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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예루살렘 왕국 12 (1101 - 1145)



 
26. 장기 (Imad ad-Din Atabeg Zengi) 



 11 - 12세기에 이슬람 세계, 특히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극도의 혼란을 겪었던 일은 새로운 영토를 노리던 십자군 국가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십자군들에게 좋은 일만 생길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부터 설명할 이마드 앗 딘 장기 (Imad ad-Din Atabeg Zengi  1085 - 1146) 는 셀주크 투르크의 새로운 지배자로 십자군을 향한 성전 (지하드)를 최초로 정력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록 장기가 십자군과만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장기부터 시작되어 누레딘과 살라딘으로 이어진 새로운 무슬림 지배자들은 결국 십자군 국가들을 압박하여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만든다.



 이미드 앗 딘 장기는 말리크 샤 1세의 여러 부하들 중 하나였던 아크 순크르 알 하지브 (Aq Sunqur Al Hajib) 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크 순크르 알 하지브는 알레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는데 말리크 샤 1세가 죽은 후 그 역시 1094년에 9살난 아들을 남기고 사망했다. 이 당시 장기를 거둔 것은 바로 모술의 새로운 지배자 카르부카였다. (그가 이전 1차 십자군에서 안티오크 전투에서 설명한 바로 그 카르부카 이다)


 이미드 앗 딘 은 '이슬람의 기둥'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한 장기는 곧 여러 전투에서 아버지의 가신들을 데리고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비록 그의 후원자였던 카르부카가 곧 몰락하긴 했지만 셀주크 제국의 대분열상과 거듭되는 내전은 오히려 장기를 더 강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록 후세에는 십자군과의 성전으로 유명해진 장기이지만 그의 출세는 이슬람 내의 갈등과 분쟁 속에서 가능했다. 최초의 기회는 바로 이전의 셀주크 술탄이었던 무함마드 1세 (Muhammad I -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바르키야루크를 물리치고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의 아들인 마흐무드 2세 (Mahmud II) 가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하면서 찾아왔다. (1118년)


 (공교롭게도 1118년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와 비잔티움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 그리고 교황 파스칼 2세가 모두 사망했으며 역시 이슬람 세계에서도 칼리프와 술탄이 모두 사망해여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었다)


 바그다드의 새로운 칼리프인 알 무스타시드 (Al Mustarshid) 는 선대의 칼리프와는 달리 허수아비에 불과한 상태로 전락한 칼리프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 말은 현재 권력을 장악한 셀주크 술탄을 제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술탄 마흐무드 2세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했으므로 이는 칼리프 측에는 결정적인 기회로 생각됐다. 결국 양측에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전쟁에서 장기는 술탄 마흐무드 2세 편에 서서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술탄은 장기를 1127년 모술, 1128년에는 알레포의 지배자로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새로운 무슬림 지배자 장기는 에데사 백작령 및 안티오크 공작령과 마주보는 위치에 자신의 반독립 국가를 가지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들에게는 다행히도 장기는 보에몽 2세의 패배와 보두앵 2세의 죽음, 그리고 이후의 풀크왕의 무능으로 혼란에 빠진 십자군 국가를 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무슬림 국가들 사이의 분쟁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1131년, 젊은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승하했다. 이 일은 설욕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칼리프에게 신의 계시와도 같았을 것이다. 다시 자기편을 규합해서 복수를 노리는 칼리프는 당연히 장기에게는 큰 위협이었으므로 일단 장기 역시 병력을 모아 칼리프 알 무스타시드와의 일전을 벌였다.


 1132 년 티그리스 강의 티그리트 (Tikrit)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장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나마 그가 이곳에서 알레포와 모술로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은 쿠르드 족 출신의 티그리트 총독 나즘 앗 딘 아이유브 (Najm ad-Din Ayyub) 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물론 장기는 아이유브 - 영어로는 욥 - 이라는 이름의 사내를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나즘 앗 딘 아이유브가 우리에게 살라딘 이라고 알려진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의 아버지 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는 살라딘이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결국 이 일을 시작으로 해서 미래의 살라딘은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고 십자군 국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살라딘은 앞으로 가장 이 연재 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예정이지만 지금은 일단 이정도만 말하고 넘어가려 한다.


