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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9



 20. 1174년의 정세


 사실 살라딘은 훗날 이집트 혹은 아이유브 왕조의 가장 위대한 술탄으로 칭송받았지만 그 스스로가 술탄이라고 호칭하고 다닌 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대신 시르쿠의 조카와 같은 상당히 겸손한 칭호를 즐겨 사용했다. 따라서 1174년에 누레딘이 사망했을 때도 일단은 누레딘의 11살난 아들인 앗 살리흐 (
As-Salih Ismail al-Malik) 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다소 기만적이긴 하지만 살라딘은 기도식에서도 앗 살리흐의 이름을 송독하도록 지시했고 표면적으로는 앗 살리흐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앗 살리흐가 시리아를 탐욕스런 주위의 이슬람 군주와 십자군으로 부터 지키지 못할 것은 자명해 보였고 결국 시리아는 먼저 먹는게 임자인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누레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바로 공격의사를 밝힌 것은 누레딘으로 부터 항상 시달려온 십자군들이었다. 아말릭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마자 이전에 누레딘에게 빼앗긴 배니어스 (Banias) 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결국 아말릭 1세는 누레딘과 비슷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포위를 포기하고 후퇴하던 중 아말릭 1세는 이질에 걸렸고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스와 시리아 및 다른 국가들에서 의사들을 다 불러왔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결국 아말릭 1세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누레딘과 저승길을 동행하는 신세가 되었다. (1174 년 7월 11일)


 아말릭 1세는 왕비 마리아 콤네나와의 사이에서 딸만 2명을 두었고 그나마 어렸기 때문에 그녀들은 국왕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대신 아말릭 1세의 첫번째 부인 아그네스와의 사이에는 아들인 보두앵이 있었다. 아말릭 1세의 장자로 이렇게 신임 국왕자리에 오른 보두앵 4세 (Baldwin IV of Jerusalem) 는 1161년 생으로 당시 13살에 불과한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은 각각 11살과 13살의 소년 군주들에 의해 통치되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 상황은 살라딘이 알라의 가호를 받든가 아니면 신께서 예루살렘 왕국을 버린 듯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밀릭 1세는 나름 산전 수전을 다 겪었고, 군사적 재능이 아주 뛰어나진 않더라도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무주 공산이 된 시리아를 노릴 법한 충분한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말릭 1세의 어이없는 죽음 - 물론 누레딘도 그렇긴 하지만 - 으로 인해 십자군 왕국은 돌이킬 수 없는 인적 손실을 입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신이 예루살렘 왕국을 버렸다는 징조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소년왕 보두앵 4세에게 있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역사가였던 티레의 윌리엄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문제가 보두앵 4세의 별칭으로 굳어져 보두앵 4세는 
the Leper / the Leprous 으로 불린다. 즉 '나병환자 보두앵' 이 보두앵 4세의 별명이었다.


 티레의 윌리엄 (기욤) 에 의하면 어린 보두앵 4세는 서로 얼굴을 꼬집어서 표정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항상 이겼다. 사람들은 곧 보두앵 4세의 인내심이 강해서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질병인 나병 때문에 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게임에서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레의 기욤의 Historia and Continuation 의 한장면. 위의 그림에서 아말릭 1세가 죽었고 아래 그림에서는 보두앵 4세가 대관식을치르고 있다. William of Tyre's Historia and Continuation, 13C manuscript from Acre. Bibliotheque Nationale Française, Richelieu Manuscrits Français 2628 Copyright-free, from Bibliotheque Nationale Française site Gallica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왼쪽 그림에서 보두앵 4세는 얼굴을 꼬집는 게임에서 항상 이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른쪽 그림에선 티레의 기욤이 보두앵 4세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음을 암시한다.   Miniature from a French translation of William of Tyre's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 (British Library, London) It depicts William's discovery of leprosy in the future Baldwin IV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십자군 왕국은 1174년과 1175년의 황금같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대신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한 쪽은 물론 살라딘이었다.



 21. 다마스쿠스 점령


 한편 시리아에서는 누가 앗 살리흐의 보호자인지를 두고 대립이 벌어졌다. 사실 이 어린 소년의 보호자임을 자청하는 것은 결국 시리아를 자신이 지배하겠다는 이야기와 다름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전 누레딘의 심복 중 하나였고 현재는 알레포의 에미르 구무쉬티긴 (Gumushtekin) 이 앗 살리흐의 보호자 임을 자청하면서 다마스쿠스로 접근했다.


