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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1




 25.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1176 - 1177)


  1176 년에 이르자 보두앵 4세는 15세가 되었다. 아직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평균 수명이 짧은 당시 관례에 따라 이제 섭정 없이도 직접 통치할 시기가 된 셈이었므로, 그리고 반대파가 많기도 했으므로 레몽 3세는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여러 모로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기에 어린 나병 환자인 보두앵 4세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두앵 4세와 신하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긴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일단 보두앵 4세의 수명이 길어보이지 않았으므로 다음 후계자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보두앵 4세에게는 남자 동생이 없었고 계모인 마리아 콤네나 역시 딸만 둘이었다. 다만 보두앵 4세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었다. 시빌라 (Sybilla) 는 보두앵 4세 보다 한살 더 많아서 당시 16세였는데 당시 기준으로 혼기가 된 - 물론 혼기가 안되도 결혼을 하기도 했다. 앞서 공녀 콩스탄스의 예를 생각하자 - 셈이었고 차기 후계자가 급한 예루살렘 왕국은 적당한 신랑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물색한 신랑감은 바로 몽페랏의 후작 기욤 5세 (William V of Montferrat) 의 장남인 기욤 (William longsword) 이었다. 이 인물은 긴칼이라는 별명처럼 군사적 재능이 출중했는데 이는 사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에 간절하게 필요한 재능이었다. 


 보두앵 4세는 그에게 자파와 아스칼론의 백작 자리 및 시빌라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꽤 괜찮아 보이는 조건 - 그리고 경우에 따라 보두앵 4세가 빨리 죽으면 그가 풀크 국왕 처럼 공동 국왕자리를 차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 을 내걸고 스카웃 해왔다. 물론 점차 늘어가는 살라딘의 위협으로 부터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능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영주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빌라의 초상화. 중세 그림 답게 이것만 보고는 미녀인지 아닌지 알기 힘들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사실 기욤은 당시 30대로 한창 나이었고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오래살았다면 분명히 왕국에 중요한 동량 역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신께서 예루살렘 왕국을 버린 것인지 또 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기욤이 우트르메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1177년 4월에 아마도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당시 의학 기술이라고 해봐야 별게 없었기 때문에 전염병은 극도로 위험했고 한번 걸리면 아무리 평소 건강한 사람이라도 바로 죽게 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가 나병환자 보두앵 4세 보다 더 일찍 죽은 것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에는 청천 벽력 같은 뉴스였다. 다만 기욤은 죽기 전에 자신의 최소한의 임무를 완수 했는데 그것은 시빌라가 미래의 보두앵 5세를 임신한 것이었다. 일단 후계자는 만들어 놓고 죽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 1177년의 예루살렘 왕국에는 계속해서 결혼 동맹이 이어졌다. 북쪽의 안티오크 에서는 보두앵 3세가 사이프러스 공작의 딸인 테오도라 콤네나와 결혼했다. 또 다른 결혼은 큰 문제가 있는 결혼이었는데 그것은 최근 자유의 몸이 된 르노 드 샤티옹과 밀리의 스테파니 (Stephanie of Milly) 의 결혼이었다.


 스테파니의 전 남편은 아말릭 1세의 사후 섭정 자리를 노리다가 암살된 밀레 드 플랑시 였는데 그녀의 팔자가 사나웠는지 새로운 남편감은 이전보다 더 문제가 있는 르노 드 샤티옹이었다. 르노는 그녀와의 결혼으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 남쪽의 중요한 요새인 카락 (Karak, kerak) 의 영주가 되었다.


 본래 보두앵 4세의 생각은 르노 드 샤티옹과 기욤이 힘을 합쳐 카락에서 아스칼론과 자파를 방어하므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남쪽을 방어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의도 자체는 잘못된 게 없었지만 예기치 못하게 기욤은 죽었고 나머지 한 명인 르노는 전혀 그 임무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이 잘못이었다.


 특히 과거 무슬림 감옥에 갖히기 전에 르노가 한 행위를 생각했을 때 가능하면 중요한 직책에서 배제하는 것이 옳았지만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인적 자원이 심각하게 부족해졌고 여기에 르노 자신이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랐기 때문에 카락 수비에 적임자로 잘 못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결정이 매우 잘 못되었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르노는 무슬림과도 동맹을 맺어서라도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레몽 3세나 험프리 2세 같은 화친파와 대립하면서 성전 기사단 같은 강경파와 손을 잡고 공공연히 무슬림들을 약탈하러 다녔다. 그리고 이것은 살라딘으로 하여금 반격에 나서도록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1177년에 먼저 공세를 생각했던 것은 살라딘이 아니라 예루살렘 왕국이었다. 왜냐하면 오랫만에 유럽에서 대규모 군대가 지원왔기 때문이었다. 이 군대를 이끄는 것은 플랑드르의 필립 (Phillip of Flanders) 이었는데, 사실 십자군을 가장하긴 했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이 필립이란 인물을 사실 풀크 국왕의 손자로 촌수로 따지면 보두앵 4세의 사촌 뻘이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자신을 보두앵 4세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더불어 봉토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자신이 보두앵 4세의 가까운 사촌이니 레몽 3세 처럼 사촌 자격으로 섭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곧 왕국 최고 회의 (
Haute Cour (High Court) ) 가 열렸고 당연히 말도 안되는 필립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결국 필립은 그럴 듯한 십자군 병력을 데리고 와서는 약탈만 좀 하다가 유럽으로 돌아가 버렸다.


