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스웨덴과의 전쟁 (1570 년 이후 )
새로 즉위한 스웨덴 국왕 요한 3 세는 그래도 스웨덴이 많이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북유럽 7 년 전쟁을 종료시키므로써 집권 초기에 큰 부담을 덜어버릴 수 있었다. 최소한 모두가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통치지의 입장에서는 종종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내부 불만 세력을 잠재울 수도 있고 전쟁을 통해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혹은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전쟁이 장기화 된다면 결국 오랜 전쟁 수행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 - 재산과 인명 모두 - 은 시간에 비례해 커지는 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대개는 더 커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7 년 전쟁을 마무리한 스웨덴은 1570 년의 상태에서 전쟁을 지속하거나 혹은 새로운 전쟁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희망은 이반 뇌제의 정상을 벗어난 집착 앞에서 무너졌다. 이반 뇌제는 계속해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폴란드 점령하의 리가 (Riga) 방면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한때 동맹을 맺을 뻔 했던 스웨덴을 새로운 목표로 지정했다. 차르는 은근히 스웨덴을 만만히 여겼으므로 폴란드 보다 더 쉬운 상대로 오판했었던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스웨덴과 폴란드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외교적 실책이었으나 이미 차르 주변에는 항상 'yes' 만을 말하는 신하들 외에는 모두 숙청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차르가 그렇게 하기로 정하자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 경우만 그렇진 않겠지만 이 이야기는 왜 리더가 항상 '맞는 말인데 싫은 소리' 를 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귀담아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아첨꾼이나 예스맨들이 주변에 넘치는 리더라면 리더로써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당시 이반 4 세가 그랬다.
아무튼 이렇게 되서 1570 년 갑자기 스웨덴과 러시아는 리보니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초반 전세는 러시아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스웨덴은 지루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던 반면 이반 뇌제는 더 이상 실패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러시아가 폴란드 (루블린 연합) 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두고 있고 오스만 제국 및 타타르와의 전쟁을 얼마 전에 겪은 상태에서 새롭게 스웨덴을 적으로 돌리는 바보 짓을 할 것이라곤 생각하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1570 년대의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이것 말고도 한가지 기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덴마크의 홀슈타인 공작 마그누스 (Magnus, Duke of Holstein, 크리스티안 3세의 아들이자 당시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2 세의 동생) 가 차르의 신하가 된 상태에서 스스로를 리보니아 왕국 (Kingdom of Livonia) 의 국왕으로 선포하고 이 전쟁에 러시아측 사령관으로 끼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덴마크가 러시아 편이 된 건 아니었다) 이에 의하면 새로 만들어질 리보니아 왕국은 러시아의 속국이자 일종의 괴뢰왕국이 될 것이었다. 미래의 수도까지 정해놓은 상태에서 2 만의 러시아 병력을 이끈 홀슈타인 공작은 에스토니아 북부 해안 도시인 레발 (Reval) 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리보니아 전쟁 당시의 구 리보니아 영토 지도. 리보니아 전쟁 당시 지도이다. Map of Old Livonia: Part of the Theatrum Orbis Terrarum by Abraham Ortelius, published in Antwerp between 1573 and 1598 (the information in the map is older). 22 x 24 cm, scale varies. public domain )
1570 년에서 1571 년 사이 에스토니아 (당시의 리보니아 북부) 는 러시아군의 물결에 휩쓸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레발 (Reval) 은 홀슈타인 공작과 러시아군의 포위에도 꿋꿋이 버텨냈다. 비록 러시아군은 주변의 작은 마을과 영토를 점령했지만 그 댓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댓가란 앞서 언급했듯이 리보니아에서 본래 싸우지 않았어도 될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느라 타타르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연합군이 모스크바 까지 유린하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사실 차르는 1570 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평화 협상을 맺기는 했지만 모든 평화 협상이나 불가침 조약 혹은 기타 다른 비슷한 약속이 결국 이를 지킬 힘없이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건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당시 러시아가 심각한 내우외환 상태에 빠져서 남쪽 국경선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오스만 투르크와 타타르 족이 협상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누가봐도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지금와서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겠지만 1560 년 말부터 이반 뇌제는 과거 같은 영민한 젊은이가 아니라 모두가 잠재적 배신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필요한 명확한 상황인식과 적절한 판단력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제 분명히 리보니아 전쟁은 승리시 예상되는 이익보다 투입한 노력이 훨씬 컸졌다. 이 작은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는 남부와 중심부는 거의 초토화 되다 시피 했고 러시아 경제는 고사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승리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쯤에서라도 그만 둬야 하는데 이반 뇌제는 포기를 모르는 집착을 보였다. 이 전쟁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걸었기 때문에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못해서 였을까 아니면 그냥 후세에 생각하듯이 광기 때문이었을까 ? 지금의 우리로썬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1572 년 몰로디 전투 (Battle of Molodi) 에서 간신히 국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난 후 다음해인 1573 년 이반 뇌제는 지치지도 않고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즉 구 리보니아 연방 북부) 를 행해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무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러시아 군은 현재의 에스토니아 공화국 중부에 위치한 파이데 (Paide) 에 해당하는 베이센슈타인 (Weissenstein - 여기에는 리보니아 기사단의 성채가 있었다) 를 점령했다.
