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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도모르 (Holodomor) 를 아십니까?




 홀로도모르 (Holodomor) - 이 단어는 대체 무엇일까? 그 뜻은 기아로 인한 죽음 (Death by Starvation, 우크라이나 어로 : Голодомор) 이란 뜻이다. 홀로코스트는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홀로도모르는 처음 듣는 분도 많이 있으실 것이다. 이야기는 스탈린 치하의 가장 암울한 시기 중 하나인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홀로도모르의 유명한 사진 중 하나)



 앞서 포스트에서 설명하였듯이 스탈린은 급진적 공업화와 집단 농장화를 통해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공산화 시키고 서방 국가들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집단 농장화는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물론 스탈린과 NKVD (엔카베데), OGPU (오게페우) 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강제적 집단 농장화를 서둘렀다.


 이들이 이렇게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집단 농장화를 서두른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첫째로는 식량 징발을 용이하게 하므로써 식량 수출을 통해 산업화에 필요한 설비와 자본재를 서방으로부터 구입할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단위 기계화 농업을 통해 잉여인력을 도시로 끌어들여 노농자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과거 러시아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하나인 흑해 연안 지대에는 흑토라고 불리우는 비옥한 토양 지대가 있어 과거 러시아 전체 식량 공급의 25%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공산당의 집중적인 식량 징발 지역이었다.


 그러나 농민들 또한 고분고분 협조하지는 않았다. 이미 많은 부농 (쿨라크)들이 엔카베데에 의해 잡혀서 수용소로 직행한 상태였지만 굴락(강제 노동 수용소) 으로 잡혀갈 위협에도 농민들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토지를 그냥 뺏길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반 쿨라크 캠페인 중 하나)



 결국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의 농업 사보타주가 발생한다. 이를 테면 어차피 징발 대상이 될 식량을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든지 그냥 두면 징발 당할 가축들을 도살한다든지 하는 일등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의 소의 45%, 양과 염소의 3분의 2가 가 도축된다. 여기에 잡혀간 부농들이 두고간 가축들도 방치되었는데 특히 농사에 필요한 말등의 가축이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가축들이 심하게 감소하게 되자 결국 1932년에는 식량공급이 많이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1932년의 작황이 좋지 않자 식량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은 기후와 농업 사보타주등이 겹친 결과였다. 그리고 이중에서 식량 감소가 매우 심각한 지역은 바로 우크라이나 지역이었다.


 (본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로 오랜 시간 존재하긴했어도 인종 구성에 있어 슬라브계라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며, 본래 소비에트에서도 러시아 공화국의 일부는 아니었다. 지금도 사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데, 특히 이들의 사이가 틀어지게 만든 사건이 바로 이 홀로도모르였다.)



 당시 식량 징발이 집중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공산당의 결정에 가장 심하게 반발했다. 사실 스탈린은 이미 적백내전에서도 보여준 바 (이전 포스트 참조) 강제적 식량징발의 달인이었다. 스탈린과 그 측근 몰로토프는 식량 징발대를 조직하여 사실상 강제적으로 식량을 강탈하기 시작한다. 기근에도 불구하고 도시지역에서 필요한 식량과 수출용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소련 외상이 되는 몰로토프)


 한편 식량을 숨기거나 훔치는 자에 대해서도 강력한 응징이 가해졌다. 1932년 8월 7일에는 스탈린의 포고령에 의해 농민들은 한 줌의 식량을 훔쳐도 사형이나 최하 10년의 징역에 처해졌다. 11월에는 식량 징발에 방해하는 농민에 대해서 생사를 책임질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포고령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흉작과 기근의 징후가 공산당 수뇌부에게도 전달되었다. 사실 32년 8월 흑해 연안에서 휴가를 즐기던 스탈린에게도 식량 징발을 줄여야만 한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비록 식량 징발량이 약간 줄기는 했으나 스탈린은 더 이상의 양보를 거부했다. 신속한 공업화를 위해서는 수출용 식량의 확보가 필요했다.



 결국 1933년 봄이 되자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농업지대가 참혹한 기근에 노출되게된다. 많은 이들이 이 당시 기아로 숨진 농민들의 숫자를 추산한 결과 대략 600만 에서 800만명에 이른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중 200만에서 350만의 사망자가 나온 곳이 바로 곡창 지대라는 우크라이나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가 3000만명이었다. 이른바 인위적인 기근에 의한 학살 - 홀로도모르 (Holodomor) - 였다.



