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방어측의 준비
일단 앞서 3차 십자군에서 설명했던 대로 아크레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요새 항이었다. 일단 바다쪽으로 튀어나온 지형과 다시 성벽으로 보호 받는 아크레 항구 때문에 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의미는 육지와 바다 모두를 포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제해권은 기독교 도시 국가들 (피사와 베네치아) 이 쥐고 있었으므로 카릴은 여기에 무의미하게 도전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 말은 사실상 십자군 최후의 결전으로 불리는 아크레 포위전이 거의 순수하게 육상 전투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제노바는 카이로 측과 강화를 맺은 탓으로 이번 전투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은 바다를 통해 계속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퇴각도 자유롭게 가능했다. 물론 방어측도 주로는 육지 쪽으로만 방어를 하면 되므로 상당히 공격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당시 아크레의 성벽은 이중으로 보강되어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약간 높은 고지대에 건설된 성벽 때문에 공격하는 측은 항상 위를 올려다 볼수 밖에 없는 천혜의 요새 지형이었다. 이런 상황은 3차 십자군 당시에도 그랬지만 이후 이 성벽은 이 도시가 예루살렘 왕국 망명 정부 (사실 이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 후반기 100 년은 그냥 아크레 왕국 Kingdom of Acre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 수도 역활을 했기에 더 강력하게 보강되었다.
유럽에서 온 부유한 순례자들과 더불어 유럽의 국왕들이 비용을 대고 12 개의 탑을 건설해 성벽의 요새 기능을 더 강화시켰는데 덕분에 헨리 2세 탑 (Tower of King Henry II) 이나 블루아 백작 부인 탑 (Tower of the Countess of Blois) 같은 탑들이 생겨났고 성벽도 두겹으로 보강되었다.
3 차 십자군의 역사적인 아크레 포위전 이후 도시의 서쪽으로는 더 확장된 Montmusart 라는 공간이 생겨났으므로 사실 도시는 더 커졌으나 방어 병력 역시 이전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공격에 딱히 불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또 성벽 전체 길이는 약간만 증가했으므로 공격측이 공격할 범위 역시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하게 성 자체의 방어 수준은 3 차 십자군 당시 아크레 포위전의 무슬림 수비 당시 보다 우월했다. 사실 이렇게 강화된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3대 기사단과 3개 해양 도시 (피사, 베네치아, 제노바) 가 주둔하는 기지가 되었기에 아크레는 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따라서 바이바르스도 번번이 점령에 실패했다.
(1291 년 당시 아크레 공방전 시점에서의 지도
그러나 이런 하드웨어와는 달리 아크레에는 인적 소프트웨어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방어측은 사실 완전히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이 넘어간 이후로 생긴 심각한 부작용은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에는 국왕이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멀리 떨어진 황제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교황 및 반대파와의 전쟁에 모든 총력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왕국은 예루살렘 자체를 수복했건만 사실상 분열 수순을 밟았고 각각 작은 독립 영주들에게 쪼개진 십자군 국가들은 통일된 무슬림 국가들에 더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심지어 13 세기 상반기에 상당 부분 영토를 회복했을 때 조차 예루살렘 왕국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이런 부작용은 마지막 순간까지 드러나 이 최후의 결전에서조차 최고 사령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명목상의 최고 사령관은 존재했다. 그는 바로 키프로스 왕국의 앙리 2세 (Henry II of Cyprus ) 였다. 이때쯤 되면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라는 타이틀은 그냥 명예직에 가까웠으며 키프로스 국왕이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렇다손 쳐도 일단 자신의 영토인 아크레를 그렇게 쉽게 내줄 수 없다고 본 젊은 국왕 (당시 21살. 1270 년생) 은 자신보다 한살 어린 동생 아말릭 (Amalric) 에게 약간의 병력을 내주어 이 최후의 방어전에 참가하게 했다. 현지에 도착한 아말릭은 국왕 대리로 당연히 최고 사령관의 자격이 있었으나 아직 채 20 세가 안된 이 젊은이는 경험도 데려온 병력도 적었으므로 명목상의 최고 사령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청해서 남쪽의 방어를 맡았다.
