 침입해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 점령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었다. 또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면 맘루크 조의 바이바르스가 그렇게 쉽사리 패배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유럽에서도 대규모 십자군을 끌고 참전하지 않으면 사실 승리를 거두기도, 그리고 나중에 성지를 전리품으로 요구하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에는 십자군의 이상은 시대착오 중의 백미로 여겨졌으며 거듭된 군사적 실패와 연이은 참사로 인해 여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인원의 수는 1-4 차 십자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인원들 상당수는 8/9 차 십자군 이후 다시 귀국했거나 혹은 이미 현지에 존재하는 3대 기사단 (성전, 구호, 튜튼 기사단) 뿐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지원자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이 대규모 십자군을 편성한다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 없는 교황으로써는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0세에게는 이전의 교황들에게서 물려받은 아주 강력한 협상 수단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이전부터 교황의 특권이라고 주장되었고 특히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교황의 책무라고 주장되어진 것으로 바로 왕을 황제로 승격시킬 수 있는 - 즉 황제의 대관을 할 수 있는 - 권리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전 교황들이 그랬듯이 이를 밑천 삼아 새로운 십자군을 모집하려 했다. 즉 새로운 합스부르크 왕조의 루돌프 1세 (Rudolph I of Germany) 에 황제 대관을 해주는 댓가로 십자군 원정 참여를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돌프 1세 그레고리오 10세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루돌프 1세는 본래 현재는 스위스에 속하는 지역의 소영주 출신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스위스는 독일의 일부로 여겨짐) 사실 그가 독일왕 (로마인의 왕) 으로 선출된 이유는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여긴 독일내 유력 귀족과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돌프 1세는 숙적인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 (Ottokar II ) 를 1278 년 마르히펠트 전투 (Battle on the Marchfeld) 에서 격파한 후 독일내 합스부르크 왕실의 힘을 키우는데 전심전력해 훗날 유럽을 지배할 왕조 가운데 하나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었다. 그는 보기에는 멋있지만 실용성이 없다면 황제의 대관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루돌프 1세의 스테인드 글라스 상 Rudolph I of Germany at stained glass in Saint Jerome's chapel in town hall in Olomouc (Czech Republic).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ichal Maňas )
루돌프 1세는 심지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황제 대관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평생 황제 대관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영토를 키우는데 주력했기에 결국 700 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극도로 현실주의적 인물이 새로운 독일왕 (로마인의 왕) 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십자군 원정은 물건너 간거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루돌프 1세에게는 매우 편리하게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1276 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대략 1210 년생 정도로 추정되기에 아마 당시 나이로 60 대 중반이었을 것이고 당시 기준으로 장수한 편이었기에 빠른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죽음으로 인해 10 차 십자군은 결코 결성되지 못했다.
이후 교황들은 매우 단명하거나 혹은 시칠리아 만종 전쟁으로 알려진 복잡한 전쟁 상황에 연루되어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은 엄두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아크레 함락까지 때까지 쭉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현지의 십자군 잔존세력은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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