 (당시의 인구 감소를 표시한 지도 - 주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25 %이상의 인구 감소가 있었다)




 (당시 홀로도모르의 희생자들)



 (홀로도모르 희생자 사진들)



 (당시 기근으로 굶주린 아이들)




 (기아로 숨진 희생자를 처리하는 공산당원)


 1933년 봄. 재앙적인 기근이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농업지대를 강타했다. 뒤늦게 스탈린도 식량 징발을 유보하고 쌓아둔 식량을 다시 공급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죽은 상태였다. 여기에 소련의 비효율적 관료기구와 당시의 낙후된 운송수단등으로 인해 식량을 징발할 때 처럼 신속하게 지원되지 못하여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많은 우크라이나 인들이 이때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우크라이나 땅을 등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농지를 버리고 이들이 모두 도주할 경우 식량 공급의 심대한 차질이 예상되므로 공산당은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다른 말로 하면 군대를 보내 총으로 위협하고 철조망등 바리케이트를 쳐서 탈출을 막았다.


 일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당시 정치 포스트 중에는 '자신의 아이를 먹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다' 라는 포스트 가 붙기도 했다. 아마 공산당은 정작 이들이 왜 인육을 먹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부족한 듯 했다.


 아무튼 이러한 대참사가 외부 에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공산당은 이 일대의 지역에 여행 금지령을 내리고, 더불어 보도를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백주 대낮에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데 아무도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이 지역을 방문했던 극소수의 서방 언론인들은 홀로도모르의 실체를 알아냈으며, 일부 망명 인사들을 통해 서도 진실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도 홀로도모르는 어느 정도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소비에트에 기근이 덮쳤다는 내용의 기사들 - 기사 본문에 보면 가축이 다 죽었고, 특히 수확에 필요한 말이 없어 수확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곡식이 여물었는데도 말이 없어 수확하지 못하는 상태가 당시 실제로 발생했다)



 홀로도모르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이 사건을 결코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인들은 매년 11월 4번째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기념일로 정해서 국가적으로 추도하고 있다.






 (홀로도모르 기념비)



 (홀로도모르 항의 집회)



 (홀로도모르 희생자를 기리는 촛불 행사)




 현재에 이르러 아무리 광신적인 공산당 지지자 들이라고 홀로도모르를 직접 부정하는 사람들은 보기 힘들다. 다만 홀로도모르를 이야기 할 때 논쟁이 되는 것은 '학살'의 성격이다. 홀로도모르는 분명 흉작이 아니라 스탈린과 공산당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가장 주된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경우 이를 '인종 말살 (Genocide)' 로 규정 비난하고 있다.










(홀로도모르 관련 포스중 하나 - Genocide 를 강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인들과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를 Genocide 로 규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입장은 다르다. 물론 러시아가 홀로도모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 같은 의도된 인종 청소 (Genocide)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 학자들 중에도 의도적 인종 청소로 보는 경향은 적은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사죄라는 표현에 러시아 또한 황당하기 이를데 없을 수도 있다. 사실 스탈린은 러시인도 아니고 (그루지아 인이다), 스탈린 시절 희생된 사람의 숫자만 따지면 사실 러시아인이 가장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소련 인구 중 러시아인 비중이 높기 때문에)


 사실 1933년의 기근 당시 우크라인이 많이 죽기는 했어도 소비에트 전체로 보면 약 1/2에서 1/3 정도로 생각된다. 따라서 알고보면 자신들도 피해자인데 사죄를 하라니 러시아 입장에선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홀로도모르를 Genocide 로 규정하는데 있어 러시아가 강력 반발하고 있어, 이를 유엔에 Genocide 로 규정할 것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사실 러시아가 아니라 이 인간이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직접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 인들에겐 죄송하지만 이는 러시아가 사죄할 일이 아닌것 같다. 이는 전대 미문의 독재자 스탈린이 없었다면 결코 생길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33년 처럼 많은 인간이 기아로 사망한 사건은 러시아 역사상 단 한번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러시아 역시 스탈린으로 인한 피해자 였다. 왜냐면 앞으로 대숙청 기간 동안 엄청난 수의 러시아 인이 죽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포스트는 다시 스탈린 이야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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