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레몽과 루이7세의 사정
수많은 우여 곡절 끝에 루이 7세는 마침내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크 공국에 도착하여 푸아티에의 레몽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레몽이 이렇게 루이 7세 부부를 열렬히 환영한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루이 7세를 접견하는 푸아티에의 레몽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과거 보에몽 1세나 탕크레드 같은 초기 안티오크의 지배자들은 주변 무슬림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십자군 국가, 특히 에데사 백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안티오크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은 이들과 전혀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특히 보에몽 1세의 외교 정책을 답습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는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아마도 레몽이 비잔티움 제국에 적대적이 된 것은 요한네스 2세의 1차 우트르메르 원정이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요한네스 2세가 안티오크를 호시탐탐 노리고 - 물론 요한네스 2세 관점에선 본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일이었다 - 있었기 때문에 레몽은 비잔티움 제국과는 언젠가 싸워야 할 상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1142년, 다시 요한네스 2세는 안티오크를 돌려 받기 위해 우트르메르에 나타났다. 그러나 레몽은 물론이고 안티오크의 주요 귀족들이 모두 안티오크 반환에 반대했기 때문에 - 그들은 레몽이 상속녀인 콩스탄스의 남편 자격으로 도시를 통치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 요한네스 2세는 다음해인 1143년에 다시 안티오크를 공격하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요한네스 2세가 사냥 중 날아온 화살에 맞고 감염되어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레몽은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이제 기고 만장해진 레몽은 꺼꾸로 비잔티움 제국에 공세적으로 나왔다. 새로운 후계자 마누엘과 레몽간의 가시 돋힌 편지가 오간 것도 이 시기였다. 마누엘은 당장에 저 오만 불손한 안티오크 공작을 토벌하고 싶었지만 당장에는 자신의 제위를 튼튼히 해야 했으므로 급거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여 우선 급한 불부터 끌 수 밖에 없었다.
1144 년에 신황제 마누엘 1세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군대를 파견하여 안티오크 공국에 보복 공격을 가했고 레몽 역시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 대립할 무렵 우트르메르의 정세를 한번에 바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물론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레몽은 좌우로 비잔티움 제국과 장기 왕조라는 두 적대적 세력하에 놓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당장에 장기가 무서웠던 레몽은 과거 자기가 했던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자비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굴욕적이긴 했지만 레몽은 콘스탄티노플에 직접가서 황제의 용서를 구하고 비상시에 지원을 약속받았다. 마누엘도 당장에 안티오크를 점령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장기에게 넘어가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레몽을 용서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본다면 장기와 그의 후계자들 만큼이나 비잔티움 제국은 레몽과 그의 신하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비잔티움 제국에 의존하다 보면 언젠가 안티오크는 오랜세월 그랬던 것 처럼 다시 비잔티움 제국의 품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이런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던 레몽이기에 서유럽에서 대규모의 신규 병력이 도착하자 번쩍 눈이 떠지는 것은 당연했다. 레몽으로써는 가능하다면 루이 7세가 이 병력을 이끌고 장기의 새로운 후계자인 누레딘을 격파해주기 간절히 희망했을 것이다. 일단 누레딘을 격파하고 알레포를 점령한다면 비잔티움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여건이 다소나마 마련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루이 7세는 경건한 신자로써 성지에 온 이상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 만으로 수많은 죄에 대해서 면죄가 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 목적으로 일생에 한번 십자군이나 순례자들의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특히 루이 7세 개인적으로는 이 목적이 중요했다.
하지만 서둘러 루이 7세가 성지를 방문한다음 귀국해 버리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레몽은 루이 7세 부부를 붙잡고 가능한 알레포와 카이사레아부터 먼저 공격해 주기를 바랬다. 사실 레몽이 처한 상황을 본다면 이는 타당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루이 7세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루이 7세와 레몽이 처한 미묘한 관계는 당시에 한 루머 때문에 더 꼬이게 되었다. 그것은 레몽이 자신의 조카인 엘레오노르 왕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당대의 스캔들이라 할만 했는데, 주요 연대기 작가 중 하나인 티레의 윌리엄(기욤) 은 이를 거의 확정적 사실로 단정짓고 있다. 그에 의하면 레몽이 엘레오노르를 유혹해서 그의 남편을 배반하도록 했는데 이는 루이 7세가 사라센과의 전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그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당시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레몽으로써는 잘못해서 루이 7세 까지도 적으로 돌리게 될 경우 정말 생명이 위험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레몽이 뛰어난 정치가나 군인은 아니었지만 이런 합리적 생각도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 때문에 - 만약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 공녀 콩스탄스의 남편으로 안티오크를 통치하는 자격 자체도 엄청난 타격을 받을 뿐 아니라 당장 루이 7세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 아마도 이런 위험 천만한 사랑을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되기로는 아키텐의 풍습에 따라서 그들은 가족끼리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것 같으며 특히 엘레오노르가 어렸을 때 삼촌인 레몽이 그녀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것 같다. 여기에 아마도 레몽이 할아버지 및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에 엘레오노르가 숙부를 꽤 좋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뭐 물론 이런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면 정확한 내막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둘이 간통죄로 고발 당해 실제 죄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후세에 우리가 100%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 음 그런데 앞서 공녀 콩스탄스도 그렇고 레몽 자신이 다소 로리타 컴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필자의 망상이다)
루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아무튼 당장 레몽으로써는 바로 안티오크 공국의 옆자리 까지 돌출한 누레딘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아들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장기가 죽고 나서 알레포를 물려 받았다) 이 가장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루이 7세가 꼭 알레포를 공격해주기 희망했다.
