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3차 홈스 전투
3차 홈스 전투 혹은 와디 알 카잔다르(Battle of Wadi al-Khazandar) 전투는 몽골 군이 매우 치욕스런 패배를 한 2 차 홈스 전투가 발생한 지금의 시리아 홈스 (Homs) 근방에서 벌어졌다. 앞서 언급한데로 일 한국의 가잔 칸은 몽골 군 6 만에 4만의 보조군을 데리고 홈스로 진군했는데 이에 맞서는 맘루크 군은 이보다 다소 적은 병력 (기록에 의하면 6 - 9 만명 수준으로 이정도면 이집트 방면과 시리아 방면군을 모두 합친 것으로 보임) 이었다고 한다. 사실 병력 규모에 있어서는 몽골군 및 맘루크 군 모두 약간의 과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당시 맘루크조의 술탄은 알 나시르 무함마드 (Al - Nasir Muhammad) 였다. 그는 아크레 점령의 장본인인 알 아슈라프 카릴의 암살 직후 권력 투쟁에서 술탄의 자리에 올랐으나 결국 키트부가 (Al Adil Kitbugha) 에 의해 쫓겨난다. 키트부가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몽골 - 투르크 계로 본래 1 차 홈스 전투 당시 사로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권좌에 오른 매우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2 년후에는 그 역시 라진 (Lajin) 에게 축출되었다.
이 혼란상에서 다시 1299 년 권력을 잡은 알 나시르 무함마드는 맘루크 조 내부 상황을 수습함과 동시에 설욕을 위해 시리아로 침공해오는 가잔 칸의 대병력과 마주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튼 홈스로 다가오는 적을 요격하기 위해 술탄은 적어도 2-3 만 정도 되는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고 다마스쿠스에서 나머지 병력을 합친 듯 하다. 여기서 알 나시르 무함마드는 다시 북상하면서 적이 홈스의 북동쪽 6-9 마일 지점에 있는 와디 알 카잔다르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299 년 12월 22일 오전 5시경 이곳에서 (홈스와 가깝기 때문에 3차 홈스 전투라고 부름) 다시 몽골군과 맘루크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맘루크 보병의 돌격과 몽골 기병의 돌격으로 시작되어 점차 백병전 양상의 난투극으로 변했다. 이런 난전에는 기병 전술을 주특기로 하는 몽골군 보다 맘루크 군이 더 유리했다.
정오쯤되자 초반에는 유리하던 맘루크 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 때 맘루크 군의 우익이 적에 의해 관통당했다는 소식이 맘루크 군 진지에 퍼졌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해석이 엇갈리지만 아무튼 이로 인해 맘루크군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리는 양상으로 반전되었다. 그 다음날 맘루크 군은 결국 퇴각했다.
따라서 전투 자체는 1,2 차 홈스 전투와는 달리 몽골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맘루크 군의 주력을 분쇄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사실 맘루크 군은 주력을 보존한 상황이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도 기록이 서로 엇갈리는데 맘루크 군 기록에 의하면 맘루크 군의 손실은 미미한 반면 오히려 몽골군 사상자가 매우 컸다고 주장했고 반면 몽골 측 주장은 그 반대였다.
아무튼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 전투 자체는 일단 몽골군의 승리였으며 주변 지역은 몽골군 점령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맘루크 군도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었으며 나머지 병력을 수습해 다마스쿠스로 후퇴했다. 몽골군의 다마스쿠스 까지 진격했으나 (1300 년) 여기서 차카타이 한국의 공격 사실을 전해들은 카잔 칸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맘루크 조와 몽골 군의 결전은 다시 마지 알 사파 전투 (Battle of Marj al-Saffar ) 이후로 미뤄졌다.
이 전투에서 십자군 잔존 세력은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의 헤툼 2세 (Hethum II) 가 이끄는 병력 중 사실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분견대가 끼어있었다. 비록 1300 년 2월에 가잔 칸이 다시 귀국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그는 다시 1300 년 11월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서방측에 서신을 보내 맘루크조의 협공을 요청했다.
23. 십자군의 역습
한편 3차 홈스 전투의 결과는 서방측에도 알려졌는데 이것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와전되기 시작하여 서유럽에 도착할 무렵에는 몽골군이 성지를 해방하고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바뀐 상태였다. 이는 물론 근거 없는 루머였다. 아무튼 이것은 서방측의 희망만을 반영한 이야기였다.
사실 가잔 칸은 3차 홈스 전투 이전에 사절을 보내 앙리 2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1294 - 1303) 에게 서쪽에서도 협공을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들이 이 요청에 응했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면야 속국의 형태로라도 가잔 칸은 그 지배를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점에서는 아무 병력도 보내지 않았다. 또 이 사건을 전후해서 유럽에서 대규모는 커녕 소규모 십자군도 형성되지 않았다.
사실 앙리 2세야 그렇다 쳐도 로마 교황은 병력 따위를 보낼 형편도 아니었다. 이 일이 있기전 교황이 요청한 십자군은 이교도가 아니라 로마의 유력가문인 콜론나 가문을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전임 교황으로 스스로 사임한 첼레스티노 5세 (Celestine V) 을 다시 교황으로 옹립하려 했기 때문에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298 년에 교황이 결국 그들을 파문하고 군대로 진압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듯 했으나 이후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로 도망쳐 교황과 불편한 관계이던 필리프 4세 품에 안겼다.
프랑스 왕과 교황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필리프 4세의 계획을 교황이 반대하면서 부터였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의 재위 기간 중 프랑스 왕실과 교황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어 마침내 아비뇽 유수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된다. ( 이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 생략한다)
이렇듯 당장에 자신과 교황청의 안위가 더 급한 보니파시오 8 세는 이젠 유럽 군주들에게 별로 먹혀들 가능성이 없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따위를 요청할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앙리 2세는 사실 기회주의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3차 홈스 전투가 승리로 끝난 시점에서는 병력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앙리 2세는 두 기사단의 도움을 받고 맘루크 군의 약점 - 즉 해군이 사실상 없다는 사실 - 을 십분 활용해서 1300 년 7월경 16 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로 로제타, 알렉산드리아, 아크레, 토르토사, 마라클레아 등 해안 도시들을 유린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잔 칸의 사절인 Isol the Pisan 이란 인물도 대동했는데 그는 본래 이탈리아 상인이었다가 칸을 섬기게 된 인물이었다.
아무튼 해안가를 약탈하는 정도로는 성지 회복이 가능할리 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 용기를 얻은 구호 및 성전 기사단과 앙리 2세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이제 튜턴 기사단도 참여했다) 는 본토 상륙 작전을 구상에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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