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군 전쟁사 - 예루살렘 왕국 9 (1101 - 1145)






 20. 기사단과 베네치아의 등장


 보두앵 2세 치세에 예루살렘 왕국은 시련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대한 정복 정책을 펼친 선대 보두앵 1세를 이어 보두앵 2세 시기에는 대규모 팽창 정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몇가지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번째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기사단의 성전 참여이다. 솔직히 기사단 자체의 기원은 꽤 오래된 조직이다. 예를 들면 십자군 국가에서 주요 기사단 중 하나인 구호 기사단 (Knights Hospitaller = Sovereign Military Hospitaller Order of St. John of Jerusalem of Rhodes and of Malta, Order of St. John, Knights of Malta, and Chevaliers of Malta. 다른 말로 병원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은 그 기원이 600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아봇 프로브스 (Abbot Probus) 에게 명하여 성지 순례자들을 치료 하기 위해 성지에 설립한 병원에서 비롯되었다.


 이 병원은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말피와 살레르노의 상인들에 의해 1023년에는 세례자 성 요한의 무덤위에 재건되었고, 성 베네딕토 회 수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실 이런 병원이 성 베네딕토회에 의해 성지에서 운영된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 교가 박해 받았기 때문에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구호 기사단은 1099년 1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극적인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병원 사업도 유지하면서 군사 집단화 한 것이다. 이들은 특히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전투 집단으로 십자군의 관점에서 보면 용맹한 기사들이지만 무슬림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잔인하고 광신적인 이교도 전사로 생각되었다. 훗날 관용의 군주로 수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자비를 배푼 살라딘도 이들에 대해서만은 모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1291년 아크레 공방전에서 싸우는 구호 기사단  
The Siege of Acre. The Hospitalier Master Mathieu de Clermont defending the walls in 1291.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구호 기사단의 후예인 몰타 기사단의 깃발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public domain by its author, Zscout370 at the English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


 이들보다 훨씬 이후에 설립되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군사 집단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곧 구호 기사단과 더불어 양대 십자군 기사단으로 거듭난 기사단은 바로 성전 기사단이다. (성전 기사단 = Knights Templar 본래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다. Poor Fellow-Soldier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라틴어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



 성전 기사단이 설립된 것은 1119년 프랑스의 귀족인 위그 드 파앵 (Hugues de Payens ) 에 의해서라고 한다. 설립 목적은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보두앵 2세는 혼쾌히 이에 동의하고 과거 예루살렘 대학살의 현장이기도 한 성전산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본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 알 아크사 모스크는 솔로몬 성전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란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Barbara Kabel )


(성전 기사단의 깃발은 구호 기사단과 반대로 보통 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 였다. 다만 배경은 여러가지 도안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가지 예이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Lexicon  )


 가난한 기사들이라는 명칭에 맞지 않게 성전 기사단은 기부로 많은 토지를 획득했으며 부동산 뿐 아니라 금융업에도 적극 투자하여 곧 가장 부유한 기사단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재테크에 성공할 수 있던 비결은 바로 십자군 원정과 성지 수호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립자인 위그 드 파앵은 이를 위해 1128년 교황으로 부터 인가를 받아 성전 기사단을 정식 기사 수도회로 승격시켰다. 당시 유럽에는 어떻게든 성지 수호라는 성스러운 과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 거액의 기부금을 모으는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직접 가기는 어려워도 기부라면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 기부금으로 성전 기사단은 곧 큰 부자가 되었다.


 1138년에 이르면 성전 기사단은 교황 이노첸시오 2세로 부터 자유로운 국경 출입, 과세 금지, 교황을 제외한 군주나 주교에 대한 복종 의무 해제등의 엄청난 특권을 받아 점차 십자군 국가내 반독립 세력화 하게 된다. 사실 이들 기사단은 점차 가까이 있는 예루살렘 국왕 대신 멀리 떨어진 교황의 지시만 받겠다고 주장하는 데 한마디로 사실상 반독립 세력화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점은 구호 기사단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기사단의 등장으로 일단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십자군 국가들은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된다. 물론 이들이 항상 예루살렘 국왕의 명령에 복종한 것도 아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골치아픈 존재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편 기사단 말고도 우트르메르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또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이었다. 사실 1차 십자군 부터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 주요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은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신념에 개별 상인들이 참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들도 상인인 만큼 꽁짜 장사는 없었다. 뭔가 투자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결국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베네치아 였다. 사실 십자군과 베네치아 하면 4차 십자군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베네치아와 십자군의 애증의 관계는 이비 보두앵 1세 시절 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보두앵 2세 시절에 베네치아는 예루살렘 왕국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것은 1123년에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혔을 때 이야기다. 예루살렘 왕국의 지도부가 비어 있는 이 시기는 호시탐탐 왕국을 노리는 이웃 국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다. 특히 이집트는 오랜 숙원 사업을 이루고자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해 들어왔다.


 그 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Dodge : 원수) 인 도미니코 미첼레 (Domenico Michele) 는 대규모의 베네치아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 이집트 해군을 격퇴시키므로써 왕국 방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도제는 성지를 순례한 후 티레 함락에 까지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꽁짜 점심은 없는 법.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제 베네치아 공화국의 속셈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는 팍툼 바르문디 (Pactum Warmundi) 라고 알려진 협정이 맺어지게 되는데, 그 골자는 이러했다.