 아무튼 장기는 한번의 패배로 몰락하진 않았다. 다음해인 1133년에는 이제 칼리프 쪽에서 장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칼리프의 모술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해에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한 마흐무드 2세의 동생 마수드 (Ma'sud) 는 칼리프의 패배를 기회로 알 무스타시드를 공격하여 1135년에는 칼리프를 사로잡고 무참히 살해했다. 비슷한 시기 십자군 국가에서 위그 백작을 중심으로한 왕비파와 풀크 국왕파가 서로 맞섰던 것처럼 무슬림들도 자기끼리 피흘리며 싸우기 바빴던 것이다.


 이렇게 한숨을 돌린 장기는 새로운 십자군 국가들에 빼앗긴 시리아 영토를 회복하면서 이들을 위협하는 한편 시리아를 자신의 통제아래 두기 위해 지금도 시리아의 수도이자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이전부터도 장기는 다마스쿠스를 자신의 통제아래 두고자 시도한 바가 있었고 다마스쿠스 역시 장기를 매우 싫어했는데, 1135년에는 매우 독특한 제안이 다마스쿠스의 지배자인 이스마일 (Ismail) 로 부터 나왔다.



 이스마일은 뷰리드 왕조의 창시자인 투크타킨의 손자이고 선대의 에미르인 부리 (Buri) 의 아들인데 자신의 백성들에게 지독히도 인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반역 가능성 때문에 끊임없이 숙청을 단행한 덕분에 이제 실제로 수많은 적들을 양산해서 진짜 반역의 위협에 직면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차라리 장기에게 다마스쿠스를 넘기는 대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다마스쿠스의 백성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였다. 따라서 이제 이스마일은 진짜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솔직히 이스마일이 좀 더 현명했더라면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마일이 좀 더 현명했더라도 결코 미리 알 수 없었던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인 주무루드 (Zumurrud) 가 반역에 동참하여 아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주무루드는 다른 아들인 사히브 앗 딘 마흐무드 (Sahib ad-Din Mahmud) 를 에미르의 지위로 올리고 도시를 접수하기 위해 나타난 장기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이끈 것은 노련한 무장인 무인 앗 딘 우나르 (Mu'in ad - Din Unar) 였다. 결국 장기는 다마스쿠스 점령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장기의 주된 적은 십자군이 아니라 같은 무슬림 군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장기가 십자군의 위협이 된 첫번째 무슬림 군주로 생각되는 것일까 ? 그 이유는 서로 분열된 시리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무슬림의 분열로 이득을 보던 십자군 국가들의 유리함을 없앴을 뿐 아니라 1137년 이후로는 예루살렘 왕국에 큰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1137년에 다시 장기는 홈스 (Hims) 를 공격했다. 우나르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장기의 지속되는 공격에 십자군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도움을 요청했다. 예루살렘에서 풀크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자 장기는 칼끝을 풀크왕에게로 돌렸다. 인근의 십자군 요새인 바린을 포위한 장기는 다가오는 예루살렘 군대와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장기의 대승이었다.


 사실 풀크왕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결혼을 잘해서이지 특별히 뛰어난 무용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에 국왕 본인이 몰고온 내부 갈등 덕분에 힘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으므로 풀크 왕은 너무 쉽게 대패했을 뿐아니라 포위당한 상태에서 영토를 양보하고 퇴각했으므로 다시 그 권위는 더 떨어지게 되었다. 아무튼 십자군 국가 옆까지 영토를 확장한 장기는 이로써 십자군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다음해인 1138년에 장기는 다마스쿠스와 십자군 국가들에 더 강력한 압박을 가하려고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트르메르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 돌아온 것이다.  





 27.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 (John II Komnenos or Comnenus  그리스어  Ί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Iōannēs II Komnēnos)



 사실 이 지역에 비잔티움 황제가 다시 돌아온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래 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 국가들이 서로 다투고 있던 그 영토는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였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을 꿈꾸는 콤네누스 왕조의 2번째 황제인 요한네스 2세가 그 영토의 수복을 노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실 새 황제는 즉위하자 마자 아시아 원정을 준비했다.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의 모자이크 초상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러나 요한네스 2세가 즉위한 1118년 이후의 비잔티움 제국의 사정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누나인 안나 콤네나가 연루된 반란 사건이 있었고, 북방에서는 페네체그 족이 다시 침공했다. 그 후엔 헝가리와 베네치아와도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따라서 요한네스 2세의 아시아 원정 계획은 1130년대 이후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주변 상황이 정리되자 요한네스 2세는 자신의 숙원사업이던 아시아 방면의 제국의 옛 영토에 대한 원정을 재개했다.


