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십자군 전쟁 이후 지금의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중해 동안 지역의 주도권은 점차 무슬림 세력으로 넘어가게 된다. 1149년 2차 십자군 종료 이후 1187년 3차 십자군에 이르는 시기는 비록 간단히 그렇게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무슬림 세력측이 공세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무슬림의 반격이란 소주제로 글을 써나갈 예정이다. 과거 십자군 전쟁사 기술은 당연히 십자군 중심으로 이루어 졌지만 이 연재에서는 무슬림의 주요 군주인 누레딘과 살라딘에 기술을 보다 중점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1. 이나브 전투 (Battle of Inab 1149년 6월 29일 )
2차 십자군 이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세는 누레딘 (Nur ad-Din 여기서는 편의상 서구식 명칭인 누레딘으로 통일한다)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누엘 1세는 동쪽에서는 롬 술탄국에 대립하면서 서쪽으로는 남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마누엘 1세가 우트르메르의 대규모 병력을 보내 정세에 적극 관여할 가능성은 0% 에 가까웠다.
한편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의 재앙적인 2차 십자군 원정이후 남은 십자군 왕국은 이제 성인이 되어 어머니의 섭정을 완전히 벗어나려 하지만 재능은 선대의 보두앵 1/2 세에 미치지 못하는 보두앵 3세와 역시 정치적 재능은 차치하고서라도 군사적 재능은 별로인 대비 멜리장드의 손에 맞겨졌다. 이는 앞으로 십자군 국가들의 미래를 고려해 볼 때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사실 그나마 예루살렘 왕국 본국은 왕국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정도는 그래도 덜했다. 그러나 에데사 백작령의 경우 수도인 에데사가 이미 누레딘의 손에 넘어갔고 나머지 영토는 투베르베실을 중심으로 한 분단된 지역 뿐이었으므로 이 상태로는 곧 나머지 영토도 누레딘에 손에 넘어가게 되리라는 점을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한편 누레딘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제 비잔티움 제국과 누레딘의 영토사이에 본격적으로 끼게 된 안티오크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티오크의 공작인 푸아티에의 레몽은 선대의 보에몽 1세나 탕크레드 처럼 이미 많은 적을 만들었으나 그들과는 달리 군사적 재능은 별로라는 아주 치명적인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레몽이 루이 7세를 설득해서 에데사나 알레포를 공격하게 만드는데 실패한 것은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레몽의 몰락은 모두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다. 심지어 한때 그의 라이벌이자 이제는 영지를 상당 부분 상실한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 보다도 훨씬 빨랐다. 사실 레몽의 몰락은 그가 조슬랭 2세와 협력해서 누레딘의 침공을 막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데 몰두하면서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 결과 에데사는 누레딘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 안티오크 공국은 누레딘의 세력과 더 넓은 범위에서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화살 한발 쏘지 않고도 2차 십자군의 침공을 막아낸 - 물론 누레딘이 막아냈다기 보다는 그냥 스스로 자폭한 셈이지만 - 누레딘은 이제 그 병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다시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십자군의 지리 멸렬한 실패로 십자군이 큰 정신 충격에 빠지고 분열된 이 때는 누가 봐도 좋은 기회였다.
누레딘이 처음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레몽에게는 불운하게도 반쯤 몰락해가던 조슬랭 2세가 아니라 안티오크 공국이었다. 이 시기 십자군 지도자들은 과거 1차 십자군 당시의 무슬림 지도자들 처럼 서로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 보두앵 2세의 사후에 이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심지어 조슬랭 2세는 1146년에 레몽이 에데사에 원군을 보네주지 않은데 앙심을 품고 누레딘과 동맹을 맺어 레몽에 대항했으니 안티오크 공국이나 에데사 백국이나 서로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던 레몽으로써는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레몽은 우선 예루살렘 왕국의 멜리장드와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서로 전혀 협조가 되지 않는데서 이미 십자군 국가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 되고 있었다.
결국 레몽은 정말 미심쩍은 동맹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영어권에서 암살자를 뜻하는 어세신 (Assassin) 이라는 단어로 훗날 알려지게 되는 아사신파 (Hashshashin = Hashishin, Hashashiyyin, or Hashasheen 솔직히 하시신, 하쉬시, 아사신, 하사신등 한글로도 참 여러 가지 음으로 변역되는 것 같다 ) 였다.
이 킬러 집단은 전투력 보다는 사실 테러 및 자살 공격에 더 능한 집단이었는데, 누레딘과는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십자군과 함께 싸우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아사신파의 리더는 알리 이븐 와파 (Ali ibn Wafa) 였다.
(12세기경 십자군 국가의 지도.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당시 레몽이 가진 병력은 형편 없었다. 기사 400 명과 보병 100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게도 레몽은 이 병력을 이끌고 안티오크의 성벽을 지킨 것이 아니라 친히 병력을 이끌고 나갔다. 한편 암살단으로 이름이 더 높았던 아사신파가 이끌고 온 병력 역시 얼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친히 누레딘의 대군을 요격하러 나오자 오히려 긴장한 것은 누레딘 쪽이었다. 십자군의 병력이 이것 밖에 안될리가 없다고 확신한 누레딘은 이것이 자신을 낚기 위한 십자군의 유인 전술이며 주력 병력은 어딘가 매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레딘은 신중하게도 레몽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국경지대에 있는 요새인 아나브 (Inab) 를 포위하는 척하다 퇴각했다. 그러자 레몽은 또다시 한심하게도 공성전을 준비하는 데신 탁 트인 지형에서 캠프를 치고 야영했다.
