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하면 살라딘 (Saladin)은 서구식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을 뽑는다면 아마도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할 이 이름의 주인공의 실제 이름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Ṣalāḥ ad-Dīn Yūsuf ibn Ayyūb ) 이다.
살라흐 앗 딘 이란 명칭은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져서 우리에게도 살라딘이란 명칭으로 잘 알려져있다. 또 10여년전 창세기전이라는 국산 게임을 해보신 분들에게도 친숙한 명칭일 것이다. 놀랍게도 종교적 인종적 편견이 심하던 19세기에 이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서구인들에게 진정한 용기와 기사도, 그리고 관용의 정신으로 알려질 만큼 살라딘의 명성은 십자군 시대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있다.
물론 충분히 그정도의 가치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무슬림의 반격이 살라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본 연재 포스팅에서는 이 살라딘을 중심으로 3차 십자군까지 포스팅할 예정이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동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odfried Warreyn)
1. 살라딘의 탄생 및 성장 배경
살라딘, 아니 살라흐 앗 딘 의 아버지는 이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나즘 앗 딘 아이유브 (al-Malik al-Afdal Najm ad-Din Ayyub ibn Shadhi ibn Marawan) 이다. 나즘 앗 딘 아이유브는 현재 터키 동부와 이라크 북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 쿠르드 족 출신의 사내였다.
아이유브의 아버지이자 살라딘의 할아버지인 사히 이븐 마라완 (Shadhi ibn Marawan) 은 쿠르드족의 일파인 라와디야 (Rawadiya) 부족에 속했고 다시 이 부족은 하드하바니 (Hadhabani) 부족의 일파였다. 그런데 그 부족은 쿠르드 족의 왕조인 사다디드 (Shadadid) 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사다디드 왕조는 지금의 아르메니아 지역에 존재한 국가로 드빈 (Dvin - 현재 아르메니아의 상업 도시) 가 그 근거지였다. 그러나 1130년대는 전반적인 혼란기로써 사다디드 왕조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사히 이븐 마라완은 아이유브와 그 동생이자 훗날 누레딘의 오른팔이 되는 시르쿠 (Shirkuh) 를 데리고 가문의 근거지인 드빈을 떠나 바그다드로 정착했다.
하지만 살라딘의 가족은 다시 이라크 북부의 도시 티크리트 (Tikrit) 로 이전했다. 여기서 사히 이븐 마라완은 그 지역의 통치자이자 자신의 오랜 지인이기도 한 비흐루즈 (Bihruz) 부터 티크리트의 관리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사히 이븐 마라완이 사망하자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아들인 나즘 앗 딘 아이유브가 물려받게 되었다.
앞서 포스팅에서 이야기 한바 있지만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매우 혼란했다. 마침 1132년에는 신흥 세력인 이마드 앗 딘 장기와 칼리프 알 무스타시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이마드 앗 딘 장기가 크게 패배해서 본거지로 다급히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장기의 앞에는 티그리스 (Tigris) 강이 그의 귀국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당시 티크리트의 관리인 나즘 앗 딘 아이유브는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장기의 패잔병들이 추격을 피해 귀국할 수 있으려면 근처 있는 누군가가 배를 대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기 아이유브의 생각에는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중요한 판단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완전히 장기의 패배로 끝나게 되면 아이유브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반대로 장기가 재기에 성공한다면 - 그리고 장기가 이 은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 아이유브는 성공으로 이르는 징검다리를 손쉽게 건널 수도 있다.
결국 아이유브는 장기를 위해 배를 내주었다. 덕분에 장기는 근거지로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고 마침내 모술에서 알레포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여 근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한편 아이유브와 그의 가족들은 그 댓가를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1132년 장기가 탈출하자 본래 장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비흐루즈는 장기를 도운 아이유브 형제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136년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티크리트에서 기독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비흐루즈는 아이유브 형제를 공직에서 끌어내리고 티크리트에서 추방했다.
아마도 이 추방 사건은 1138년에 일어난 듯 한데, (1139년이라는 설도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이유브 형제가 추방되던 날 밤에 바로 아이유브의 장남인 살라딘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보통 상황이라면 득남을 했으니 온 집안에 경사가 날 법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 보니 오히려 가족들은 이 어린 아기의 장래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아이유브의 장남은 유수프 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후세에는 이 이름보다 살라흐 앗 딘 이란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다.
아무튼 아이유브 형제가 티크리트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다행히 갈 곳은 있었다. 그것은 아타베그 장기가 새로운 장기드 왕조를 개창하고 시리아와 북이라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형인 아이유브는 관리형의 인물이었으므로 발백 (Baalbak - 지금은 레바논에 속한 도시이다) 의 관리로 새로 임명되었다. 반면 시르쿠는 전형적인 군인형 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장기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1146년 장기의 죽음은 아이유브 형제에게도 큰 갈림길이었다. 형인 아이유브는 변절의 길을 택했다. 장기가 죽자 아이유브가 통치하던 발백에 다마스쿠스의 무인 앗 딘 우나르의 군대가 들이 닥쳤기 때문이다. 아이유브는 목숨과 권리를 보장받을 목적으로 항복하고 만다.
아이유브라는 인물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기회주의적 인물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사실 어느 정도 생존을 위한 지혜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변화 무쌍한 이 지역에서 하나의 군주에게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가는 그 군주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충성스럽게 그 뒤를 따르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이유브가 기회를 봐서 항복한 덕에 살라딘 역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1146년 이후 아이유브는 다시 다마스쿠스의 궁정에서 관리로 근무하게 된다. 따라서 살라딘 역시 다마스쿠스에 어린 시절을 보네게 된다.
