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보에몽 2세와 앨리스
앞서 보두앵 2세의 딸들은 어찌되었던 결혼은 잘 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녀들의 사회적 지위와 남편들의 지위를 보면 사실 매우 적절한 결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들의 결혼 생활은 편치 못했다. 특히 보두앵 2세가 살아있을 때 둘째 사위인 보에몽 2세와 차녀 앨리스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은 늙은 왕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보에몽 2세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보에몽 1세와 프랑스의 콩스탄스 공주 사이의 아들로 1108년 태어났고 1126년 18세의 나이로 성년이 되어 자신의 영토인 안티오크를 되찾기 위해 우르트메르에 나타났다. 당시 보두앵 2세는 혼자 힘으로 지나치게 넓은 영역을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젊은이가 시칠리아에서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것을 대단히 환영했다.
(보에몽 2세의 주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보두앵 2세는 보에몽 2세와의 상호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그가 안티오크의 영지를 되찾은 즉시 그의 둘째딸 앨리스를 그와 결혼시켰다. (1126년) 사실 십자군 국가 전체로 보았을 때 북쪽의 안티오크 공작령과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 본국과의 동맹 및 집단 안보체제 구축은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결혼은 국가적으로 축복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보에몽 2세에게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일면이 있었다. 그도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처럼 영토에 대한 탐욕이 남달랐던 것이다. 아마 그에게도 노르만 정복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보에몽 2세는 안티오크를 접수한 다음해인 1127년 부터 다시 주변 지역에 대한 팽창 정책을 재개했다.
1127년에 보에몽 2세는 카파르타브 (Kafartab) 를 점령하고 주민을 모두 학살했다. 그리고 사이자르 (Shaizar) 를 공격했다. 이와같은 공세적인 영토 확장의 욕구는 결국 화를 불렀다. 다시 이듭해인 1128년에는 마침내 인근의 십자군 동맹국인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오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레포를 공격하려고 했었다. 사실 그렇다면 일단 둘이 협력해서 알레포를 공략했어야 했다. 그러나 보에몽 2세는 아버지와 그의 사촌형 탕크레드가 그러했듯이 조슬랭 1세에 대해서 적대적인 정책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조슬랭 1세와 맞서 싸울 준비까지도 되어 있었다. 1128년에 있었던 알레포 공격은 전혀 협동 작전 없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결국 알레포를 함락시키지도 못했다.
대신 에데사 백작령과 안티오크 공작령 사이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보에몽 2세는 이전 섭정이었던 살레르노의 로게르가 과거 조슬랭 1세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한 것은 부당하다며 항의했고 조슬랭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다시한번 주변 무슬림 세력과 동맹을 맺어 안티오크 공작령을 견제하기 시작하니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와 백성들은 한마디로 황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동쪽의 모술에선 새로운 무슬림의 지도자인 장기 (Imad ad-Din Atabeg Zengi al-Malik al-Mansur 1085 - 1146) 가 세력을 확장하여 1127년에는 모술, 1128년에는 알레포의 아타베그로 등극했다. 결국 보에몽 2세와 조슬랭 1세가 싸움을 벌일 때 장기는 안전하게 알레포를 자기 수중에 넣으므로써 향후 십자군 국가들의 강력한 위협이 된다.
아무튼 적들에 둘러싸인 상태로 이러한 분열상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던 국왕 보두앵 2세는 이들 사이의 분쟁을 안정시키고 다시 공통의 적인 무슬림 국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다마스쿠스가 목표였다. 1126년에 있었던 보두앵 2세의 다마스쿠스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1129년에 있었던 두번째 공격역시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보에몽 2세는 이와 같은 공통의 적과 싸우기 보다는 과거 아버지가 점유했던 실리시아 아르메니아 를 다시끔 점령하려고 했다. 사실 실리시아가 보에몽 1세의 통치아래 있었던 것은 매우 잠시였고 앞서 설명했듯이 1104년의 하란 전투 패배 이후 실리시아의 아르메니아 인들은 보에몽 1세의 폭압에 항거하여 자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르메니아 인들이 다시 자신들을 정복하러 온 보에몽 2세를 환영할리 만무했다. 1130년 2월, 당시 실리시아에서 아르메니아 인들의 지도자인 레오 1세 (Leo I : Prince of Armenian, Lord of Cilicia) 는 안티오크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특단의 결단을 내렸다.
