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지렁이 (lugworm, Arenicola marina)는 낚시용 미끼로 사용되는 것 이외에는 사람과 큰 관련이 없는 환형동물입니다. 그런데 갯지렁이의 혈액(혹은 체액)이 의료적 목적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물론 갯지렁이에게는 희소식이 아니지만, 환자들에게는 희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갯지렁이가 의학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비결은 그 체액에 있는 헤모글로빈의 특수성에 있습니다. 이 헤모글로빈은 인간의 것과 유사하지만, 산소를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은 최대 40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단순한 환형동물에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는 이유는 물밖에서 오래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기술이라고 합니다.
갯지렁이는 복잡한 폐나 순환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산소 운반 능력이 매우 큰 헤모글로빈을 진화시켜 이를 통해 물 속은 물론 물 밖 환경에서도 살아남도록 적응한 것입니다. 최근에 이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이 헤모글로빈이 산소가 많이 필요한 이식 장기를 보호하거나 혹은 패혈증 (septic shock) 처럼 산소 요구량이 갑자기 증가하는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임상에 응용하는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갯지렁이의 세포가 사람에 들가면 면역 반응을 유발해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헤모글로빈을 추출할 경우 동물 실험에서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갯지렁이가 너무 작아서 충분한 헤모글로빈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최근에서야 Aquastream을 비롯한 몇몇 기업에서 갯지렁이를 대량으로 사육해서 치료목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수준의 갯지렁이 헤모글로빈 제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연간 130만 마리의 갯지렁이에서 추출한 헤모글로빈을 이용해서 약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이용한 임상시험은 201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신장 이식시 장기 보존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1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앞으로 60명을 대상으로 더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성공한다면 이식 장기를 더 오래 안전하고 이식할 수 있는 상태로 보존하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갯지렁이에게는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이것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만한 도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참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