 요한네스 2세는 아버지인 알렉시우스 1세 처럼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전투를 벌였다. 1130년대의 아나톨리아 지역의 정세는 1차 십자군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룸 술탄국이 점차 위축되고 다니슈멘드 왕조가 발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새로운 지배자인 에미르 가지는 1130년에 보에몽 2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방부 처리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선물로 바치면서 승승장구 했다.


 요한네스 2세는 1130년에서 1135년까지 적어도 5차례 이상 다니슈멘드와 전쟁을 벌였다. 특히 1133년에는 다니슈멘드와의 전쟁에서 매우 큰 승리를 이끌어 내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랫만에 황제가 참가하는 개선식이 열릴 정도였다. 여기에 이듭해에는 에미르 가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네스 2세의 군사적 성공은 더욱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황제는 1135년에는 지금의 터키의 앙카라에서 북동쪽으로 140km 까지 떨어진 강그라 (Gangra) 까지 점령했다. 비록 모두 수복한 것은 아니지만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잃었던 많은 영토가 다시 비잔티움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요한네스 2세 의 치세인 1143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알렉시우스 1세의 시대에 비해서 아나톨리아 내부의 영토를 상당 부분 수복했다.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Bigdaddy1204 )



  마침내 1137년이 되자 요한네스 2 세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진격했다. 그것은 과거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 많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는 터키 남부의 실리시아와 이전부터 다시 수복하기를 염원해왔던 제국의 전 동방수도인 안티오크였다.


 일단 황제는 앞에서 설명했던 실리시아의 군주 레오 1세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레오 1세는 주요 도시를 넘겨주고 실리시아의 산악 지대 깊숙이로 도망치는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황제는 곧장 안티오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오랫동안 안티오크의 노르만 지배자들이 우려했던 일이 1137년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당시 안티오크 공국의 지배자 자리는 푸아티에의 레몽 (Raymond of Poitier  1115 - 1149) 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1차 십자군에서 설명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아들로 본래는 유럽에 있던 그가 갑자기 안티오크 공작이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앞서 설명했듯이 보에몽 2세의 미망인인 앨리스는 아버지에 의해 라타키아에 유폐된 후 보에몽 2세의 유일한 자식인 공녀 (公女) 콩스탄스를 데리고 다시 안티오크로 복귀하려 했었다. 앨리스는 미래이 비잔티움 황제인 마누엘과 딸인 콩스탄스를 결혼시켜 다시 복귀를 노렸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을 좋아하지 않는 십자군 국가에서 이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풀크 국왕은 콩스탄스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래서 푸아티에의 레몽을 점찍었던 것이다. 그러나 1136년에 안티오크에 레몽이 도착하자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앨리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총대주교의 기지였다. 총대주교가 앨리스에게 사실 레몽이 앨리스에게 청혼하려 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직 젊은 과부인 앨리스 역시 이 제안에 즉시 찬성하고 레몽이 청혼하려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몽이 아직 10살도 안된 콩스탄스와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략 결혼이지만 이건 좀...  참고로 레몽은 22세, 콩스탄스는 9세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앨리스는 크게 낙담하여 라타키아로 귀향했고 곧 거기서 죽었다.


 비록 그녀에게 위안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평소에 그녀에게 모욕을 가했던 안티오크의 주민들과 푸아티에의 레몽은 1137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공격을 받자 곧 자신들이 했던 일을 후회했다. 만약 그냥 콩스탄스를 비잔티움 제국에 시집보냈으면 제국에 공격을 받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거대한 군대가 이교도인 자신을 공격할 까봐 긴장했던 장기는 그 기독교도들의 군대가 같은 기독교도 국가인 안티오크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런 안심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결국 푸아티에의 레몽은 완전히 백기를 들고 요한네스 2세에게 항복했다. 문제는 레몽이 항복하고 안티오크를 다시 제국에 반환하는 댓가로 새로운 봉토를 받고 제국의 가신이 되기로 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봉토는 알레포, 사이자르, 에메사 (홈스), 하마 였는데 이곳은 당시엔 모두 무슬림의 수중에 있는 - 특히 알레포 등지는 장기의 근거지였다 - 상태였다. 따라서 이 말은 장기의 영토를 점령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단 1137년 9월 안티오크를 넘겨받은 황제는 계절적으로 전쟁을 지속하기엔 좋지 않음을 깨닫고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남은 기간동안 실리시아의 레오 1세의 잔당을 소탕한 다음 이들을 모두 붙잡아 콘스탄티노플에 의기 양양하게 귀환했다. 물론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십자군 가신들과 더불어 장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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