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차 이집트 침공
아말릭 1세는 다시 1164년에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사실 이집트의 샤와르를 돕는다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단지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당면 과제는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십자군 국가의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집트 자체를 도모하려는 야심도 있음직 하지만 아직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병력을 빼면 그 사이 누레딘이 용이하게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는 날에는 양쪽에 공통된 적을 두게 되는 셈이었으므로 십자군 입장에서는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누레딘의 공격이 걱정되긴 했지만 아말릭 1세는 결국 이집트를 다시 침공하는 쪽을 택하니 이것이 바로 십자군의 2차 이집트 침공이다.
(십자군의 2차 이집트 침공 개요. 1. 샤와르가 시리아 군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회복했으나 2. 다시 시리아 군을 몰아내기 위해 아말릭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결국 2차 이집트 침공으로 인해 이집트의 중립이 확인되었다.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5 Generic license. You are free to share & remix, but you must attribute the work in the manner specified by the author or licensor. Author : Amonixinator)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카이로 인근의 요충지인 빌베이스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협공에 대비했다. 샤와르가 권좌에 복귀한 것은 1164년 5월이었다. 그리고 아말릭 1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본토에 도달한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이제 새롭게 동맹이 된 아말릭 1세와 샤와르는 빌베이스를 포위 공격했다. 비록 시르쿠가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긴 했지만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적에게 장기간 포위된다면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당시 시르쿠의 상태는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파울루스의 독일 6군의 상황처럼 암울했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보급은 이루어질 가망이 없고 아군의 구원군이 나타날 가능성 또한 매우 희박한 상태에서 병사들은 힘겹게 포위전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누레딘이 움직였다. 누레딘은 자신이 빌베이스의 포위전을 풀어주기 위해 직접 그곳으로 갈 수 없지만 대신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이 움직인 틈을 타서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런데 시간을 끌면 이번에는 자신이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잘 아는 아말릭 1세를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불러들이려면 누레딘은 그냥 평범한 승리가 아니라 정말 커다란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알라께서 누레딘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누레딘의 위대한 승리는 바로 하림 (Harim) 에서 이루어졌다.
6. 하림 전투 (Battle of Harim 1164. 8. 12 )
이미 누레딘은 1163년에도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당시에는 모든 범 기독교계 국가들이 거국적으로 힘을 합쳐 병력 면에서 누레딘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레바논의 베카 계곡 (Beqaa Valley) 에서 벌어진 알 부카이아 전투 (Battle of al-Buqaia. 1163년) 는 십자군의 승리였다. 당시 트리폴리 백작령을 노리고 침공한 누레딘의 군대는 곧 거대한 기독교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기독교 연합군에는 이제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이자 공녀 콩스탄스와 푸아티에의 레몽의 아들인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3세 (Bohemond III of Antioch), 그리고 트리폴리 백작으로 레몽 2세와 오디에르나의 아들인 레몽 3세 (Raymond III of Tripoli) 가 우선적을 힘을 합쳤으며, 여기에 실리시아를 통치하는 비잔티움 제국 관리인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Konstantinos Kalamanus) 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에는 마침 유럽에서 성지를 순례하러 온 많은 기사들과 영주들이 대거 이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여기에는 뤼지냥의 위그 8세 (Hugh VIII of Lusignan) 와 고드프루아 마르텔 (Geoffrey Martel) 이 이끄는 대규모 프랑스 군이 합류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들이 베카 계곡에서 모이자 그 병력 규모가 누레딘의 군대를 압도할 수 밖에 없었다. 누레딘으로써는 최선을 다해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하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렇듯 오랫만에 대거 새로운 병력을 보충받았는데다 이제 성인이 된 보에몽 3세와 레몽 3세가 십자군 왕국의 북쪽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말릭 1세도 이집트 원정이라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말릭 1세는 보에몽 3세와 레몽 3세를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이들이 비록 선대의 영주들에 비해서 서로 다투는 정도는 덜했지만 아직 누레딘의 맞수라고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레딘은 알 부카이아 전투의 치욕을 갚고자 절치 부심 새롭게 대군을 조직했다. 이를 위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새롭게 병력을 징집하는 한편 그의 동생이자 모술을 통치하던 쿠투프 앗 딘과 오르토퀴드 왕조까지 대 십자군 성전에 끌어들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몰랐던 십자군은 상당한 숫자의 병력을 이집트로 보냈으니 사실상 십자군 국가의 동쪽 방면은 큰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1164년 8월에 마침내 누레딘은 주력 병력을 이끌고 지금은 터키 국경 인근의 시리아의 도시인 하림 (Harim/Harem) 을 공격했다. 당시 하림의 영주인 레지날도 (Reginald of Saint Valery) 는 곧 적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다시 보에몽 3세와 레몽 3세의 십자군 군대와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가 이끄는 비잔티움군, 그리고 전해에 순례차 온 위그 8세와 고드프루아 마르텔이 이끄는 군대을 비롯한 여러 군대까지 합류해서 하림의 포위를 풀기 위해 출정했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아르메니아의 토로스와 조슬랭 2세의 아들인 조슬랭 3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누레딘이 노리던 바로 그것이었다. 십자군 국가의 남아있는 주력 병력을 한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누레딘은 십자군 병력이 당도하자 곧 적에게 압도당한 것 처럼 위장해서 하림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을 병력이 열세해서 후퇴하는 것으로 착각한 십자군 연합군 지휘관들은 중대한 판단 실수를 했다.
