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몰로디 전투 (Battle of Molodi)
1571 년 모스크바 약탈 이후 크림 한국의 칸 데블렛 1세 기라이 (Devlet I Giray) 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러시아는 매우 약화되었으며 끝날 줄을 모르는 리보니아 전쟁은 이제는 러시아의 발목을 잡고 계속해서 이반 뇌제를 괴롭혔다. 대담해진 칸은 조공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스트라한 한국과 카잔 한국까지 원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반 뇌제가 상황이 다급하다고 해도 카잔 한국까지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1572 년 봄이 되자 다시 칸은 러시아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본래 타타르의 러시아 침공은 말에게 먹일 풀이 충분해지고 러시아의 혹한이 물러가는 봄에서 초여름 사이 이뤄졌다. 이 해에는 여름에 출정했다. 1572 년 7월 26 일 전해와 같이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데블렛 기라이는 자신있게 오카 강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대포는 물론 예니체리까지 포함된 12 만의 대병력이었다. 전해에 재미를 본 여러 타타르 부족들이 끼어들었으므로 병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타타르의 대규모 침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카강의 방어는 이전보다 더 튼튼해졌으며 세르푸코프의 요새 역시 더 보강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6-7 만 정도 되는 러시아 군이 타타르군을 공격할 적절한 시점을 노리며 숨어 있었다.
(오카 강은 볼가강의 가장 큰 지류 중 하나로 모스크바 남쪽을 흐르고 있다. 세르푸코프는 모스크바 남쪽 99km 정도에 위치하며 몰로디는 모스크바 남쪽 40 마일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매일 같이 적과 내통한 배신자를 찾는다면서 광분했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지만 정작 적의 대군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 군을 지휘한 것은 차르 이반 뇌제가 아니었다. 총 지휘를 담당한 것은 미하일 보로틴스키 공 (Prince Mikhail Vorotynsky) 이었으며 좌익은 레프닌 공 (Prince Repnin), 우익은 오도에프스키 공 (Prince Odoevsky) 이 담당했다. 양군이 실제로 조우한 것은 오카강의 다른 지류인 로파스냐 강 (Lopasnya River) 이였다. 전투가 벌어진 몰로디는 모스크바 남쪽으로 약 40 마일 정도였다.
1572 년 7월 30일에서 8월 3일까지 벌어진 이 역사적인 전투는 결과에 따라서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결국 러시아가 승리하므로써 러시아와 동유럽사는 우리가 아는 형태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근접전투를 통해 타타르의 장기인 원거리 궁술을 무력화 시켰다. 전투는 대부분 칼과 창으로 하는 백병전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러시아군의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등장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이전에도 한차례 설명한 바 있는 이동 요새 굴라이 고로트 (Gulyay - gorod) 였다. (굴라이 코로트에 대해선 이전 카잔 전투 참조 http://blog.naver.com/jjy0501/100176805893 ) 크보로스티닌 공 (Prince Khvorostinin) 이 이끄는 부대는 굴라이 고로트를 이용해서 적을 밀어붙였고 러시아의 대포들 역시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데블렛 기라이 본인도 간신히 살아서 나갈 수 있었는데 크림 반도까지 무사히 돌아간 타타르 기병은 2 만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타타르 족이 괴멸될 만큼의 피해는 아니라고 해도 아무튼 대패는 대패였다. 그리고 러시아가 타타르의 위협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아무튼 1570 년대 초반 러시아는 차르 이반 뇌제의 폭정과 거듭된 외적의 침공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만약 차르가 자신들의 신하와 백성들을 숙청하고 학살하는 대신 내부적으로 힘을 모았다면, 그리고 모두가 반대했던 리보니아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거나 혹은 최소한 빨리 손을 떼었더라면 이 모든 참사는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러시아는 거의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다시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했다. 이반 뇌제 이후의 동란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가장 가깝게는 2차 대전 때의 독소전과 소련 붕괴이후 최악의 경제난도 그랬다. 이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에만 가능했다.
32. 리보니아 전쟁 (1564 년 - 1570 년 )
1560 년대에서 1570 년 초반까지 러시아 내부 상황 (오프리치니나) 및 크림 한국 - 오스만 투르크 제국 과의 전쟁에 대해서 설명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을 거슬러서 올라가 리보니아 전쟁의 진행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차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563 년에는 북유럽 7 년 전쟁이 시작되어 스웨덴과 주변국이 전쟁을 벌였다. 이것은 이반 뇌제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으나 외교적으로 스웨덴과 유기적으로 연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폴란드 - 리투아니아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 하므로써 리보니아 전쟁에 대한 러시아내 반대 여론은 더 거세졌다.