한편 퇴각한 누레딘은 정찰병을 내보내 수색한 결과 적의 다른 병력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십자군이 부주의하게도 탁트인 지형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순간 부터 누레딘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는 즉시 밤중에 병력을 이동시켜 압도적인 병력으로 십자군을 포위했다.
다음날 안티오크 군을 포위한 무슬림의 대군은 그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1149년 6월 29일) 결과는 물론 안티오크 군의 대패였다. 이 전투의 결과는 과거 안티오크군의 대규모 패배였던 사르마다 혹은 바랏 전투 (Ager Sanguinis 라고 부르는) 전투 이후 가장 큰 패배였다. (사르마다 전투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jjy0501/100095157496 를 참조 )
레몽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누레딘은 십자군과는 타협하지 않는 군주로 유명했다. 그가 원하는 일은 이전의 무슬림 군주들 처럼 십자군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고 몸값을 두둑히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십자군 자체를 공격해서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레몽과 그의 수하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기를 기대하고 항복할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레몽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물론 당시의 세간의 평가는 모두 대개 무능한 군주라는 것이지만 아무튼 이 전투에서는 마지막 용맹을 불태웠다고 한다. 후세의 기록에 따르면 레몽은 탈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부하들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다가오는 모든 적을 베어 쓰려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뒤늦은 용맹이었던 셈이다. 결국 레몽과 알리 이븐 와파는 전사했다. 레몽은 당시 누레딘의 측근이자 살라딘의 숙부인 시르쿠에 의해 목이 베어진 다음 은상자에 목을 넣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이나브 전투의 기록화(위)와 레몽의 시체를 수습하는 안티오크군(아래)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저자 Jean Colombe and Sebastien Momerot)
이나브 전투 이후 누레딘은 그 여세를 몰아 안티오크를 공격했다. 그러나 안티오크의 주교와 이제는 성인이 된 레몽의 미망인인 콩스탄스와 그 신하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해서 결국 누레딘은 더 큰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이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나브 전투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누레딘이었다. 이를 통해 누레딘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지하드 (성전) 의 선봉장으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긴 셈이었다. 십자군 국가에 대해 펼쳐지는 누레딘의 영토 팽창은 지하드의 이름앞에 모든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는 곧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누레딘 스스로가 십자군들을 증오하고 더 나아가 십자군 국가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도 했지만 말이다.
2. 아인타브 전투 (Battle of Aintab 1150 년 8월)
한편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 조슬랭 2세 역시 그 최후가 가까워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안티오크 군을 크게 격파한 상황에서 조슬랭 2세와 동맹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며 누레딘 자신이 지하드의 선봉장이자 무슬림의 영웅으로 승격되는 마당에서 조슬랭 2세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를 테면 토사구팽 이라는 격언이 적절한 상황이었다.
조슬랭 2세는 1150년 재수없게도 산적 떼에게 붙잡힌 다음 그 몸값을 지불한 누레딘에게 붙잡힌다. 조슬랭 2세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후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고 알레포의 성채에 9년간 죄수 상태로 잡혀있다가 사망했다.
아마도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조슬랭 2세와 푸아티에의 레몽이 생전에 서로 잘 협력했다면 이와 같은 비참한 최후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생각과 어리석은 대립 속에서 결국 누레딘에 의해 하나하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후세에도 좋은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다.
한편 투베르베실에서 여전히 누레딘의 공격을 방어하던 조슬랭 2세의 가신들과 에데사 백국의 남은 백성들은 그들이 결국 언젠가는 누레딘의 공격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특단의 대책은 뜻하지 않게도 비잔티움 제국에서 나왔다. 그것은 제국이 에데사 백국의 남은 영토를 구매하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여기 있다가는 생명이 위험할 처지인 에데사 백국의 유민들은 결국 돈을 받을 수 있을 때 차라리 영토를 팔아버리고 남은 유민들은 안티오크와 예루살렘 왕국으로 이민가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십자군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현명한 결정이었다. 곧 함락당할 영토를 포기해야 할 판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돈까지 줬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역시 누레딘은 이런 프랑크인들의 성공을 보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즉시 누레딘은 라틴계 이민자들을 추적할 군대를 소집했다.
한편 이번에는 십자군 국가들도 힘을 합친 상태였다. 국왕 보두앵 3세와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 그리고 보두앵 3세의 가신인 토론의 험프리 2세 (Humphrey II of Toron) 와 안티오크 군은 민간인을 구출해내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당시에는 보기 힘든 대규모 민간인 구출 작전인 셈이다.
보두앵 3세는 선두에서 민간인 행렬을 보호하고 안티오크 군이 좌우 측면을 맡았으며 레몽 2세와 험프리 2세가 후위를 담당했다. 그들은 아인타브 근방에서 누레딘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누레딘의 투르크 군은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해서 공격했는데 그것은 기동력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것이다. 투르크 군은 이 전술로 행렬의 포메이션을 무너뜨려 민간인 행렬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번 만큼은 서로 잘 협력하는 십자군의 승리였다. 결국 민간인들은 큰 피해 없이 안티오크 공국 방면으로 모두 탈출했다.
하지만 이는 십자군의 사소한 승리였을 뿐이다. 결국 1년 내로 비잔티움 제국에 팔았던 에데사 백국의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누레딘의 손에 넘어갔다. 따라서 이 아인타브 전투는 십자군의 전술적 승리이자 전략적 패배였다. 궁극적으로 1150년대에는 누레딘의 우세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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