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레딘
정확히 말하면 누레딘 이란 명칭은 누르 앗 딘 (Nur ad Din) 이란 명칭을 서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사실 이 인물의 정확한 이름은 al-Malik al-Adil Nur ad-Din Abu al-Qasim Mahmud Ibn 'Imad ad-Din Zangi (1118 - 1174) 로 일반적으로는 누르 앗 딘 장기 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것 같고 서구인들은 누레딘이라 불렀던 것 같다. 누르 앗 딘이란 명칭은 신념의 빛 (Light of the Faith) 이란 뜻이었으며, 글자 그대로 그는 십자군과의 성전이라는 신념아래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누레딘은 앞서 언급했듯이 장기의 차남이다. 장기가 죽고 나자 형인 사이프 앗 딘 가지 1세는 모술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장악하고 동생인 누레딘은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나눠갖기로 하면서 알레포를 중심으로한 시리아 지역이 누레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훗날 십자군과의 성전으로 기억되는 누레딘 답게 그의 치세의 시작은 바로 십자군과의 전쟁으로 시작했다. 일단 장기가 죽자 이는 에데사의 탈환을 노리고 있던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에게는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다. 더구나 서유럽계는 아니지만 아르메니안 기독교인들이 다수인 에데사의 백성들 역시 무슬림의 지배를 달가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슬랭 2세의 에데사 탈환 계획을 돕고 있었다.
누레딘으로써는 즉위하자 마자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기회가 온 것이다. 본래 중앙집권적인 왕권에 대한 충성심이 약한 투르크 족들은 강력한 지배자의 아들 보다는 지금 강력한 지배자를 추종하는 특징이 있었고, 따라서 누레딘은 자신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1146년 10월 장기가 죽고 누레딘이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알레포에서 바쁘게 움직일 때 마침내 일이 터졌다. 조슬랭 2세는 에데사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에데사를 급습하여 수비병들을 살해하고 성을 장악하려 시도 했다. 그러나 조슬랭 2세는 결국 성채를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 누레딘의 응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조슬랭 2세는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1월에는 다시 성이 누레딘 쪽에 돌아왔다.
누레딘이 그의 후계자로 생각되는 살라딘과는 가장 다른 차이점 중에 하나는 적에게 용서가 없었다는 점이다. 에데사를 재 점령한 후 누레딘이 한 일은 성안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고 이들을 보복성으로 학살한 것이다. 티레의 윌리엄에 의하면 누레딘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적에게는 자비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물러난 조슬랭 2세는 결국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사실 그의 최후를 다소 유보한 것에 불과했다. 그의 세력의 기반인 에데사를 되찾지 못한 이상 에데사 백작령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제 조슬랭의 마지막 기회는 2차 십자군이 에데사를 다시 수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슬랭 2세 에게는 비극적으로 2차 십자군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누레딘을 십자군을 향한 지하드 (성전)의 영웅으로 만들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 결정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 관계인 다마스쿠스를 공격한다는 결정이었다.
비록 당시 다마스쿠스가 예루살렘과 동맹 관계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당시 다마스쿠스는 누레딘 측과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다마스쿠스의 실제적 지배자였던 무인 앗 딘 우나르 (Mu'in ad-Din Unur al-Atabeki ) 는 이미 1147년, 선대의 원한 관계를 종식시키고 누레딘과 화해를 하기로 한 상태였다. 따라서 우나르는 자신의 딸인 이스맛 앗 딘 카툰 (ʿIṣmat ad-Dīn Khātūn ) 을 누레딘과 결혼 시키고 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우나르는 내심 누레딘이 그의 아버지 처럼 다마스쿠스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부친 시절 부터의 원한 관계는 차치 하고서라도 다마스쿠스는 십자군과 누레딘 모두 탐낼 만한 이유가 있는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군의 결정은 이런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 주었다.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이제 누레딘에 힘을 빌리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1. 다마스쿠스 포위전 (Seige of Damascus 1148 년 7월)
1148년 여름. 보두앵 3세와 루이 7세, 그리고 콘라트 3세가 힘을 합친 2차 십자군의 병력은 사실 유럽에서 출발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세력이 크게 감소하긴 했지만 아무튼 상당한 대군이 - 기록에 의하면 무려 5만이라고 하는데 필자 생각으로는 약간은 신빙성이 의심되어 보인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패배하기 어려운 대군인 것은 물론 출발 때 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다.