이를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생각한 이반 뇌제는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이제는 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리보니아 전역에 계속해서 러시아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므로써 위에서 설명한 타타르의 침공을 허용하는 과오를 범했다. 1564 년 울라 전투 (Battle of Ula http://blog.naver.com/jjy0501/100184009098 참조) 의 패배 이후 더 이상의 병력 투입을 중단하고 남쪽 국경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갔다면 러시아는 재앙 같은 1571 년의 타타르 침공을 허용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 이반 뇌제의 눈에는 리보니아 전쟁과 차르의 뜻에 반대하는 무리는 모두 잠재적 반역자에 배신자로 보였다. 울라 전투 패배와 리보니아 전역의 어려움이 러시아 중심부에서 원거리 전쟁을 수행해야 하고 훨씬 근대화된 서방 군대와의 싸움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역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반 뇌제는 무고한 이들까지 광범위하게 숙청하므로써 정작 러시아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반 뇌제의 숙청으로 러시아 군 지휘부에는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마치 2 차 대전 직전 이뤄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독일 침공 초기에 소련군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힘들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이때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기 쿠릅스키 공의 경우처럼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지만 차르의 무차별적인 숙청이 두려워 적국으로 피신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이들은 본래 자신의 조국인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이것은 러시아의 힘을 두배로 약화시켰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은 계속 저하되었으나 리보니아 전쟁에 대한 차르의 집착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리보니아 점령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었음에도 차르가 고집을 꺽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지금와서 '내가 잘못했다'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차르 역시 전쟁 이외에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 전쟁을 끝내려는 시도는 했었다. 즉 1566 년에는 끝날 줄을 모르는 전쟁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라도 발트해로의 창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는 리가를 비롯한 해안 지역을 내놓으면 쿠를란드 및 남부 리보니아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리보니아 전쟁에서 폴란드가 참전한 근본 목적은 영토에 대한 욕심보다는 러시아가 발트해에 발을 내밀지 못하게 하는데 있었으므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러시아가 리보니아 중앙부를 차지하고 해안 지역은 폴란드가 장악하는게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을 허용하는 것보다 유익했다. 결국 협상은 곧 결렬되었다.
그 다음해인 1567 년에도 챠스니키 (Czasniki (Chashniki) )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패배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여전히 리보니아 중앙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쪽은 스웨덴이, 해안지역은 폴란드가, 그리고 남쪽은 폴란드에 투항한 전 리보니아 기사단장 케틀러의 쿠를란드와 세미갈리아 공작 (Duchy of Courland and Semigallia) 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루한 대치는 1570 년 초까지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의 적들에게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일단 1569 년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가 리투아니아에 관한 자신의 세습권을 폴란드 왕에게 양도하고 양국의 의회를 설득 헌법적으로 양국의 공동 의회를 만들어 루블린 연합 (Union of Lublin) 이 탄생했다. 이 루블린 연합은 공동의 의회와 군주를 가졌으나 행정, 군사, 사법은 분리되어 1 국가 2 체제 형식의 연방 국가였다. 일종의 동군 연합 ( 同君聯合 : 같은 군주를 모시는 2 개 이상의 국가 연합) 이지만 이전의 폴란드 - 리투아니아 보다는 더 통일 국가에 근접한 형태였다. 다만 형식적으로 폴란드 - 리투아니아의 대등한 국가 합병처럼 보여도 폴란드 주도의 국가 연합이었다. 이 루블린 연합은 동시대에는 꽤 진보된 입헌 군주제 국가였다.
한편 러시아와 미지근한 동맹 관계였던 스웨덴에서는 에릭 14 세가 1568 년 반정으로 폐위되고 그 동생인 요한 3 세 (John III of Sweden) 가 새 국왕으로 재위에 올랐다. 리보니아 진출에 관심이 있었지만 북유럽 7 년 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와 다툼 없이 지냈던 에릭 14와는 달리 요한 3 세는 곧 러시아와의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참고로 북유럽 7 년 전쟁은 1570 년 종료되었고 참전국들은 스테틴 조약 (Treaty of Stettin) 을 통해 이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면 덴마크, 폴란드, 한자 동맹의 뤼베크 등이 스웨덴의 팽창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웨덴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었다. 즉 신생 국가 스웨덴이 이들 국가와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같이 스웨덴이 획득한 영토도 그대로 보전했기 때문에 스웨덴은 발트해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지루한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스웨덴은 리보니아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찾으려는 이반 뇌제에 의해 원치 않은 전쟁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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