이 성채를 점령한 후 당시 러시아군은 스웨덴 군의 지휘관급을 산채로 구워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이는 이미 이반 뇌제 치하의 러시아에서는 일상 (?) 이 된 일일 수는 있지만 스웨덴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천인 공노할 만행이었다. 요한 3 세는 1573 년 11월 베센베르크 (Wesenberg) 를 향해 군대를 출발시켰는데 클라스 아케손 토트 (Klas Akesson Tott) 가 최고 사령관, 폰투스 데 라 가르디에 (Pontus de la Gardie) 가 야전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스웨덴 군은 물론 스코틀랜드, 독일 용병들까지 포함된 병력이 러시아 군과 싸웠다. 다만 이로 인해 스웨덴 정부 재정은 큰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스웨덴 군이 러시아군이 점령한 베센베르크에 당도한 1574 년 1월은 사실 싸우기에는 매우 좋지 않은 추운 날씨였다. 여기에 거듭된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국적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의 문제점 까지 나타났다. 즉 독일 용병과 스코틀랜드 용병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결국 서로 무력 충돌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이자 스웨덴 군의 첫번째 반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북방의 군사 강국 스웨덴 답지 않은 이 추태에 분노한 요한 3 세는 사령관을 즉시 해임하고 폰투스 데 라 가르디에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외국 용병에 대한 의존도도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러시아군은 당분간 스웨덴의 공격에서 안전해 질 수 있었다. 이 시점에도 여전히 마그누스 공작은 레발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일은 지지부진했고 그의 형인 덴마크 왕으로부터의 지원도 (아마도 이것이 공작에게 리보니아 국왕이라는 타이틀을 준 이유였을 것이다) 없었다.
비록 레발을 점령하는데는 실패했고 덴마크의 참전도 없었지만 이후 러시아의 공세는 한동안 성공적 이었다. 1576 년 3 만병의 병력을 파견한 이반 뇌제는 리보니아 전쟁 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잠재적 동맹이 될지도 몰랐던 덴마크 점령 지역까지 유린했다. 그리고 필요 없어진 홀슈타인 공작은 이제 이반 뇌제의 눈밖에 났다. 1576 년에서 1577 년은 확보한 영토로만 본다면 러시아가 적어도 북부와 중부 리보니아에서 승리를 거둔 것 처럼 보였다.
(1570 년에서 1577 년 사이 리보니아 전쟁
Map showing areas of Russian and [Polish-]Lithuanian forces, 1570-1577.
- occupied by Russian forces in 1570
- occupied by Russian forces 1572–1577
- occupied by Lithuanian forces
하지만 이반 뇌제는 장기적인 전략에서 완전한 실패를 거두었다. 이 일이 결국 서로 적국이었던 스웨덴과 폴란드가 힘을 합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스웨덴의 요한 3 세와 폴란드 - 리투아니아 (루블린 연합) 의 새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는 힘을 합쳐 이반 뇌제의 야망을 저지함과 동시에 리보니아 전쟁을 그들의 승리로 이끌 스웨덴 - 폴란드 동맹군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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