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이반 뇌제가 한창 러시아를 피로 물들이고 있던 1560 년에서 1570 년대 초에 러시아는 사방에 많은 적들을 만들어 외교적으로는 거의 고립된 상태였다. 사실 그 이유를 전적으로 리보니아 전쟁에서 보여준 이반 뇌제의 미숙한 외교 정책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반 3 세 시대 부터 이반 뇌제의 시대에 이르기 까지 러시아는 급격히 팽장하며 영토가 몇배로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변 세력과 충돌하거나 최소한 주변 세력에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보니아 연방을 비롯해 주변의 작은 약소국들은 언제 러시아에 합병 당할 지 몰라 전전 긍긍했고 강대국들은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했다.
따라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크림 한국 (Crimean Khanate) 라고 부른 크림 반도 주변의 타타르 족들을 지원한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점차 팽창함에 따라 결국 러시아의 남방 국경이 점점 오스만 투르크 제국 근처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아스트라한 한국이 1556 년 이반 뇌제에 의해 정복되고 돈강 및 볼가강 유역에 새로운 요새들이 건설되자 러시아의 흑해 진출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보기만 어려워졌다. 만약 크림 한국이 점령되면 그 다음엔 바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국경을 맞닿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러시아를 두려워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볼가강 하류에 있던 아스트라한 한국의 영토
(15 세기에서 17 세기 사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
당시 상황을 말해 본다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반 뇌제와 동시대 인물인데 한 세대 위인 술레이만 1 세 (Suleiman I 재위 1520 - 1566. 술레이만 대제) 는 급격한 영토 팽창을 통해 오스만 트루크 제국을 과거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 때 보다 더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대제의 시대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다만 그 시점에는 급속한 영토 평창으로 유럽 열강들의 견제를 받는 중이었다.
15 - 16 세기에 부상한 이 두 제국 -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 은 앞으로 처절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 시작은 바로 술레이만 1 세의 아들 셀림 2 세 (Selim II 재위 1566 - 1574 ) 와 이반 4 세의 시절이었다. 셀림 2 세 시대의 사실상의 권력 실세이던 메흐메드 소콜루 (Mehmed Sokollu, Grand Visier) 는 당시 러시아의 힘을 다소 과소 평가했는지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소콜루의 계획은 볼가강과 돈강 하류를 점령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이 두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해서 지중해/흑해와 카스피해를 연결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야심찬 마스터 플랜이었다. 당시 지중해의 패자였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해군력에도 나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함대를 강을 통해 이동시키면 광대한 러시아 남부 점령도 어렵지 않다고 보고 아예 공사계획까지 세워서 출정했다. 아무래도 급격한 팽창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 역시 적을 과소평가하고 러시아를 만만한 정복 상대로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1569 년 호기롭게 선제 공격을 감행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총 병력은 2만에 불과했으나 5 만에 달하는 크림 한국의 타타르 족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성공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러시아 역시 리보니아 전쟁과 내부적인 문제 (주로는 이반 뇌제의 오프리치니나) 때문에 사정이 어려웠으므로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투르크 군을 지휘하는 것은 카심 파사 (Kasim Paşa ) 였고 타타르쪽은 당시 칸이었던 데블렛 1 세 기라이 (Devlet I Giray 재위 1551 - 1571) 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가 돈강 하류의 아조프 (Azov) 를 공격하는 동안 이들이 지휘하는 지상군은 아스트라한 한국의 영토에 도달하고 성을 포위한 후 운하 건설을 위한 삽질도 같이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냥 삽질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스트라한의 군사 지휘관이었던 세레비아노프 공 (Knyaz Serebianov) 이 바로 반격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레비아노프 공이 이끄는 러시아 병력은 3 만 정도로 침공군에 비해 적은 편이었으나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오스만 - 타타르 연합군이 적을 과소평가했던 점 덕에 더 쉽게 반격을 이룰 수 있었다. 결국 일꾼과 병력의 거의 70% 를 소실한 오스만 투르크 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다가 운나쁘게도 오스만 함대 역시 폭풍을 만나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므로 1569 년의 러시아 침공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처참한 패배로 결론이 났다.
