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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4





 7. 다시 이집트로 


 1164년, 살라딘과 시르쿠는 별 소득없이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귀국했다. 일단 무사히 귀국한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상황이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십자군의 2차 이집트 침공 결과 결국 이집트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켜냈으므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1164년 이후의 상황은 다소 미묘하게 이전과는 달랐다. 우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말릭 1세는 다소 다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대규모 병력을 상실한데다, 십자군 국가의 지도층 자체에 큰 손실이 생겨 당분간 아말릭 1세는 누레딘의 공세를 막기 위해 절치 부심했다.


 한편 시르쿠는 물론 누레딘 역시 자신들을 배신한 샤와르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살라딘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자신의 숙부 및 주군과 별 차이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샤와르를 권좌에 올려주기 위해 싸웠지만 - 물론 표면적인 이유였다 - 결국 샤와르에 배신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살라딘 역시 복수를 희망할 법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장래가 촉망받는 20대 군인인 살라딘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다음 이집트 원정길은 빠질 수 없는 전쟁이었다. 과연 시르쿠는 누레딘의 지지를 받아 복수를 위해 군대를 재조직했으며 당연히 살라딘도 다시 시르쿠의 수하 장수로 이 복수전에 참전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시 아말릭 1세와 샤와르는 사이가 좋아졌다. 솔직히 샤와르라는 인물은 아말릭 1세 입장에서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상황은 상호 신뢰나 신사 협정 따위에 기대할 문제가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면 샤와르 다음으로 가장 곤란한 건 역시 십자군 국가들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이는 상황이 되면 그나마 60년 이상 존속해온 십자군 국가의 안위가 매우 위태로워 질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해서 - 이 경우 당연히 종교적 명분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 시아파 이슬람 국가와 라틴계 (동서 교회 분열 후 서방측을 뜻함) 기독교 국가가 서로 힘을 합쳐 성전 (지하드) 의 선봉임을 자처하는 누레딘과 맞서게 된 것이다.


 1166 년 하반기에 이르러 이제 시르쿠가 - 물론 살라딘도 같이 움직였다 -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재차 공격하리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들은 다시 한번 남쪽 루트를 우회하여 육로로 이집트를 침공할 것이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된 아말릭 1세 역시 바빠졌다. 비록 누레딘이 배후에서 공격하는게 다시금 우려되긴 했지만 이집트가 누레딘 손에 넘어가면 어차피 십자군 국가를 방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말릭 1세는 병력을 다시 파견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십자군의 3차 이집트 침공이다. (3rd Crusader invasion of Egypt - 사실 샤와르의 요청을 받고 갔으니 침공 보다는 파병으로 번역하는게 맞긴 하지만 1,2,4차와의 통일성을 위해 침공으로 번역한다)

(왠지 뻘글 같긴 하지만 이 때 아말릭 1세의 결정은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상대가 여기저기 멀티 뛰는 걸 보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면 어차피 지기 때문에 그 전에 멀티를 못먹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내 본진 들어와 빈집 털 수도 있지만 어차피 기다리면 지는 건 마찬가지다.)




(십자군의 이집트 3차 침공. 십자군과 시리아군이 동시에 이집트로 출정했다.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5 Generic license. You are free to share & remix, but you must attribute the work in the manner specified by the author or licensor.   Author :  Amonixinator)



 출발은 시르쿠가 먼저였다. 누레딘은 원정에 앞서 바그다드의 칼리프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사실 이단 시아파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었으므로 수니파 칼리프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시르쿠와 살라딘은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을 우회하여 사막을 횡단했다.


 사막에서 모래 폭풍에 길을 잃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도 했지만 일단 시르쿠의 군대는 십자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다시 한번 이집트 본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말릭 1세의 군대가 먼저 당도해 있었다. 사실 시르쿠의 군대가 빨리 움직인 만큼 먼저 도달했다면 십자군과 이집트 군이 합치기 전에 각개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늦게나마 시르쿠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말릭 1세는 서두른 덕에 이들보다 앞서 이집트에 도달했다. 그것은 십자군이 시리아군과는 달리 해로로 이집트에 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로써 십자군 - 이집트 연합군은 숫적인 우세와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8. 알 바베인 전투 (Battle of al - Babein   1167년 3월 18일)


 1167년 초의 상황은 아말릭 1세와 샤와르에 웃어주는 듯 했다. 시르쿠와 살라딘이 이끄는 시리아군은 전광석회 처럼 이집트로 들어왔지만 아말릭 1세가 너무 늦지 않게 카이로로 입성함에 따라 결국 나일 강을 향한 경주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에 실패하므로써 결국 십자군 - 이집트 연합군이 유리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르쿠도 누레딘 밑에서 산전 수전 다겪은 역전의 장군이었다. 조금 유리하다고 아말릭 1세나 샤와르가 쉽게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시르쿠는 일단 신출귀몰한 우회 기동으로 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이로에서 십자군 - 이집트 연합군이 시르쿠의 본대의 행방을 궁금해 하던 중 마침내 기자
(Giza)의 대피라밋 밖에서 시리아 군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말릭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했고 시리아 군은 즉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실 도망치는 기만 전술이야 말로 기병 위주로 된 투르크 족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에 익숙한 십자군은 항상 이런 기만 전술에 속지는 않았지만 불행히 아말릭 1세는 이 전술에 넘어갔다. 


