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크레 함락
1291 년 5월 17일경 아크레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으로 보였다. 많은 성벽과 탑들이 파손되거나 그 기능에 치명상을 입었다. 포위가 시작된 지 43 일 지난 5월 18일 아침, 300 마리의 낙타에 의해 운반되는 북과 나팔 소리를 신호로 맘루크 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슬림 군대는 무너진 바깥 성벽을 지나 2차 성벽의 방어의 핵심인 저주 받은 탑을 공격해왔다. 이 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예루살렘 왕국 수비의 중핵이면서도 서로 반목했던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 서로 달려들어 적들과 싸웠다. 이들의 마지막 전투는 꽤 영웅적이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 후였다. 결국 여기서 구호 기사단장 장 드 빌리에는 심한 부상을 입고 부하들에게 들것에 들려 아크레 항에서 배에 실린다.
(아크레 공방전의 삽화 Chateau de Versailles, reproduced in "Brieve histoire des Ordres Religieux", Editions Fragile Dominique Papety )
성전 기사단장 기욤 드 보죄는 이보다 운이 더 좋지 못했는데 왼팔 겨드랑이에 약점 부위에 창을 맞고 쓰러져 결국 과다 출혈로 숨졌다. 다만 그의 마지막 전투는 중세 기사단장의 최후에 걸맞는 용맹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전반적으로 성전, 구호 두 기사단은 마지막 순간에는 매우 영웅적인 전투를 치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 때만 용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전성기 시절 행한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열세인 병력으로 다수의 무슬림 군을 오랜 세월 막아낸 용맹한 전사라는 건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중세 기사단 하면 누구나 머리에 떠올리는 성전 기사단 (Templar), 구호 기사단 (Hospitaller), 그리고 튜턴 기사단과 소수 기사단 까지 이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뤄내며 적어도 그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일 기회는 또 있었다.
한편 권토 중래를 노리던 젋은 국왕인 키프로스의 앙리 2 세는 동생 아말릭과 병사 3000 명을 데리고 후퇴했다. 사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이 병력을 보전해 갔기에 키프로스 왕국이 계속해서 독립을 유지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왕으로써 이 판단은 적절했다. 이 밖에도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날 아크레 항에는 퇴각하는 배를 잡아 타려고 아우성인 사람들로 아비규환의 상태였는데 다만 모두가 여기로 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가 사실상 함락된 5월 18일 저녁에도 성전, 구호 기사단의 본부는 멀쩡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 기사단 본부들이 요새화 된 탓도 있었지만 기사들의 용전분투 역시 큰 몫을 담당했다. 모두가 배를 탈 수 있든 아니든 간에 항구로 후퇴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용기가 전세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구호 기사단은 먼저 본부를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아크레 포위전의 백미를 장식할 마지막 무대는 바로 도시의 가장 안쪽에 요새화된 성전 기사단 본부였다. 성전 기사단은 여기서 5월 28일까지 버티게 된다. 본래 술탄은 여기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지만 이 사절은 상대를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했는지 (혹은 성내의 여성 혹은 소년을 욕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사단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다. 요새 성벽에는 술탄의 깃발 대신 다시 기사단 깃발이 올라갔고 이를 본 술탄은 노발대발 했다. 이후 이에 대해 다시 기사단 측이 해명과 협상을 위해 대표를 내보내자 이번엔 술탄이 기사단 사절을 처형했다. 이를 본 성전 기사단원은 이제는 죽을 때 까지 싸우는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이들의 최후는 더 극적인 사건 때문에 유명해지게 되는데 바로 5월 28일의 성전 기사단 본부 요새 공방전이다. 이 공방전에서 상당히 손상된 기사단 건물로 수백명의 맘루크 병사가 쏟아져 들어갔다. 건물내에서 난전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 약해진 건물이 굉음을 내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 192 년 (1099 - 1291 년) 의 역사를 마감하듯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그 안에 모든이가 죽고 말았다. 한 왕국의 마지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 아크레 함락 이후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요새 도시인 아크레에서 적의 주력을 완전히 분쇄했지만 아직 십자군 도시들이 완전히 없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성전을 마무리 하고 불신자의 무리 (십자군) 을 완전히 바다 쪽으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아직 몇몇 중요 도시들을 점령해야 했다.
아크레를 제외하면 티레가 가장 강력한 요새 도시로 그때 까지 남아있었는데 아크레 함락 이후 이제 도시의 주민과 통치자 모두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키프로스로 탈출하든가 아니면 항복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시돈, 베이루트 였으며 마지막은 하이파였다.
예외는 앞으로 설명할 루아드 (Ruad) 를 비롯한 몇몇 기사단 요새들이다. 기사단은 이 상황에서도 물론 성지 회복의 꿈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앙리 2세 역시 예루살렘 왕국 왕관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아크레에서 키프로스로 퇴각하면서 마치 타이완으로 떠나면서 중국 본토 회복을 꿈꾼 장제스 총통 처럼 다시 자신의 왕국을 찾을 생각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앙리 2세는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고 그의 왕국은 본래 그가 즉위할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실 엄청나게 다른 경우지만)
이들의 무의미하긴 했지만 처절한 노력은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 (혹은 아크레 왕국) 을 1291 년으로 보는 시각은 타당하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말지만 그래도 그 이후 있었던 성지 수복 노력을 잠시나마 언급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여 다음에는 그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한가지 아크레 포위전 (1291) 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한다면 3차 십자군 당시 있었던 아크레 포위전 (1189 - 1191) 때와의 비교이다. 처절한 정도로는 십자군 전쟁 전체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2년간의 포위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면서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양측에서 끊임없이 신규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측은 유럽에서 계속해서 당도하는 신규 병력으로 인해 2년이나 그 지옥에서 병력을 보충받을 수 있었다. 살라딘도 지하드를 외치며 병력을 충원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영토에서 병력을 근방에 아크레로 보내는 측과 저 멀리 유럽에서 다양한 병력이 아크레로 자발적으로 몰려든 것 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시절 십자군에 참전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기사나 독실한 기독교도의 도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후로 100 년이 흐른 후 마지막 아크레 포위전 당시에는 정 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이번에도 무슬림 측은 지하드를 외쳤고 이 외침은 응답을 받았지만 정작 십자군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냥 그전에 있던 3대 기사단, 키프로스 왕국, 용병, 해양 도시 지원 병력 등이 전부였고 유럽에서의 원군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앞서 설명했듯이 십자군에 대한 열정이 식고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은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미 13 세기 후반에 있던 7/8/9 차 십자군에서 여실하게 드러났고 마지막 아크레 포위전에서도 확실히 증명되었다. 유럽에서 십자군의 열정이 들끌었다손 치더라도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서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물론 희박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기 때문에 패배는 확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쟁을 끝낼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앞서 언급한 앙리 2세와 구호, 성전 기사단이다. 다음에는 이들의 최후의 성전 이야기를 해본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