 솔직히 너무 얼토 당토 않은 요구만 하지 않았다면 - 예를 들어 섭정 - 보두앵 4세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공주들이 어리긴 해도 필립 역시 유력 영주 중 하나인데다 그가 가져온 병력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살라딘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공주와 봉토만 탐났다면 - 물론 공주와 결혼이 아니라 봉토가 더 목적이겠지만 - 필립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26. 몽지사르 전투 (
Battle of Montgisard   1177년 11월 25일)


  아무튼 이렇게 되어 1177년 말에 예루살렘 왕국은 상황이 더 어려워 졌다. 기대했던 기욤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고, 모처럼 유럽에서 온 십자군은 그냥 돌아가 버렸다. 여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최근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십자군을 도와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모든 일들은 살라딘이 알라의 은총을 받든지 아니면 신께서 예루살렘 왕국을 버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살라딘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모았다. 곧 잘 훈련된 8천명의 핵심 병력과 그가 수단에서 모은 1만 8천의 흑인 병사들을 합쳐, 2만 6천이라는 제법 많은 대병력이 모였다. 이는 확실히 예루살렘 왕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보다 상당히 대규모인 게 분명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우세를 너무 믿었던게 화근이었다.


 한편 평소 우려했던 대로 살라딘의 대규모 병력이 공격해 오자 일단 예루살렘 왕국은 있는 데로 병력을 다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성전 기사단 (Knight Templer) 와 이제 우트레주르뎅의 영주가 된 르노 드 샤티옹이 보두앵 4세의 군대의 합류했다. 병으로 인해 군대를 지휘하기 어려운 보두앵 4세를 르노가 도왔다. 여기에 조슬랭 3세와 시돈의 레지날도, 그리고 이벨린의 보두앵과 발리언 형제들이 어려움에 빠진 왕국을 지키고자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의 병력을 다 합쳐도 475명의 성전 기사 (Templer) 와 수천명에 보병에 지나지 않아 정면으로 맞서서는 살라딘의 대군에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런 절제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왕국을 구한 것은 사실 신의 가호가 아니라 살라딘의 실수였다.


 살라딘은 자신의 절대적 우세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적을 수색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한편, 단숨에 예루살렘을 포위 점령하려는 의도에서 예루살렘 주변지역으로 병력을 분산해서 동시에 주요 목표인 람라 (Ramla),  리다 (Lydda), 그리고 아르수프 (Arsuf) 를 공격했다.


 사실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서 너무 신속하게 먼거리를 달려와서 지쳤을 뿐 아니라 병력까지 분산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는 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라딘의 군대는 예루살렘 왕국 깊숙히 파고 들어 예루살렘 인근의 주요 지점들을 점령하기 직전 단계였다.


 그러나 사실 살라딘의 군대가 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은 것은 십자군의 주력이 좌측으로 우회 기동하여 살라딘의 배후를 노리려는 의도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숫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만큼 유일한 기회는 병력이 흩어진 틈을 노려서 살라딘의 본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공격 받는 지점 마다 얼마 안되는 병력을 분산 배치한다면 결국 적의 우세한 병력 앞에 각개격파 되는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어린 보두앵  4세와 그의 가신들이 만들어낸 전략 치고는 정말 대담하고 적의 의표를 찌른 놀라운 전술이었다. 살라딘은 이제 곧 무슬림의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일에 들떠서 보두앵 4세와 그의 가신들을 과소 평가했던 셈이다. 사실 이 몽지사르 전투는 지금까지 십자군이 보여준 전투 가운데서 손꼽힐 만한 십자군의 전술적 승리였다. 이것을 보두앵 4세와 그의 가신들이 해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이 살라딘의 배후로 몰래 이동하는데 성공한 것은 바로 람라 근처의 몽지사르 (
Mons Gisardi) 였다.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적의 군대를 본 살라딘의 군대는 크게 당황했다. 무슬림 병력은 분산되었고 많이 지쳐있었다.


 반면 십자군은 오랫만에 정말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나병으로 육신이 고통받던 보두앵 4세는 스스로 예루살렘 왕국의 중요한 성 유물인 참 십자가 (True Cross) 앞에 무릎을 꿇고 승리를 기원했다. 이에 크게 용기를 얻은 십자군은 이번에는 정말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1177년 11월 25일)




(몽지사르 전투. 주교가 든 것은 아마 참 십자가로 생각된다. 병상에서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보두앵 4세로 생각된다.Die Schlacht von Montgisard, 1177. Historien-Gemälde von Charles Philippe Larivière (1798-1876).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이 몽지사르 전투는 십자군의 결정적인 승리였다. 물론 십자군도 1100명이 사망하고 750 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병력 차이를 감안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 전투는 십자군의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십자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의 가호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한편 예루살렘 정복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살라딘과 그의 부하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군대는 간신히 후퇴에 성공할 수 있던 것만으로도 알라의 은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살라딘의 조카인 아흐메드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중간에 습격을 받아 살라딘의 군대가 이집트로 퇴각했을 때는 원래 규모의 1/10 로 줄어든 상태였다. 


 떠오르는 신흥 세력인 살라딘이, 그것도 아주 강력한 상대도 아닌 16세의 나병환자 보두앵과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십자군 병력앞에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 상처였다. 아마 살라딘의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가 이 몽지사르 전투였을 것이다. 만약 이 전투의 패배만 아니었다면 살라딘은 10년은 빨리 성도 예루살렘을 수복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지나간 일이었고 이제 문제는 빨리 세력을 수복해서 다음을 대비하는 일이었다. 살라딘의 성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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