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말릭 1 세의 이집트 침공 (1차)
앞서 이야기 했듯이 아말릭 1 세 (Amalric I, 아모리나 아말리크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는 즉위후 바로 다음해인 1163년에 이집트를 전격 침공했다. 물론 이집트와 예루살렘 왕국은 건국 당시부터 계속 전쟁을 치루곤 했기 때문에 침공 자체는 새로울 것은 없었다. 이전에도 이 두 나라는 침공하는 역할과 방어하는 역할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싸워왔다.
하지만 1163년의 침공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력 자체는 아무리 이집트가 약해졌다고 해도 쉽게 이집트를 정복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아말릭 1세가 전격 침공을 결정한 데에는 이집트 영토를 일부라도 정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선대의 보두앵 3세가 이집트와 맺은 조약에 의한 조공을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본래 보두앵 3세 시절에 주기로한 연공금 - 이것이 아말릭 1세가 이집트를 침공한 첫번째 표면적인 이유였다.
(1167년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하는 아말릭 1세의 그림. (The marriage of Amalric I of Jerusalem with Maria Comnena, Queen consort of Jerusalem, at Tyre in 1167, as depicted in a MS of the ''Histoire d'Outremer'', painted in Paris c. 1295-1300.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아마도 아말릭 1세에게는 만약에라도 이집트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예상외의 군사적 성과를 거두면 이를 바탕으로 이집트 정복의 오랜 숙원사업을 이루려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연공금을 받아내는게 1차적 목표지만 더 나아가 부유한 이집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왜 굴러온 복을 마다하겠는가 ? 하지만 아말릭 1세에게는 불행하고 살라딘에게는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163 년에 이루어진 십자군의 이집트 본토 침공은 1차 침공으로 불린다. 이 침공에서 아말릭 1세는 이집트가 혼란한 틈을 제대로 타서 침공한 탓에 초반에는 상당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디르감은 아직 이집트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결국 외세가 침공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승승 장구하던 아말릭 1세와 십자군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의 자연으로, 십자군이 이집트를 침범한 당시는 범람기라 이집트를 침공하기에는 좋지 않은 시기라는 사실이었다. 아말릭 1세의 군대는 십자군 사상 처음으로 이집트 중심부까지 공격하는데 성공했으나 이들의 성공은 이집트 북부의 빌베이스 (Bilbays/Bilbeis - 카이로 인근 도시) 에서 멈췄다. 이집트 군이 마침 범람한 나일강을 이용 제방과 댐을 개방하고 무너뜨림으로써 침략자들이 수몰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163 - 1169 사이의 이집트 침공, 초록색이 누레딘의 시리아군이고, 붉은 색이 십자군/비잔티움 군, 그리고 주황색이 이집트 군이다. 1163년의 아말릭 1세가 이끈 1차 십자군 침공에서 빌베이스에서의 수몰 작전으로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지도에는 1163년에 아말릭 1세가 2차례 침공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약간 오류인 듯 하다. 아말릭의 2차 침공은 1164 년이다)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Alike 3.0 License. In short: you are free to share and make derivative works of the file under the conditions that you appropriately attribute it, and that you distribute it only under a license identical to this one. Official license Author : abattenb )
이로써 침략자들은 격퇴되고 아말릭 1세는 별수없이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말릭 1세에게 디르감이 사자를 보내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새롭게 맺음은 물론 약속한 연공금도 지불하겠다고 하자, 십자군들도 처음엔 어리 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앞서 설명한데로 이집트가 십자군에 넘어가는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던 누레딘이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디르감은 다급하게 십자군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4. 시리아의 참전
지금까지 역사상의 기록에 - 물론 10세 전후의 살라딘이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별도로 한다면 - 등장한 적이 없는 살라딘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로 1164년의 시리아의 이집트 침공이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살라딘, 혹은 살라흐 앗 딘의 이름을 물어보면 아마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바로 자신의 숙부이자 누레딘의 오른팔인 용맹한 장군 시르쿠의 부관 자격으로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살라딘의 나이 (약 25세) 로 보건대 아마 이것이 첫번째 출정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솔직히 이 원정 초반에는 살라딘의 이름이 비중있게 다루어질 구석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 원정의 결과 최대의 수혜를 받게 된 건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살라딘이었다.
