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르군 칸
일 한국이 3대 칸이자 이슬람 교도로 술탄 아흐메드로 불린 테쿠데르 (Ahmed Tekuder) 는 본래 훌라구의 아들이며 아바카 칸의 형제였다. 장자 상속제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던 (본래 몽골족은 막내가 상속하는 풍습이 있었다) 몽골 제국의 특징상 2대 아바카가 죽은 후 제위는 테구데르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 자가 있었으니 선대 칸인 아바카 칸의 아들인 아르군 (Arghun) 이었다.
당시 몽골족들은 종교가 매우 다양했는데 테쿠데르는 더 복잡했다. 그는 태어날 무렵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 세례를 받아 니콜라스 테쿠데르 칸 (Nicholas Tekuder Khan)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곧 무슬림으로 개종해 이름을 아흐메드 테쿠데르로 변경했다. 그런데 훗날 이슬람화 하기는 했어도 당시 몽골인이나 몽골 귀족들 사이에서 이슬람 교는 별 인기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카 아르군이 반기를 들었고 결국 테쿠데르는 재위 2년만에 자리에서 쫓겨나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르군 칸 (재위 1284 - 1291 년) 역시 본래는 기독교도였으나 후에 아버지처럼 불교도로 개종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꽤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종교에 매우 관대했다. 이슬람 교에 대해서는 이슬람 율법으로 통치하는 종교적 유연성을 보였던 것이다. )
(아르군 칸의 14세기 기록화. 말에 탄 이는 아바카 칸이고 앞에 서 있는 자가 아르군. 그리고 아르군이 들고 있는 아이가 가잔 (Ghazan) 칸이다. 가잔 칸이 나중에 이슬람 교로 개종하여 이란인과의 융합을 꾀한 인물이다. Rachid al-Din, Djami al-Tawarikh, 14th century. Reproduction in "Ghengis Khan et l'Empire Mongol", Jean-Paul Roux )
아르군은 할아버지인 훌라구와 아버지 아바카가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루고 싶었다. 즉 맘루크조를 정복해서 지금의 이란 - 이라크 지역을 장악한 자신의 제국을 이집트까지 확장하기 희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아인 잘루트 전투와 2차 홈즈 전투에서 맘루크 조는 수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승리를 거두어 일한국의 팽창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아르군은 대규모 병력으로 맘루크조를 동서로 포위해서 이번에는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이는 다시 말해 서방측에 새로운 십자군을 이번에는 몽골측에서 요청했다는 이야기다.
8. 연합을 위한 노력
1285 년, 아르군 칸은 다시 교황 호노리오 4세 (Honorius IV) 에게 친서를 보내 자신의 가족이 (그리고 사실 그 역시 이전에 기독교도이긴 했음) 기독교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우리들 (즉 서방과 몽골) 사이에 존재하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향해 함께 손을 잡고 싸우자' 라고 요청했다. 물론 그 댓가로 서방측은 다시 예루살렘 왕국을 복원하고 몽골 제국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점령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당시 호노리오 4세는 성지가 이교도 손에 있는 것 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번번히 앙주의 샤를 (샤를 1세) 에 반기를 든 시칠리아가 아라곤 왕가를 끌어들여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남 이탈리아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던 것이다. 성지 회복 문제는 당시 교황에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곤 할 수 없었다. 교황에게 중요한 문제는 앞마당인 이탈리아 정세가 뜻대로 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래 시칠리아는 호엔 슈타우펜가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던 와중 호엔 슈타우펜조가 혼란에 빠지자 교황의 요청을 받고 온 샤를 1세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칠리아의 주민들은 샤를 1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기회만 되면 반란을 일으켜 정세가 불안했다. 아무튼 이렇게 반란의 조짐이 있다보니 샤를 1세 역시 강압적인 수단으로 시칠리아를 통치했는데 그 결과로 역사상 유명한 시칠라아 만종 (Sicilian Vespers) 사건이 발생했다. (1282 년)
이 사건은 팔레르모에서 부활절 축제 때 이를 감시하던 프랑스인들이 시칠리아인을 폭행하고 여인들을 겁탈한 사건에서 촉발되었다. 결국 시칠리아 인들은 저녁 기도 종소리 (만종) 을 신호로 프랑스인들의 압제에 맞서 궐기한다. 이 반란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퍼진 것은 시칠리아인들이 아리곤 왕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하면서 부터이다. 그 결과 이 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20 년간 지속되었다.
아르군 칸이 서신을 보낸 1285 년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후 프랑스 군이 대대적인 아라곤 침공을 계획했다가 실패한 시기였다. 당시 교황들은 주로 친 프랑스파였는데 전쟁 양상은 아라곤 왕가에 유리한 형편이었다. 결국 시칠리아는 페드로 3세의 아들 하이메 2세 (James II of Aragon) 에게 넘어간다.
유럽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르군 칸의 원대한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적었다. 심지어 시칠리아 만종 전쟁 때문에 선대 교황 마르티노 4세 (Martinus IV 재위 1281 - 1285 년) 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대 아라곤 왕국 십자군 결성을 요청하는 등 당시의 유럽은 평상시와 같이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파문하고 전쟁을 벌이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까지 벌일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아르군 칸은 계속 사절들을 보냈다. 이번에 간 이는 라반 바르 사우마 (Rabban Bar Sauma) 였는데 그는 본래 베이징에서 칸을 섬기기 위해 와서 1280 년대 후반에 새교황 니콜라오 4세 (Nicholas IV : 재위 1288 - 1292)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Phillip IV),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Edward I) 등을 접견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군사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에 라반 바르 사우마의 이동 경로. 이것은 몽골 제국의 성립으로 인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의 교류가 크게 증진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전 같으면 이런 인적 이동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클릭하면 원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HGCOM )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아르군 칸이 필리프 4세에게 보낸 친서. 1289 년에 보낸 것이다. Arghun Letter To Philippe Le Bel, in Mongolian language and script, Extract, 1289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ArghunLetterToPhilippeLeBelExtract1289.jpg )
그런데 1289 년 아르군 칸이 제노바인 부스카렐 (Buscarel of Gisolfe) 을 유럽으로 파견할 때 좀 더 구체적인 협상안이 나왔다. 즉 1290 - 1291 년 사이에 (정확히는 1291 년) 유럽에서 새로운 십자군을 마련하고 몽골 제국은 육로와 해상을 통해 맘루크조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 댓가로 예루살렘이 다시 서방측에 돌아갈 것이었다.
만약 이 노력이 성공했다면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의 협공 작전이라는 유래없는 과업이 이루어질 뻔해지만 맘루크조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하지만 왜 운이 좋았는지는 앞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넘어간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내용은 이와 같이 몽골의 칸이나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서간의 교류가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이 시기에 마르코 폴로 처럼 베이징에서 활약한 베네치아 인이나 혹은 부스카렐 처럼 페르시아에서 활약하는 제노바인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유럽인의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와 문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신항로 발견 시대 이후 유럽의 팽창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니콜라오 4세 시절 이와 같은 교류를 통해 선교사들이 에티오피아, 몽골, 타타르, 중국까지 포교활동을 하게되었다.
비록 추가적인 십자군을 위한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지만 사실 그래서 아무런 역사적 성과가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유라시아 저편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훗날 아랍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도와 중국에 도달할 길을 찾아나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을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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