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루이 7세
앞서 2차 십자군 원정이 한축인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 이제 2차 십자군의 다른 한축을 담당한 군주인 루이 7세 (Louis VII 1120 - 1180) 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가 2차 십자군에 참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루이 7세이기 때문이다.
루이 7세는 '비만왕' 루이 6세 (Louis the Fat) 의 차남으로 1120년 태어났다. 사실 프랑스의 왕위는 루이가 아니라 장남인 필립 왕자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를테면 형 필립은 세자이고 루이는 대군인 셈이었다. 루이 7세는 이렇게 차남으로 왕실에서 2군 대접을 받은 덕에 별명은 소(小) 루이 (Louis the younger 프랑스어 Louis le Jeune) 이다.
이런 차남으로써의 위치로 왕권을 넘보지 않을 생각으로 루이 7세는 어린 시절 부터 종교의 길을 택했다. 당시 성직자는 최고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왕자들이 하기에도 괜찮은 길이었다. 그러나 루이 7세는 생계형 성직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독실한 신자였다. 아마 이후의 행동을 보더라도 루이 7세는 종교적인 길로 나가기로 일찍부터 마음을 먹은 듯 했다.
그러나 1131년 뜻하지 않게 형이 사망하자 루이 7세는 갑자기 프랑스의 왕세자가 되었다. 이후 1137년 부왕 루이 6세가 승하하자 루이 7세는 17세의 나이로 새로운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성직자들을 접견하는 루이 7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Alexius Manfelt )
선왕 루이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비만왕 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활동적인 전쟁을 통해 미약했던 카페 왕조의 힘을 키웠다. 그러나 아들인 루이 7세에게 불운한 일은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의 서부 지역까지 풀크 5세의 야망이 서서히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거대한 앙제인 플랜테저넷 제국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풀크 5세와 그 아들인 조프루아 5세는 결혼 정책을 통해 영토를 점차 키워나갔는데 조프루아 5세의 아들인 앙리(헨리 2세) 에 이르러 마침내 상위 군주인 프랑스 국왕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항상 화제가 되는 인물이 바로 한 때 프랑스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Eleanor of Aquitaine 1120 - 1204) 이다.
엘레오노르는 아마도 1122년 생으로 루이 7와는 거의 비슷한 또래였으며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에서 설명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손녀이자 기욤 10세의 딸이다. 그녀는 기욤 10세의 후계자로써 부유한 아키텐의 영지를 가지고 1137년 막 즉위한 루이 7세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영토가 꽤 되기 때문에 사실 이 둘 사이의 결혼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면 카페 왕조의 힘은 더 커지고 반대로 카페 왕가의 라이벌인 앙주 가문 (즉 풀크 5세와 조프루아 5세) 의 힘은 약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일은 반대였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한창일 17세에 결혼했음에도 루이 7세가 아내가 아닌 종교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자유 분방한 엘레오노르는 '나는 프랑스 국왕과 결혼하려 했지 수도승과 결혼하려 했던 게 아니다" 라며 크게 화를 냈고 따라서 이들의 부부 생활을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 비록 당시의 시대상이 여성의 지위가 낮기는 했어도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이라는 든든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나왔던 것 같다.
(좌측의 그림은 루이 7세와 결혼하는 엘레오노르 이고 우측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루이 7세이다. 그런데 좌측에서 누가 루이 7세 ? (왕관 쓴 사람은 너무 늙어 보이는데..)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훗날 엘레오노르는 결국 성격 차이가 너무 나는 루이 7세와 이혼하고 (1152년) 조프루아 5세의 아들 앙리 (헨리 2세) 와 결혼하여 헨리 2세가 프랑스 서부에 거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 함께 즉위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으니 그녀는 프랑스 왕비와 잉글랜드 왕비의 두 타이틀을 거머쥔 보기 드문 경우가 되었다.
하지만 헨리 2세와 엘레노오르 이야기는 2차 십자군의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야기가 다소 옆으로 새긴 했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루이 7세는 부유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한 이후 선왕 루이 6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들을 제압하는데 매진하고 있었다.
2차 십자군 직전 아직 20대 초반인 루이 7세는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2세 (Theobald II, Count of Champagne) 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1142 - 1144년) 이 전쟁에서 루이 7세는 샹파뉴를 거의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비트리 (Vitry) 라는 마을을 공격할 때 약 천명이 넘는 사람이 성당으로 피신했다가 성당이 불타는 바람에 모두 불타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를 테면 오인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 발생인 셈이었다.
그냥도 문제가 될 상황이긴 하지만 루이 7세가 종교적인 신념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를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루이 7세는 이 사고로 인해 몹씨 괴로워했으며 병력을 샹퍄뉴로 부터 철수시키기 까지 했다.