한편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누레딘의 군대에 합류했다. 여기서 그는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곧 누레딘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가 된다. 훗날 살라딘이 아이유브의 아들보다 시르쿠의 조카로 더 잘알려지게 된 배경이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다마스쿠스에는 형인 아이유브가 그리고 다마스쿠스 밖에서는 동생인 시르쿠가 서로 반대편이 되어서 전쟁에 임하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 펼쳐지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형제간의 칼을 겨누는 비극은 1154년 누레딘이 다마스쿠스를 힘들이지 않고 - 사실상 내통에 의해서 - 정복하게 되므로써 종결된다. 그리고 이 다마스쿠스 정복이 좀더 수월하게 가능했던 것도 사실 아이유브의 배신 때문이었다. 당시 눈치가 빠른 아이유브는 대세가 누레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누레딘과 내통한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형제간의 대립도 끝나고 아이유브 역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다마스쿠스에서 누레딘의 신하로 일했다. 시르쿠의 조카이자 아이유브의 아들인 살라딘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고위층 자녀로써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훗날 살라딘이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현재 시리아의 수도이기도 한 다마스쿠스에서 살라딘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안타깝게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최고 고위층의 자녀로써 살라딘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는 분명하다. 살라딘의 전기를 쓴 알 와흐라니 (Al Wahrani) 에 의하면 살라딘은 그리스의 고전인 유클리드나 알마게스트 등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살라딘은 여러가지 군사 교육도 받았음직 하다.
비록 이렇게 살라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중세의 작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프랑스의 왕비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이기도 했던 엘레오노르가 2차 십자군 당시 살라딘과 불륜 관계를 가졌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살라딘이 10세가 조금 넘었을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사실상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다.
2. 이집트와 우트르메르의 정세
이제 살라딘의 청년 시절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보두앵 3세가 사망한 1162년 이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24세였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탄생년도인 1138년을 기준으로 해서) 이 시기 우트르메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자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인 아말릭 1세 (Amalric I) 가 국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아말릭 1세는 즉위하게 되자 태조 고드프루아 드 부용 시절 부터의 숙원사업을 이루고 싶어했다. 바로 이집트 정복이었다.
앞서 포스팅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탐욕스런 주교 다임베르트의 요구에 못이긴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을 다임베르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한 일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당시 고드프루아가 선결과제로 내세운 것은 자신이 이집트를 정복하면 예루살렘을 양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의 건국자라고 할 수 있는 보두앵 1세 역시 이집트 원정 중에 사망한 것을 보면 성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십자군들이 이집트에 꽤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이집트는 부유한데 비해 군사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앞서 설명했듯이 주변의 야심가들은 모두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다.
아말릭 역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및 성묘의 수호자라는 성스러운 자리에 오르자 선임자들 처럼 이집트의 부가 몹시 탐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십자군 국가들이 이집트를 탐낸 것은 충분히 합당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집트까지 누레딘 손에 넘어가면 그 다음에는 십자군 국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십자군들에게 이집트 침략은 한층 더 절실한 과제로 다가왔다.
그런데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당시 이집트의 정치 상황은 어서 외세가 침공하기만을 기다리는 속된 말로 막장스런 상황이었다. 본래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까지 지배하던 파티마 왕조는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어 겨우 이집트 본토만을 지키는 실정이었다. 거기에 파티마 왕조의 신성한 칼리프는 속세에서는 점차 그 권력이 약화되고 실제 권력은 점차 총리의 역활을 하던 와지르 (Vizier) 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1149년 마지막 성인 칼리프가 죽고 어린 허수아비 칼리프가 권자에 오르자 사실상 칼리프는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기에다가 1150년대 이집트는 내란에 시달린다.
그런데 1161년, 이 내란을 종식시킨 이집트의 실질적 지배자 이븐 탈라 루지크 (ibn Tala Ruzzik) 가 암살되자 다시 이집트는 혼란에 도가니에 빠지게 된다. 루지크의 사후 그의 아들이 권력을 승계했지만 곧 상이집트의 지배자인 샤와르 (Shawar) 에게 밀려나게 된다. 샤와르는 1162년 12월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가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샤와르는 곧 권력은 쟁취하기 보다 유지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불과 9개월만에 그는 휘하 장교인 디르감 (Dirgham)에게 밀려나 축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샤와르는 그냥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권토중래를 노리고 누레딘의 도움을 구하고자 했다.
사실 과거 권력 투쟁 당시에도 샤와르는 누레딘과 연합한 적이 있었다. 샤와르는 누레딘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칠 것을 제의하면서 원군을 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 누레딘 역시 이집트를 탐냈지만 이븐 탈라 루지크가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이집트 정복의 꿈을 10년간 접어야 했다. 따라서 이번이 이집트 정복의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누레딘은 다소 주저했다고 한다. 초기 팽창 정책을 우선시 할 때와는 달리 누레딘의 야심은 시간이 갈수록 차츰 감소하고 있었고 새로운 원정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 이집트에 원군을 보내는 길은 십자군 국가에 가까웠으므로 적의 기습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말릭 1세가 마침내 1163년 이집트를 침공한 것이다. 이제 누레딘에게는 이집트 문제를 방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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