그 다음해인 1570 년에는 내부 숙청 작업에 여념이 없던 이반 뇌제 측에서 화평을 제안했으므로 일단 이스탄불의 셀림 2 세는 여기에 동의했다. 아이러니 하지만 적과 내통한 반역자를 처단한다면서 러시아를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물들이던 차르 본인이 적과 화평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반 뇌제는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30. 불타는 모스크바
오프리치니나의 광기가 극에 달하고 앞서 설명한 노브고르드 학살이 이뤄진 1570 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최악의 순간이었다. 그 해 초부터 차르는 수십에서 수백명의 반역자를 처단하는 대신 그냥 도시 자체를 통째로 접수해 주민 상당수를 학살했다. 노브고르드 다음에는 프스코프 (Pskov) 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고 이는 모스크바까지 이어졌다. 그해에는 차르뿐 아니라 자연도 러시아를 응징해서 기근과 가뭄, 그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해서 러시아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571 년이 되자 다시 이스탄불은 과거의 치욕을 갚을 좋은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이반 뇌제와 대립했던 셀림 2 세. 여러가지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의 재위 시대에 오스만 투르크는 선대 술레이만 대제 시절 같은 팽창은 할 수 없었다. 러시아 침공은 성패를 떠나서 영토 확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Public domain )
한번 쓴맛을 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이번에는 꽤 많은 준비를 했다. 일단 지상군의 수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렸고 현지 사정에 익숙한 크림 한국의 칸 데블렛 1 세에게 지휘를 맡겼다. 데블렛 1세는 주변의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타타르 병력을 모아 (여기에는 저 멀리 대 노가이 부족 (Great Nogay Horde) 등 크림 반도에서 떨어진 타타르 부족도 있었다) 무려 8 만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했므으로 이것만으로도 이전 침공 때의 병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33000 명의 투르크 병력과 7000 명의 예니체리 (janissary) 가 오스만 투르크 측 제공 병력으로 투입되었다. 따라서 총 병력만 12 만에 달했으므로 당시에는 상당한 규모의 대병력이었다.
(15 세기 예니체리의 삽화 A Janissary drawing from Gentile Bellini 1479–81. public domain )
사실 당시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양면 전쟁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병력을 이쪽으로 할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해 (1571년) 에는 역사상 유명한 레판토 해전 (Battle of Lepanto) 이 있었다. 신성 동맹과의 전쟁 중인 가운데 아무리 이 전쟁이 해군 위주의 전쟁이라곤 해도 모든 병력을 러시아 방면에 투입할 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니체리 7000 명을 포함한 4 만 명의 병력을 타타르 측에 추가로 보내 준 점은 오스만 투르크가 러시아 전역을 간단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전의 학습 효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오스만 투르크와 타타르의 침공에 대비해서 러시아는 무슨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 ? 결론 부터 말하면 차르는 여기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1570 년에도 타타르의 침공은 한차례 있었고 사실 사소한 타타르 침공은 자주 있었기 때문인지 이반 뇌제는 방심하고 있었다. 더구나 상당수 러시아 군이 리보니아 전쟁에 투입되었다.
1571 년 4월 5일 대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국경을 침범한 데블렛 1 세는 의외일 정도로 미미한 러시아의 저항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모인 타타르 병력이 집결하는 동안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러시아 남부 스텝 지대로 진격하는 동안 이반 뇌제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이 투항하기 까지 했다. 곧 오스만 - 타타르 연합군은 러시아 군의 주력이 리보니아 전쟁에 투입되었고 모스크바와 주변 지역은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으며 차르는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연합군은 투항한 러시아인을 길잡이로 삼아 거침없이 모스크바로 북상했다.
오카 강에 있는 세르푸코프 (Serpukhov) 요새를 지나친 타타르 군은 숫적으로 열세인 러시아 병력을 포위 분쇄하고 역시 미미한 저항만을 받으며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매우 뒤늦게 깨달은 이반 뇌제는 가지고 갈수 있는 모든 재물을 챙겨서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로 퇴각했으니 운나쁜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제 타타르족의 탐욕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그렇다 쳐도 여러 타타르 부족들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분명 한 몫 챙겨보려는 의도가 강했다. 따라서 1571 년 5월 24일 타타르 족이 모스크바에 당도하자 약탈할 수 있는 것 - 사람을 포함해서 - 은 다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우는 전형적인 약탈 전쟁을 수행했다. 당시 모스크바는 거의 전소되다 시피 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는 노예로 잡혀갔다. 1571 년 전쟁에서 노예로 잡혀간 사람의 수는 대략 10 만에서 15 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나 타타르 족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였으므로 모스크바와 주변 지역을 초토화 시킨 데블렛 1 세는 5월 26일 총 퇴각을 명했다. 사실 잘못 시간을 끌다가는 리보니아 전역에서 돌아온 러시아 주력군을 만나 러시아 영토 한가운데서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판단이 그다지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해의 큰 성공은 타타르 족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해인 1572 년에 데블렛 기라이는 더 큰 계획을 세웠는데 아예 러시아 남부나 러시아 전체를 장악해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과욕은 화를 부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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