 1. 예루살렘시를 제외한 모든 예루살렘 왕국의 도시에서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만의 거리, 광장, 욕실, 시장, 목재소, 교회에다 심지어 오븐까지 가진다. (한마디로 베네치아인들은 왕국에서 자치하겠다)

 2. 베네치아는 아크레의 1/4과 앞으로 점령될 티레의 1/3 및 그 주변 지역의 1/3을 가진다.

 3. 면세 특권을 허용한다. 다만 순례자들을 실어 나를 경우 세금을 부과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예루살렘 국왕 몫은 1/3 이다.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어려운 사정에 처한 예루살렘 왕국을 도우러 나타난 건 어려운 틈을 타 자신들의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정이 급한 예루살렘 왕국을 이를 거절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여기에 합의하게 된다. 나중에 풀려난 보두앵 2세 역시 이를 승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쉬울 때 베네치아 인들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두앵 2세의 치세 기간 중 그가 모두 이런 식으로 외부적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닌 것 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의 치세기간인 1120년에는 나블루스 공의회 (Council of Nablus) 가 열려서 왕국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나름대로 왕국의 기틀을 잡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잦은 전쟁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보두앵 2세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21. 보두앵 2세의 후계자  



 보두앵 2세는 사실 1차 십자군 부터 활약한 인물이다. 정확한 탄생 년도는 잘 모르지만 1125년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못해도 50-60대 정도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자식복이 없던 보두앵 1세 처럼 보두앵 2세에게도 아들이 없었다. 다만 딸은 네명이나 있었다.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여왕의 존재가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두앵 2세는 큰 딸인 멜리장드 (Melisende) 의 배필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가능하다면 유럽의 강력한 군주와 자신의 장녀인 멜리장드 공주를 결혼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국왕은 프랑스의 앙주 백작인 풀크 5세 (Fulk V) 를 그 배필로 지목했다.


 풀크 5세는 1120년에 이미 십자군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성전 기사단의 가까운 친구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의 강력한 군주였다. 이는 군사적으로 항상 위협에 처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로서 아주 중요한 자질 이었다. 결국 그는 1129년에 멜리장드와 결혼하게 된다.


(풀크와 멜리장드의 결혼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한편 보두앵 2세는 자신이 죽기 전 다른 딸들도 시집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둘째 딸 앨리스 (Alice) 는 1126년 성인이 되어 안티오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보에몽 1세의 아들 보에몽 2세에게 시집 보냈다. 따라서 앨리스는 안티오크 공작 부인 (Princess of Antioch) 가 되었고, 안티오크 공국과 보두앵 2세는 혈연으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셋째 딸인 호디에르나 (Hodierna) 는 결국 아버지가 죽은 후 결혼했다. 그녀는 1137년 트리폴리의 퐁스 백작의 아들인 레몽 2세와 결혼했는데, 하필이면 퐁스가 그해 사망했으므로 바로 트리폴리 백작 부인 (Countess of Tripoli) 가 되었다. 아무튼 트리폴리와도 혈연으로 동맹을 맺은 셈이다.


  다만 제일 어린 막내 이오베타 (Ioveta) 의 경우 수녀의 길을 걸어 결국 언니인 멜리장드 왕비의 도움을 받아 대수녀원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무튼 4명의 딸 중 3명은 제법 시집을 잘간 셈이고, 나머지 하나는 대수녀원장이 되었으며, 장녀인 멜리장드는 풀크와 더불어 공동 즉위했으니 일단 아버지로써 보두앵 2세는 성공한 셈이었다. 이정도면 아들이 없어도 별로 아쉬울게 없지 않을 까 ? 


 그러나 보두앵 2세는 편히 누워서 임종을 맞이할 팔자는 아니었다. 평생 전쟁에 시달린 그 답게 마지막 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R 스튜디오 설치 및 업데이트

 R을 설치한 후 기본으로 제공되는 R 콘솔창에서 코드를 입력해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R 개발환경인 R 스튜디오가 널리 사용됩니다. 오픈 소스 무료 버전의 R 스튜디오는 누구나 설치가 가능하며 편리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R을 위한 IDE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어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습니다.    https://www.rstudio.com/  다운로드 R 이나 혹은 Powerful IDE for R로 들어가 일반 사용자 버전을 받습니다. 오픈 소스 버전과 상업용 버전, 그리고 데스크탑 버전과 서버 버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오픈 소스 버전에 데스크탑 버전을 다운로드 받습니다. 상업 버전의 경우 데스크탑 버전의 경우 년간 995달러, 서버 버전은 9995달러를 받고 여러 가지 기술 지원 및 자문을 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데스크탑 버전을 설치하는 과정은 매우 쉽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스톨은 윈도우, 맥, 리눅스 (우분투/페도라)에 따라 설치 파일이 나뉘지만 설치가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라면 R은 사전에 반드시 따로 설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R 스튜디오만 단독 설치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죠.   설치된 R 스튜디오는 자동으로 업데이틀 체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업데이트를 위해서는 R 스튜디오에서 Help 로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업데이트 할 내용이 없다면 최신 버전이라고 알려줄 것이고 업데이트가 있다면 업데이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R의 업데이트와 R 스튜디오의 업데이트는 모두 개별적이며 앞서 설명했듯이 R 업데이트는 사실 기존 버전과 병행해서 새로운 버전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입니다. R 스튜디오는 실제로 업데이트가 이뤄지기 때문에 구버전을 지워줄 필요는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