여기에 본래 에데사 함락 이후 무슬림 세력을 공격한다면 누레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나 아니면 에데사가 첫번째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실 예루살렘 부터 간다는 루이의 계획은 뭔가 순서가 맞지 않는 셈이었다. 순례만 할거면 굳이 대군을 이끌고 십자가 참전 선언 까지 하면서 성지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루이 7세는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게 계속 예루살렘부터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기에 본래 별거중이던 엘레오노르와의 사이도 더 악화되었다. 심지어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에서 데리고 온 병력을 분리해서라도 레몽을 지원할 심산이었으나 루이 7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대신 엘레오노를 수감해서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갔다.
9. 아크레 공의회 (Council of Acre)
한편 건강 악화로 콘스탄티노플로 후송되었던 콘라트 3세는 더 독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평소 마누엘 1세는 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 이 서방의 귀한 손님을 상대로 임상 실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콘라트 3세가 호전되자 이 둘의 관계는 급속히 좋아졌다. 콘라트 3세는 어느정도 건강을 회복하게 되자 이제 다시 성전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콘라트 3세는 이번에는 안전한 해로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으로 향했다. 덕분에 콘라트 3세는 오히려 루이 7세보다 더 빨리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 왕비를 강제로 끌고 1148년 5월에 그토록 원하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여유를 즐기던 -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한 - 루이 7세는 이제 보두앵 3세, 콘라트 3세와 더불어 향후 대 무슬림 전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국왕들과 주교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전체 십자군 회담을 아크레에서 열기로 한다.
(중세의 그림답게 대충 그려서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위에는 루이 7세, 콘라트 3세, 보두앵 3세가 서로 회의를 하는 모습이고 아래 그림은 아마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는 그림이다. 사실 콘라트 3세는 나이가 많고 루이 7세와 보두앵 3세는 젊기 때문에 위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 아크레 공의회는 1148년 6월 24일 열렸다. 여기서 우선 십자군의 주 공격 목표가 어디가 되야 하는지가 논의 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우트르메르에 대한 공세를 거의 중단한 상태로써 당장에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반면 장기의 사망후 알레포를 물려 받은 누레딘은 성전을 주장하면서 장기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다마스쿠스는 장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장기의 아들인 누레딘을 조심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공격 목표는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당시 레몽 뿐 아니라 대다수가 생각하기에 누레딘이 십자군 국가에 가장 큰 위협 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앞으로의 역사를 생각할 때 매우 타당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현재 누레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그럴 듯 했다. 특히 안티오크의 레몽이 이 의견을 지지했다.
한편 자신의 영지인 에데사에서 밀려난 조슬랭 2세는 에데사를 공격하기 희망했다. 이는 2차 십자군의 본래 원인이 에데사 함락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상당히 당위성이 있었다. 또 에데사 역시 누레딘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누레딘을 목표로 공격한다면 에데사 역시 좋은 타겟이 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다른 후보가 있다면 바로 그 때까지도 이집트에 영토였던 항구 도시 아스칼론이었다. 이 도시는 예루살렘 왕국의 목에 걸린 가시 처럼 왕국의 해안가에 있으면서 강력한 해군을 지닌 이집트로 하여금 언제든지 필요하면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할 수 있게 해주는 교두보였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점령해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스칼론의 경우 보두앵 3세가 우선 반대했다. 당시 보두앵 3세는 18세로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왔다. 비록 아크레 공의회에는 어머니 멜리장드와 같이 참가하긴 했지만 그는 왕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했다. 보두앵 3세가 아스칼론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동생이자 어머니 멜리장드로 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자파 백작 (Count of Jaffa) 알마릭 (Almaric) 의 영지가 아스칼론에서 가깝기 때문에 만약 아스칼론이 함락되면 알마릭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아스칼론은 당장에 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최우선 목표에서 배제하더라도 사실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알레포냐 아니면 에데사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회의가 끝날 무렵 공격 목표로 정해진 것은 정말 엉뚱하게도 다마스쿠스 였다.
이 결정은 아마 십자군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마스쿠는 누레딘의 선대인 장기 때부터 장기드 왕조 (Zengid dynasty) 와는 적대 관계였으므로 - 물론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과 누레딘 양측에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 오히려 대 누레딘 전투에 있어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무슬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함에 따라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바로 알레포의 지배자 누레딘 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마스쿠스와 십자군 양쪽으로의 협공을 받아서 누레딘이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능성 도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 다마스쿠스가 중립을 지켜도 자신의 영토인 알레포나 에데사를 공격한다면 역시 누레딘이 어려움에 처하기는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크레 공의회에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누레딘에게는 알라의 도우심으로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일이었다. 십자군 덕분에 다마스쿠스는 누레딘과 함께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다마스쿠스가 목표로 결정되었을까 ?
여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보두앵 3세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 희망했던 것 같다. 알레포나 에데사가 함락된다면 안티오크 공국이나 에데사 백작령에 영토가 돌아가겠지만 위치상으로 볼 때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 왕국에 넘어올 확률이 높다. 여기에 다마스쿠는 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일 뿐 아니라 - 지금도 시리아의 수도이고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다 - 기독교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를 공격하는 일은 보두앵 3세는 물론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이점을 생각해보면 루이 7세나 콘라트 3세 모두 보두앵 3세 보다 나이가 많고, 특히 콘라트 3세는 연륜이 꽤 되는 되도 현지 사정에 어두운 탓에 보두앵 3세의 어리석은 계획에 찬성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에 댓가를 치르게 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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