당시 방어 병력이 얼마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기록이 엇갈리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병력으로 17000 명 정도의 병력을 만들어 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다소 부풀려진 수치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아무튼 당시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 모든 병력을 여기 투입하고 기존에 아크레가 가지고 있는 병력에 대충 모아들인 용병 부대, 그리고 튜튼 기사단과 기타 소규모 기사단들이 보내준 병력, 에드워드 1 세가 보낸 소수의 병력, 피사와 베네치아가 보내준 병력 등 아주 잡다한 혼성 부대들이 모였으므로 1 만명 이상의 병력을 편성했다고 해도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이 마지막 결전의 핵심 부대는 역시 양대 기사단인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었다. 성전 기사단 (Knight Templar) 은 앞서 소개한 기욤 드 보죄 (Guillaume de Beaujeu ) 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1273 년부터 21 대 성전 기사단장 (Grand Master of Kinght Templar) 으로 일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단장 (그랜드 마스터) 로 일한 시점을 고려할 때 최소한 40 대 이상으로 현지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약 300 명으로 추정되는 성전 기사단원들은 이 방어전의 핵심 전력이었다.
300 명은 적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세 전투에서는 중무장한 기사 한명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실제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많지 않은 기사들과 종자, 그리고 그들이 지휘하는 현지 인력으로 많은 요새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서 십자군 국가가 200 년이나 지속되게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특히 당시엔 기사단의 업무가 거의 방어전 위주 였기 때문에 그들은 경험만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호 기사단 (Knight Hospitaller) 은 22대 기사단장인 장 드 빌리에 (Jean de Villiers) 의 지휘아래 싸웠다. 그는 1285 년부터 단장직을 맡고 있었고 정확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휘하는 기사의 수 역시 성전 기사단과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나 기사 외 다른 종자를 포함 기사단을 보조하는 병력이 존재했으므로 실제 지휘하는 병력은 성전 기사단장과 비슷하게 수천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정확히 지휘하는 기사의 수와 병력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들 역시 공성전의 경험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튜튼 (독일) 기사단의 경우 사실 아크레에도 본부가 존재했다. 프리드리히 2세 시절 건설되었다는 이 기지는 바로 성벽쪽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다른 양대 기사단 보다 늦게 생긴 이 기사단은 독일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4대 단장인 헤르만 폰 살차 (Hermann von Salza) 시절 발트해 연안 지역에 방대한 독일 기사단령의 기초를 쌓게 된다. (튜튼/튜턴 기사단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트 http://blog.naver.com/jjy0501/100146800229 참조 )
따라서 종교 기사단으로 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요새를 지키고 성지와 순례자를 보호하는 것을 주 임 삼는 두 기사단 보다 사실상 힘은 더 강력했으나 (사실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독립 국가에 가까웠다) 아크레 현지에서는 두 기사단에 비해 미약한 존재였다. 다만 독일 기사단 자체의 힘은 강력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유럽에 있던 기사단장 부르카르트 폰 슈반덴 ( Burchard von Schwanden) 에게 급전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바 있다.
그런데 이 단장은 돌연 사퇴를 하고 자신의 후임으로 콘라드 폰 페쉐트반겐 (Konrad von Feuchtwangen) 에게 아크레 공방전을 맡긴다. 그가 아크레 공방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 거의 없으나 아무튼 이 공방전에서 살아남은 후 기지를 베네치아 쪽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이 공방전에서 독일 기사단이 보낸 병력은 아무튼 양대 기사단에 비해 소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약간의 소수 기사단들이 공방전에 참가했으나 주력은 역시 현지 사정에 밝고 이런 전투를 여러차례 겪었을 뿐 아니라 아크레와 예루살렘 왕국을 오랜 기반으로 삼아온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이었다.
이외에 잡다한 용병들과 기타 이탈리아에서 온 병력, 독자적으로 온 순례자들 등 병력이 크게 셋으로 구성된 부대 (즉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그리고 키프로스 왕국 부대) 에 소속되어 싸웠지만 누가 최고 사령관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방어측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수시로 자신들의 전략에 대해서 논의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세운 기본 전략은 압도적인 적의 병력이 기아와 질병에 지쳐서 스스로 포위를 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공격측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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