일단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와 성전 기사단의 군대가 선봉에 섰고, 아직까지 가장 많은 병력이 살아남은 루이 7세의 군대가 중간에 섰으며 후방은 콘라트 3세가 이끌었다. 2차 십자군의 주력 부대가 다마스쿠스에 도달한 것은 1148년 7월 23일 이었다.
(1140년대의 우르트메르의 상황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들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한 이유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까워서 보급이 용이하다는 장점 이외에도 주변에 무성한 과수원들이 있어 물과 식량을 조달하기 편할 것으로 생각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다마스쿠스에 도달해 보니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다마스쿠스의 방어군은 이 과수원에 울창한 나무를 이용해서 효과적인 매복 및 게릴라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를 방어하던 우나르는 십자군의 침공 사실을 알고서는 일단 누레딘과 모술에 있는 그의 형인 사이프 앗 딘 가지 1세에게 급보를 띄워 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성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이미 장기와의 오랜 전쟁에서 다마스쿠스의 지배자와 그 주민들은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지키는 전술을 터득한 상황이었다.
다마스쿠스의 방어군은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십자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냈다. 하지만 공격이 계속 될 경우 우나르와 다마스쿠스는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 딜레마란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잘 방어하고 있지만 지금 상태에서 다마스쿠스 혼자 공격을 방어하다가는 결국 우세한 적군 앞에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알레포와 모술에서 원군이 도착할 경우 누레딘과 사이프 앗 딘은 서로 다마스쿠스를 탐낼 것임이 분명했다. 이 도시는 사실 그들의 아버지인 장기가 그토록 점령하기 원했던 도시가 아닌가 ?
더구나 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써 그게 아니더라도 이 두 야심가가 매우 탐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도시였다. 따라서 원군을 핑게로 이들이 다마스쿠스에 들어온다면 십자군이 아니라 누레딘과 사이프 앗 딘이 도시를 장악하게 될 지도 몰랐다. 사실 그렇게 되면 우나르 입장에선 십자군에 빼앗기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원군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긴 했는데 이 원군이 다마스쿠스 성안으로 들어오면 안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가장 좋은 일은 바로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십자군이 스스로 물러는 길이었다. 그러나 사실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 도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벌써 식량이 떨어질 상황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나르의 소망이 이루어 지려면 알라의 가호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라의 도우심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징벌인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7월 27일. 십자군은 과수원에 의해 보호받는 측면 대신 동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요새화가 덜 되어 있고 장애물이 없었기 때문에 공격이 용이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식량과 식수를 공급할 길이 요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십자군이 대군인 점이 확실했다면 병력을 나눌 수 있었을 테고 또 공격을 시작한지 수일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식량과 식수가 바로 바닥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식량과 식수를 전혀 구할 수 없는 곳에 진형을 쳤다는 점은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그것은 십자군 지휘관들 사이에 전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차 십자군 때도 서로간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주요 지휘관 중 사이가 나빴던 레몽과 보에몽 사이의 의견 차이인 경우가 많았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그래도 서로 협조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2차 십자군의 세 국왕들은 물론 개별 영주들의 경우까지 이들은 서로 전혀 협력할 의사가 없었다.