사실 아르메니아 인들도 기독교 인들이긴 하지만 십자군 국가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수니파 무슬림인 다니슈멘드 왕조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다니슈멘드의 에미르인 가지 (Ghazi) 는 여기에 협력한다. 보에몽 2세가 실리시아로 진출하게 되면 다음에는 중부 아나톨리아를 노릴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의 1135년의 지도. 여기서 안티오크 공작령과 아르메니안 실리시아, 에데사 백작령과의 위치를 확인하자.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1130년 2월에 있었던 안티오크의 실리시아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보에몽 2세는 순진하게도 강을 따라서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투르크 군사들의 유인 기만 작전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보에몽 2세 본인도 결국 사망했다.
이렇게 보에몽 2세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떴다. 그가 안티오크 공작이 된지 불과 4년만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보에몽 2세는 조부인 로베르 기스카르와 아버지인 보에몽 1세와 비교해서 재능은 별볼일 없지만 야심만은 그들과 비슷한 정도로 큰 탓에 너무 빨리 몰락한 셈이다.
이제 다시 지도자를 잃은 안티오크에는 보에몽 2세의 미망인인 앨리스와 그녀와 보에몽 2세와의 사이의 유일한 자식인 2살배기 딸 콩스탕스 (Constance of Antioch) 가 있었다. 그런데 앨리스는 부창부수라고 해야 할 지 먼저간 남편처럼 야심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그 자신이 안티오크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해 사방에 적이 깔린 상태였다.
더구나 아버지인 보두앵 2세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다시 안티오크를 확보하기 위해서 - 이는 부분적으로 왕국의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안티오크가 무주공산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보두앵 2세가 안티오크에 욕심이 있었다면 1119년 섭정 로게르가 사망했을 때 안티오크를 차지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보에몽 2세가 안티오크의 권리를 주장했을 때 보두앵 2세는 혼쾌히 동의했다 - 다시 안티오크로 북상하자 앨리스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대책은 너무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십자군 국가에 큰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던 무슬림 지배자인 아타베그 장기에게 동맹을 제안한 것이다. 앨리스는 사절을 파견해 그녀가 장기에게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불과 2살 난 딸 콩스탕스를 무슬림 왕자와 결혼시킬 의사가 있음을 모술에 알리려고 했다. 아무리 십자군 국가들이 다양한 무슬림 세력과 동맹을 맺기는 했어도 이는 대다수 십자군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 공주와 독실한 무슬림 신자인 아랍 왕자와의 결혼이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다만 당사자들이 너무 어린 점만 빼고) 결국 종교와 국경을 초월한 이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이 제안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보두앵 2세의 부하들에 붙잡히는 바람에 그 사실이 모두 들통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제안은 장기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노발대발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크에 당도하자 앨리스는 성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어차피 보두앵 2세를 거역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차라리 일찍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착한 딸이라도 되야 했다.
현명하게도 안티오크의 귀족들은 이 문제 많은 앨리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딸인 앨리스는 아버지인 보두앵 2세를 거역해도 용서를 구할 수 있지만 생판 남인 귀족들은 그런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앨리스를 도와 보두앵 2세에 대항하는 반역을 도모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귀족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보두앵 2세를 영접했다. 그제서야 앨리스는 아버지의 자비를 구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조치였다. 보두앵 2세는 앨리스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라타키아로 유배를 보냈다. 만약 앨리스가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보두앵 2세는 충분히 그의 딸이 안티오크 공작부인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공주로써 대우 받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남편인 보에몽 2세처럼 과욕을 부리다가 몰락하고 말았다.