그들은 군사 규율을 무시하고 규모를 알지 못하는 적을 추격해서 완전히 격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누레딘도 많은 병력을 이집트로 파견해서 이제 병력이 얼마안되지만 자신들의 새롭게 병력을 충원해서 병력면에서 우세하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 판단 미스였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한 누레딘은 십자군의 공격을 방어한 후 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십자군을 거의 학살하다시피 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십자군의 엄청난 패배였다. 다른 말로 하면 누레딘의 가장 결정적인 승리 중 하나였다. 이븐 알 아씨르 (ibn Al Athir) 에 의하면 당시 십자군과 연합군은 무려 만명이상 학살당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에 더구나 중국과는 달리 순수 전투 병력만 계산하는 유럽 군대가 1만명 이나 학살당하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 정도의 대패였다.
여기에다 보에몽 3세, 레몽 3세, 조슬랭 3세, 위그 8세, 고드프루아 마르텔,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등 주요 지휘관들도 모두 포로로 잡혀 알레포로 압송되었다. 이전부터 도망치는데는 이골이 난 아르메니아의 토로스만이 누레딘의 유인 전술을 눈치채고 미리 피한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림 전투의 결과 3개의 십자군 국가 - 안티오크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 - 모두가 통치자가 해외에 있거나 포로 신세가 되어 버리고 십자군 국가 전체가 수비 병력이 거의 없는 무주 공산이 되어 버렸다.
사실 누레딘이 다음에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목표는 안티오크였다. 그러나 누레딘이 생각하기에 안티오크는 방어가 견고할 뿐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봉토이므로 잘못하면 마누엘 1세의 공격을 받게 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크는 공격 목표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누레딘은 오랬동안 공격했지만 결국 정복하지 못했던 요새인 베니어스를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된 아말릭 1세는 더 이상 느긋하게 시르쿠와 살라딘을 포위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돌아가지 못하면 십자군 국가 전체가 누레딘 손에 넘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시르쿠와 아말릭 1세는 서로 암묵적인 합의하에 이집트를 빠져나왔다. 일단 시르쿠나 아말릭 1세나 지금은 본거지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물론 시르쿠는 자신을 배신한 샤와르를 공격하고 싶었겠지만 군대가 오랜 포위전에 지쳤으므로 일단은 본거지로 돌아가서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군과는 달리 시리아 군은 결국 빌베이스에서 병력을 거의 온전히 보존해서 후퇴할 수 있었다. 당시 시르쿠가 복수를 하기보단 미래를 기약하기 위해 병력을 온전히 보전한 판단은 결국 나중에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히틀러의 오판으로 탈출할 수 있을 때 탈출하지 못하고 모든 병력을 잃어버린 독일군과는 대조되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고 일단 1164년 전쟁의 가장 큰 승리자는 누레딘과 샤와르였다. 누레딘은 십자군 국가들에 대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샤와르는 두 귀찮은 외국군대를 한꺼번에 돌려보냈다. 특히 샤와르는 아말릭 1세가 시르쿠의 군대를 격파하고 난 이후 어떻게 해야 할 지 답답했을 텐데 이렇게 한번에 해결되니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게 해피엔딩으로 끝난건 아니었다. 아말릭 1세나 누레딘이나 시르쿠나 모두 샤와르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다음 전쟁을 예약하고 기다리는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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