 연합군이 적을 거의 따라잡았을 때 쯤 마침내 나일강 주변의 경작지가 끝나고 사막이 시작되는 언덕에서 시리아 군은 반전해서 공격으로 전환했다. 이곳은 모래로된 급경사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유럽 군대인 십자군은 싸우기 불리한 반면 사막에서 적응된 시리아군은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 알 바베인 전투에서 십자군의 본대는 기사와 기마 궁사를 앞세워 중심부로 돌격했다. 시리아 군의 중앙은 살라딘이 맡았는데 그는 십자군을 만나자 서서히 뒤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시르쿠의 전술이었다. 적의 주력을 중심부로 끌어들인 후 포위 섬멸하는 것이 시르쿠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말릭 1세의 협조를 얻어 이 계획은 성공했다. 


 살라딘이 지휘하는 시리아 군의 중앙이 뒤로 물러나는 대신 좌우 양익의 시리아 군은 적의 배후를 차단 포위하므로써 마침내 적의 주력을 포위했다. 시리아 군에 유리한 사막지형에서 포위된 십자군과 이집트군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크게 패배했지만 아말릭 1세와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간신히 혈로를 뚫어 카이로로 퇴각할 수 있었다. 


 알 바베인 전투의 결과는 시리아 군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아직 샤와르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에는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의 주요 도시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잘 방어되고 있었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시리아 군이 장기간 적국에서 장기전에 돌입했다가는 1164년에 그랬던 것 처럼 결국 무사히 퇴각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알 바베인 전투의 승리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여세를 몰아 샤와르의 본거지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해야만 했다. 이에 시르쿠는 군대를 북진시켜 한때 로마 제국에서 로마 다음으로 거대했던 도시이자 저 알렉산더 대왕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했다. 


 알렉산드리아 포위전은 사실상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투였다. 



 9. 살라딘의 용기 - 알렉산드리아 전투 


 본래 알렉산더 대왕이 알렉산드리아 - 물론 이런 이름의 도시를 몇개 더 새우긴 했지만 보통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 세운후 이 도시는 대왕의 부하 장군이 세운 Ptolemaic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사실 이집트에 존재하는 도시이지만 도시의 인구와 지배 계층은 대개 그리스인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른 문화를 지닌 도시였다. 이와 같은 이질성은 로마제국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살라딘이 이집트 전쟁에 참전할 당시에도 이 도시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있는 카이로와는 달랐다. 카이로에는 시아파 칼리프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자체는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였다. 따라서 수니파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시아파인 샤와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샤와르 자체가 인기없는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그런데 마침 수니파인 시리아 군이 당도하자 이들은 해방자를 맞이한 듯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시르쿠를 열렬히 환영했을 뿐 아니라 성문까지 열어주었다. 카이로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디르감이 당한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샤와르는 빨리 군대를 이끌로 알렉산드리아를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샤와르로써는 그렇다고 알렉산드리아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말릭 1세의 군대와 다시 합쳐서 병력을 재편하여 다시 한번 시리아 군을 공격하고자 했다. 본래 십자군 - 이집트 연합군의 병력이 시르쿠의 군대 보다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곧 규모 면에서 시리아 군을 능가했다. 


 시르쿠는 1164년 처럼 포위되는 상황을 피하고 이집트의 다른 주요 도시이자 이단 시아파 칼리프가 있는 도시인 카이로를 점령하기 위해 살라딘에게 약간의 병력을 맡기고 도시를 빠져나왔다. 본래 계획은 살라딘이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인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과 협력해 도시를 방어하면 그 사이 시르쿠가 카이로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한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르쿠도 카이로를 점령하거나 혹은 포위군을 공격하거나 하는 일 어느 것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한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말릭 1세와 샤와르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었다. 


 살라딘과 소수의 수비군에게는 힘든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살라딘은 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알렉산드리아를 계속 적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지켜냈다. 하지만 다수의 적에 계속 포위되면 결과가 어찌될 지는 결국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곤란하기로 따지면 전쟁이 지속되어 국토가 피폐해지는 샤와르는 물론 오랜 국왕의 부재로 인해 국가 안위가 걱정되는 아말릭 1세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협상을 벌여 이 교착상태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다시 한번 이집트에서 시리아 군과 십자군이 모두 철군하고 샤와르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협상동안 살라딘은 십자군 진지에서 머물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적수들에게 그 모습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의 정중함과 예의바른 모습에 십자군도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훗날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느낀 첫인상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살라딘은 그의 적에게도 적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호의와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1167년의 이집트 전쟁은 결국 1164년처럼 양측에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미 이집트 정부는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약해져 있었으므로 곧 이집트 전체가 정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문제는 과연 누가 정복하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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