유배당한 앨리스는 1131년 아버지가 죽고 난 후 다시 복권을 노렸으나 그녀가 안티오크로 복귀할 경우 이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안티오크의 귀족들에 의해 저지 당했다. 안티오크의 귀족들은 신임 국왕 풀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앨리스는 다시 풀크를 두려워하고 있는 트리폴리 백작 퐁스와 조슬랭 1세의 아들 조슬랭 2세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퐁스 백작은 풀크 국왕이 트리폴리를 통과하지 못하게 길을 봉쇄했으나 왕은 해로를 통해 안티오크에 도착 다시 앨리스를 축출했다. 그리고 비록 다툼이 있긴 했지만 왕은 결국 북부 십자군 국가와의 관계를 다시 개선했다.
한편 앨리스는 1135년 죽기전 자신의 딸인 콩스탄스를 차기 비잔티움 황제인 마누엘 콤네누스와 결혼시켜 다시 복권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이듭해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보면 애시당초 과욕을 부려 당연한 자신의 권리 마저 놓치고 유배지에서 사망한 셈이니 지나친 욕심이 결국 비참한 말로를 가져오는 아주 전형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23. 보두앵 2세의 죽음과 평가
한편 앨리스를 폐위 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보두앵 2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왕은 중병이 걸려 누가 봐도 이제 오래 살긴 틀린 상태였다. 왕은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1차 십자군 원정도 겪었고, 생에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지냈으며, 2번이나 무슬림 감옥에 갖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결국 죽기 직전까지 자식들이 말썽을 일으켜 인생의 마지막을 평온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아마 보두앵 2세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냈어도 자신의 마지막 상대가 자신의 딸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보두앵 2세는 1131년 8월 21일 승하했다. 국왕은 죽기 2년전인 1129년의 자신의 후계자는 사위로 맞은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장녀 멜리장드가 될 것이라고 정했고 이는 왕이 승하한 후 그대로 지켜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에 국왕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자 측근이었던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도 사망하고 그 자리를 아들인 조슬랭 2세에게 물려주었다.
사실 1118년에 중요한 십자군 1세대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 보두앵 2세와 조슬랭 1세도 사실 십자군 참전 용사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들도 십자군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차 십자군 원정때 이들은 주요 지휘관이라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이후 십자군 국가들이 기반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십자군 국가의 지도층이 된 경우였다.
또 연령대도 1차 십자군의 주요 군주들에 비해서 젊어서 0.5 세대 정도 아래에 있다. 따라서 필자가 생각하기엔 이들은 십자군 1.5세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건 그냥 임의적인 분류이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이들의 사망으로 십자군 국가들에 큰 공백이 생긴 건 주목할 점이다.
당대의 사람들도 이들의 죽음이 큰 손실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연대기 작가인 티레의 윌리엄은 보두앵 2세를 가리켜 "독실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충성심과 풍부한 경험으로 전쟁터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라고 회고 했다. 또 무슬림 연대기 작가인 이븐 알 칼라시니는 그를 소(小) 보두앵 (Baldwin the little) 이라고 칭하면서 "그가 죽은 후 그들 (프랑크인들) 사이에서는 건전한 판단력과 통치의 능력을 가진자들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라고 평가했다.
사실 보두앵 2세도 결점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또 전쟁터에서 오래 살았긴 했어도 군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가 물려 받은 왕국을 휼륭하게 방어해내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 공로에 대해서 칭찬을 인색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누구라도 보두앵 2세와 같은 시련을 겪고서 이를 이겨내고 국가를 수호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비록 적이지만 이븐 알 칼라시니도 보두앵 2세를 칭찬했을 것이다.
선왕인 보두앵 1세와 더불어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뛰어난 군주를 뽑는다면 아마 보두앵 2세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 국가들이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잘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뛰어난 통치자들과 더불어 주변 무슬림 국가들의 극도의 분열상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두가지 요소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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