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스테판 바토리의 등장
1577 년 이후 본래 7 년 전만 해도 전쟁을 벌이던 스웨덴과 루블린 연합이 동맹을 맺게 된 것은 양국의 지도층이 교체된 것과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였던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 는 1572 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후 몇가지 해프닝과 복잡한 과정을 통해 루블린 연합의 새로운 군주가 된 것은 스테판 바토리 (Stefan Batory) 였다.
그는 1533 년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인 트랜실바니아 (Transylvania) 의 솜요 (Somlyo) 에서 태어나 선거를 통해 트랜실바이나 공 (Prince of Transylvania, 1571 년 이후) 된 귀족으로 다서 선거를 통해 1576 년 폴란드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 (King of Poland and Grand Duke of Lithuania ) 이 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암투와 경쟁자의 사망 같은 행운들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스테판 바토리의 삽화 pencil drawing by Jan Matejko, (1838-1893), a prominent Polish painter)
가장 성공적인 선거왕으로 뽑히는 스테판 바토리는 1576 년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의 권력 기반이 탄탄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즉위와 함께 그를 괴롭혔는데 그 중에서도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루블린 연합에게도 적지 않은 희생을 강요하는 리보니아 전쟁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특히 1576 년에는 러시아군이 스웨덴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해 모처럼 발트해 주변 지역까지 진출했으므로 더 이상 폴란드/리투아니아 로써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스웨덴의 요한 3 세 역시 최근의 리보니아 전쟁에서 잇따른 패배와 실책으로 이를 만회할 방법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이 두 군주는 선대 국왕들 (에릭 14 세와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시절 반목했던 과거사는 잊어 버리고 새로운 동반 관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동맹을 결성한 것은 1577 년 12월 이었다.
1576 년 즉위 이후 스테판 바토리는 때로는 무력에 의지하면서도 그의 특기인 여우같은 외교술을 활용해서 능숙하게 상대를 구워삶었다. 일단 즉위 후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2 세를 지지하며 스테판 바토리를 거부한 단치히 (Danzig, 그단스크) 와의 전쟁에서 단치히를 무력으로 제압하면서도 단치히의 권위와 특권을 인정해서 이후 국왕에게 충성하도록 유도했다. 다행히 황제 막시밀리안 2 세가 승하하면서 스테판 바토리의 자리는 안전해졌다.
이후 스테판 바토리는 막시밀리안 2 세의 후계자인 황제 루돌프 2 세와 동맹을 맺는 한편 오스만 투르크와도 1577 년 11월 5일 평화 조약을 맺어 한동안 분쟁을 종식시켰다. 더구나 스웨덴과도 동맹을 맺었으므로 1577 년 말에는 이제 스테판 바토리와 루블린 동맹의 적은 러시아의 이반 뇌제 뿐이었다. 이런 국왕의 능숙한 외교술 덕분에 사방에 강대국으로 포위 당한 (동쪽의 러시아, 남쪽의 오스만 투르크, 북쪽의 스웨덴, 서쪽의 합스부르크 ) 루블린 동맹은 상대해야 할 적이 하나로 압축되게 되었고 든든한 동맹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외교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또 그것을 강제할 무력이 없는 평화 조약이나 불가침 조약은 사실상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테판 바토리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가 동유럽의 강국으로써 타국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만 그 시작은 다소 험난했다. 세임 (의회) 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임은 전쟁에 필요한 예산 승인을 번번히 거절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 최고 실력자인 얀 자모이스키 (Jan Zamoyski) 재상의 협력을 받은 스테판 바토리는 왕실 재정을 확충하는 한편 유력 귀족들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이고 군제 개혁을 단행해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35. 벤덴 전투 (Battle of Wenden)
1577 년 말에 러시아 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한 리투아니아 군은 이미 11 월에 뒤나부르크 (Dünaburg/Daugavpils) 를 점령했다. 이후 스웨덴 - 폴란드 동맹군이 결성되자 동맹군은 북상하면서 벤덴 (Wenden) 을 비롯한 러시아 점령지를 하나씩 빼앗았다. 1578 년 2월에 러시아군의 반격은 소득없이 끝났다. 점차로 러시아군이 연합군에 밀리는 양상이 되자 이반 4 세는 새로운 병력을 리보니아에 파병했다. 이미 연합군은 리보니아 중부로 진출해서 러시아가 점령한 리보니아 영토의 심장부로 들어갈 상황이었다.
18000 명의 신규 병력이 러시아로 부터 당도하자 러시아군은 1578 년 오베르팔렌 (Oberphalen) 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리보니아에 있는 러시아군은 다음 목표로 벤덴 (Wenden, 현재의 라트비아의 Cēsis) 을 겨냥했다. 리보니아의 중앙부에 있는 벤덴은 역사상 여러차례 격전이 벌어졌던 군사적 요충지로 여기를 경유해야 러시아군이 연합군을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선 방향으로 밀어 부칠 수 있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여기는 리보니아 기사단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었고 리보니아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만큼 군사적은 물론 상징적인 중요성도 대단히 큰 지역이었다.
이런 연유로 벤덴의 성채는 이미 1577 년 부터 빼앗기고 뺏기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1577 년 여름, 마그누스 (홀슈타인 공작, 리보니아 국왕) 가 이끄는 러시아 병력은 이 성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는 이반 뇌제의 큰 승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다음해 초 이 성채는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다시 벤덴을 점령하고자 하는 러시아 군과 이를 지키려는 스웨덴 - 폴란드 연합군의 격전은 1578 년 10월 21일 부터 시작되었다. 벤덴 전투 (Battle of Wenden) 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리보니아 지도. Wenden/Cesis 는 리보니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여기서 러시아 점령지와 주요 도시로 접근이 가능한 만큼 양측에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현재 남아있는 벤덴/ 현 체시스 (Cesis) 의 성채
이전투에서 연합군은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용병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러시아군은 러시아 각지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이뤄졌는데 연합군의 병력이 5500 - 6000 명 정도인데 반해 러시아군은 18000 - 22000 명에 달했다. 따라서 러시아 군이 병력면에서 적어도 3 배는 더 유리했으나 전황은 오히려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최초에 러시아군이 먼저 당도해서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중 연합군이 당도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나선 러시아 기병대는 막대한 손실만 입고 패주했다. 이후 공성전을 벌이던 보병들은 뒤에서 공격을 받고 후퇴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놀랍게도 연합군이 상당한 숫적 열세였지만 미미한 손실을 입은 반면 러시아군의 손실은 아주 심각했다. 연합군의 인적 손실은 400 명 가량이었지만 러시아군은 6280 명이 사망하고 3000 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으며 20 문 이상의 대포를 잃었다.
이 충격적인 패배 이후 러시아군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연합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즉 벤덴 전투는 리보니아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 (turning point) 였다. 이 전투 이후 괴뢰 왕국이었던 리보니아 왕국은 사실상 사라졌고 국왕이던 홀슈타인 공 역시 몰락했다. 적은 수의 연합군에 다수의 러시아군이 형편없이 패배하므로써 연합군의 사기는 오르고 러시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연합군의 우세는 계속 지속되었다.
한편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통해 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스테판 바토리는 이 전쟁을 종식시킬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중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리보니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전쟁 의지 자체를 꺾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러시아인들의 전쟁의지는 별로 없었지만 포기를 모르는 이반 뇌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반 뇌제가 백기를 들게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러시아 영토로의 침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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