살라딘이 이 원정에 어떻게 참전하게되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의 숙부인 시르쿠가 이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정해진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아사드 앗 딘 시르쿠는 당시 누레딘 휘하에 있는 가장 용맹한 장군이었므로 누레딘 치세의 가장 중요한 해외 원정이었던 이집트 원정에 가장 적임자였다.
비록 아말릭 1세가 이집트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디르감이 존재하는 한 시리아 군이 이집트에 침공할 좋은 명분이 되는데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원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누레딘이 생각하기에 이 원정의 가장 중요한 고비 중 하나는 바로 시르쿠의 병력이 이집트로 들어가기 전에 십자군 국가에 들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우회해서 남쪽의 사막 방향에서 사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리아 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우회할 동안 누레딘는 기만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누레딘은 예루살렘 왕국 북부의 베니어스 (Banias) 를 다시 공격했다. 물론 십자군 국가들의 눈을 여기로 쏠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위의 지도에서 1163년에 초록색 화살표가 Banias/Baniyas 를 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만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시르쿠가 이끄는 시라아 군의 본대는 무사히 이집트 본토로 진입했다. 이 원정에는 살라딘 이외에도 물론 샤와르가 같이 동행하고 있었다. 샤와르의 머리속에는 시르쿠의 군대를 이용해 권력을 회복한 다음에는 과연 어떻게 해야만 이 귀찮은 원군을 쫓아낼 수 있을지 하는 궁리로 복잡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누레딘이 이집트의 연공금이 아니라 이집트 자체를 원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디르감을 물리친 후 해야 하는 고민이었다.
시르쿠의 군대는 아말릭 1세와 십자군 보다 훨씬 용의주도했다. 빌베이스에서 다시 수공 작전을 쓸만한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빌베이스에서 디르감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카이로를 공략했다. 디르감은 자신의 근거지인 카이로를 점유하고 있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제 그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달은 카이로 시민들은 디르감 곁을 하나씩 떠났고 결국 당시에 권력을 잃어버린 권력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자신의 백성들의 손에 의해 끝장나고 말았다.
샤와르는 다시 권좌에 금의 환향했다. (1164년 5월) 이제 다시 권좌에 오른 샤와르가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역시나 시르쿠가 이끌고온 귀찮은 시리아 군대를 어떻게든 빈손으로 돌려보내든지 아니면 고립시켜 이집트 안에서 격파하는 일이었다.
아마 이 상황에 직면한 시르쿠나 누레딘은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샤와르의 인간됨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이거니와 처음부터 그냥 가라고 빈손으로 돌아갈 거였다면 애시당초 이집트 원정을 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집트 원정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누레딘은 즉시 살라딘에게 지시해서 카이로 근방인 빌베이스 및 인근 동부 지역을 장악하도록 했다. 수도 카이로 방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샤와르 역시 자신이 불러들인 시라아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집트 자체 군사력 - 물론 최근의 내전으로 인해 많이 약화된 상태였을 것이다 - 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새로운 원군을 찾아야 하는데 이 새로운 동맹은 종교적 차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정치적 이해 관계를 따지면 그다지 놀라운 상대가 아닌 아말릭 1세 였다.
이대로 이집트가 누레딘 손에 들어가면 가장 곤란한게 누군지를 생각해보면 아말릭 1세가 샤와르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본래 아말릭 1세는 디르감과 동맹을 맺고 샤와르 - 누레딘 동맹에 대항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미 디르감은 과거의 인물이고 지금 중대한 과제는 일단 이집트가 누레딘 손에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든 막는 일이었다.
1164년 마침내 아말릭 1세는 다시 이집트로 출정한다. 십자군의 2차 이집트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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