1145년 이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던 루이 7세는 이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새로운 십자군 원정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멜리장드 왕비가 보낸 사절인 위그 드 자발라 (Hugh of Jabala) 가 에데사 함락과 이로인해 발생한 십자군 국가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서유럽에 당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대규모 십자군의 논의가 유럽에 퍼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루이 7세는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참전을 결정한 듯 하다. 1145년 크리스마스에 루이 7세는 자신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임을 선포했다. 사실 상퍄뉴 백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프랑스 서쪽에는 잠재적으로 카페왕조에 큰 위협이 될 앙주 가문의 조프루아 5세가 마틸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를 장악하려 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시점에서 많은 병력을 이끌고 멀리 떨어진 우트르메르로 원정을 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앞서 십자군 전쟁의 원인에서 사실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어느 한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설명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인 요인은 십자군 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임은 분명했다. 이 전쟁에서 종교는 명분으로 내세워질 때도 많았지만 실제 전쟁에 뛰어든 사람 가운데는 종교적 동기가 목적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 대표로써 루이 7세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잉글랜드는 앞서 설명했듯이 마틸다와 블루아의 스테판 사이의 내전에 빠져 있어 거의 무정부 상태였으므로 십자군 원정에 적극 참여하진 못했다.
3. 2차 십자군 원정군의 모집
앞서 2차 십자군의 주요 인물들인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 그리고 에우제니오 3세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제부터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이야기다. 에데사 함락 후 예루살렘 왕국이 이를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멜리장드 왕비는 시리아의 주교인 위그 드 자발라를 파견해서 십자군 국가들의 어려운 상황을 서유럽에 전달하고 대규모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설득했다.
일단 위그 드 자발라는 교황을 면담했다. 사실 교황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군 원정을 선언한다면 실추된 교황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었다.
물론 교황은 동시에 남쪽의 로게르 2세가 무척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도 같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 시점에서 로게르 2세의 적대 세력으로 그로부터 교황을 지켜 줄 수 있는 유력 군주인 독일의 콘라트 3세가 가능하면 유럽에 병력을 남겨두고 남부 이탈리아를 견제할 수 있다면 더욱 좋았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십자군 원정에 대규모 병력이 참여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교황의 권위가 살아날 테지만 모든 병력이 성지로 가게 되면 로게르 2세에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참고로 루이 7세는 독실한 신자이긴 해도 즉위 초 부터 교황청과 대립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우선 대규모 십자군이 조직 되고 난 이후에나 할 걱정이었다. 이에 교황은 1145년 12월 1일 2차 십자군 모집을 호소하는 교황의 칙령인 Quantum praedecessores 을 발표한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반응은 시큰 둥 했다. 1차 십자군 때처럼 열정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은 새로운 선동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 그 일을 해낼 적임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시토회 수도승이 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 of Clairvaux) 였다. 베르나르도는 후세에도 추앙 받는 카톨릭의 성인으로 당시 교황 에우제니오 3세 역시 그 지지자 중 하나였다. 주변의 존경은 물론 탁월한 언변과 설득력으로 십자군 모집같은 중대한 과업을 담당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임자가 없는 듯 했다.
(성 베르나르도의 모자이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카톨릭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 성인이고, 축일은 8월 20일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러나 교황은 미처 몰랐지만 칙령을 발표하기도 전에 사실 루이 7세 역시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던 것 같다. 다만 발표는 다소 늦어 12월 말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최초의 칙령이후 잠시 잠잠했던 2차 십자군의 열기는 루이 7세의 참전 선언으로 본격화 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 왕의 신하들은 수년씩이나 해외 원정을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따라서 루이 7세는 전쟁을 선동할 목적으로 역시 성 베르나르도를 초청했다. 공교롭게도 성 베르나르도 역시 그 목적을 가지고 국왕을 알현했다. (그리고 아마도 소식이 느리게 전달되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루이 7세가 교황이 칙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안 것도 이 때 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뒤늦게 나마 프랑스 국왕의 계획을 알게된 교황은 열정적으로 이를 응원했다.
이듭해인 1146년에는 성 베르나르도가 십자군 모집을 위해서 프랑스는 물론 독일에서 대대적인 활약을 했다. 우선 프랑스의 베즐레 (Vezaley) 에서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물론 프랑스의 주요 영주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성 베르나르도는 십자군을 호소했다.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십자군에 참가하겠다는 뜻으로 순례자의 십자가를 받았다.
한편 독일에서는 보다 어려운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콘라트 3세는 사실 서유럽의 세속 군주의 대표로써 십자군 원정을 지원해야만 할 어느 정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1차 십자군 때의 하인리히 4세가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일부 지원 병력 정도만 나중에 보냈듯이 꼭 직접 참전하란 법은 없었다. 사실 누군가 꼭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원하는 가신을 대신 보내도 될 것이다. (사실 황제의 명을 받고 간건 아니었지만 고드프루아 드 부용 역시 황제의 신하였다)
사실은 시칠리아 왕국의 로게르 2세를 생각할 때 교황이 바란 것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엉뚱하게도 콘라트 3세가 잠재적 적대 세력인 벨프 가의 하인리히 사자공을 뒤에 두고 직접 원정을 떠나는 식으로 진행된다.
콘라트 3세는 조카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더불어 스피어 에서 순례자의 십자가를 받고 (1147년) 이 원정에 직접 친히 참가할 것을 공언했다. 콘라트 3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일설에 의하면 베르나르도의 열정적인 연설에 감명을 받았다고도 한다. 아무튼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가 참전을 선언함에 따라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2차 십자군은 최대 규모의 십자군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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