일단 다마스쿠를 점령한 뒤 누가 주인이 될 지를 두고 이들은 심각한 의견 차이를 나타냈다. 우선 거론된 후보로는 베이루트의 영주인 가이 브리스바레 (Guy Brisebarre) 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후보로 플랜더스 백작 티에리 (Tierry of Alsace, Count of Flanders) 가 루이 7세등의 지지를 받으며 물망에 올랐다. (사실 누구보다 티에리 본인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자 이 지역 토박이 귀족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이 다마스쿠스 점령을 도와봐야 결국 그들에게 돌아올 몫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곧 이 원정에 탈퇴할 의사를 밝혔고 실제로 십자군에서 이탈했다. 이렇게 되자 무슬림 군대가 아니라 십자군 자체의 내분으로 십자군은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우나르는 매우 시의 적절하지만 솔직한 편지를 써서 십자군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더 흔들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지금 누레딘과 사이프 앗 딘의 군대가 다마스쿠스로 몰려오고 있으며 결국 다마스쿠스가 그들의 군대에 넘어가게 되면 무엇보다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충고였다. 차라리 누레딘과 예루살렘 사이에 다마스쿠스라는 완충지대가 있으면 오히려 십자군 국가들이 더 안전해 질 수 있다는 상당히 우나르에게 유리한 해석이긴 하자민 어느 정도 진실도 담고 있는 편지였다.
결국 7월 28일 십자군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퇴각했다. 정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몇년동안 성지를 향해 고생해서 온 것 치고는 너무 허망한 패배였다.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어마어마 했다.
이 전쟁에 참가했던 보두앵 3세와 루이 7세, 그리고 콘라트 3세 모두는 상대방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 스스로의 무능과 어리석음이 그들 스스로를 응징한 셈이었다. 이 세 국왕중 누구도 전장에서 통합의 리더쉽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2차 십자군은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마스쿠스에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가장 빛난 것은 바로 우나르 혼자 뿐이었다. 그는 십자군의 압도적인 대군을 무엇보다 누레딘과 사이프 앗딘의 도움 없이 막아내므로써 결국 다마스쿠스의 정치적 독립을 잠시간 더 유지할 수 있었다.
12. 십자군의 와해
사실 다마스쿠스에서 십자군은 그다지 결정적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었고 또 병력도 온전히 보전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공격을 재개한다면 얼마든지 무슬림 국가들에 결정적인 패배를 가할 수 도 있었다. 적어도 에데사를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면 누레딘이 이를 방어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또 에데사 백작령을 다시 수복하므로써 십자군 국가들의 수명을 더 연장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십자군 사이의 불신의 크기는 이제 치유되기 어려운 정도로 까지 커졌다. 이 재앙적인 다마스쿠스 공격 이후 새로운 대안으로 아스칼론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결국 콘라트 3세만 병력을 움직였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콘라트 3세는 더 기대할 것이 없는 우트르메르에서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마누엘 1세와 우의를 다진 콘라트 3세는 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에 대한 공동 전선을 다시 확인했다.
루이 7세는 바로 우트르메르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무런 성과 없이 고국으로 귀국했다가 당할 망신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원정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결국 프랑스 국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막대한 병력을 잃고 귀국했고 훗날 왕비 엘레오노르와 이혼했다.
이혼한 왕비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 결혼하여 결국 거대한 앙제인 플랜태저넷 제국을 건설하게끔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루이 7세보다 신하인 헨리 2세가 더 거대한 영토를 지니게 되었고, 이는 카페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좀 더 멀리 본다면 결국 프랑스 국왕이 영국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를 회수하려 들었기 때문에 훗날 백년 전쟁에 기폭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2차 십자군 원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성 베르나르도는 이 일을 크게 후회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책에서 2차 십자군이 실패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은 그보다는 일관된 전략의 부재와 주요 지휘관들의 의견의 불일치,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무능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1차 십자군의 보에몽이나 보두앵, 고드프루아, 레몽, 로베르 등은 항상 의견의 일치는 보지 않았더라도 모두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며 숫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맞서 여러번 싸워 이겼다.
아무튼 2차 십자군은 가장 처참하게 패배한 십자군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2차 십자군은 군사적 패배라기 보다는 이 십자군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무능과 탐욕이 빚어낸 하나의 희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2차 십자군의 실패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의심할 바 없이 바로 누레딘 이었다. 이제 시리아에서는 누레딘의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 누레딘의 충복인 시르쿠와 아이유브 형제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데 훗날 그들의 아들과 조카인 살라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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