 이 시점에서 다마스쿠스의 관료들은 달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차라리 살라딘을 끌어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마 그들도 이제 살라딘의 시대가 도래한 것임을 눈치 챘는지 당시로써는 가장 올바른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후에 생긴일을 감안할 때 다른 군주에게 투항했다면 살라딘의 군대 앞에 그들은 큰 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해 말인 1174년 11월 23일 살라딘의 군대는 마침내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를 한시라도 빨리 점령하기 위해 카락의 십자군 요새를 우회하여 700기의 기병만을 대리고 신속한 기동을 통해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것이다. 만약 다마스쿠스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이 병력만으로는 절대 다마스쿠스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살라딘이 도착하자 다마스쿠스의 단단한 성벽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열렸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살라딘은 - 사실 그 때 이미 살라딘을 무서워한 앗 살리흐는 다마스쿠스를 빠져나가 피신했다 - 모든 것을 앗 살리흐의 대리 자격으로 집행했다. 살라딘은 이번에도 과거 장기드 왕조의 재산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대신 백성들에게 인심 좋게 분배해 재산보다 더 중요한 민심을 얻었다.


 여기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앗 살리흐의 맘루크 (백인 노예이자 병사) 라고 자세를 낮추고 모든 법령과 주화가 앗 살리흐의 이름으로 배포되도록 신경썼다. 이는 물론 기만적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나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시점에서 살라딘이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 양쪽을 지배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알레포의 구무쉬티긴은 이와 같은 살라딘의 등장에 큰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앗 살리흐를 보호하는 한편 모술의 지배자이자 누레딘의 조카인 
세이프 웃 딘 가지 2세 (Saif ud-Din Ghazi II) 와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과거 장기드 왕조의 근거지 중 하나인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현 시점에서는 장기드 왕조 (Zangid Dysnasty) 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1174년 말에 살라딘은 시리아의 수도이자 그가 어렸을 때 부터 자란 도시이고 그의 아버지가 관리이자 총독으로 있었던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이제 앞으로 다마스쿠스는 그의 중요 근거지가 될 것이었다. 살라딘은 그의 형제인 투그티킨을 다마스쿠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시리아의 나머지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알레포를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22. 레몽 3세 


 살라딘의 군대가 알레포에 도달한 것은 바로 1174년 12월 30일 이었다. 살라딘은 앗 살라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성문을 열라고 했지만 역시 
구무쉬티긴이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곧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역시 알레포는 과거 누레딘이 근거지로 삼았던 도시 답게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한편 십자군들은 살라딘이 시리아를 장악하게 되면 자신들이 처지가 꽤 위험해 질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알레포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예루살렘 왕국의 새로운 섭정인 된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Raymond III of Tripoli) 였다.


 사실 레몽 3세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누레딘에게 사로잡혀 알레포의 감옥에 같혀있었다. (1164년 하림전투) 그렇게 수감생활을 한지 9년만에 백작이 풀려날 수 있던 것은 국왕 아말릭 1세 덕이었다. 백작의 사촌이기도 한 아말릭 1세는 트리폴리를 섭정하면서 백작이 석방될 수 있도록 계속 협상했고 결국 거액의 몸값을 주고 백작은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사실 아말릭 1세가 너무 넓은 지역을 방위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는 의미도 있긴 했지만 결국 의도하지 않게 아말릭 1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레몽 3세를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구해온 셈이기도 했다. 지금 예루살렘 왕국에는 레몽 3세 처럼 경험있는 군인 겸 정치인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폐비 (?) 아그네스는 아들인 보두앵 4세가 즉위하자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왔는데 곧 그녀의 파벌을 만들어 제멋대로 행동했으므로 왕국은 어려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대비 마리아 콤네나도 비잔티움 제국이란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므로 쉽게 물러날 상대도 아니었다. 결국 보두앵 4세가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채 왕국은 1174 - 1175년의 좋은 기회를 이용해서 무슬림들을 공격하기는 커녕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기만도 벅찬 상황이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섭정 자리에 오른 레몽 3세는 살라딘이 시리아 전체를 장악하면 그 다음에는 본래 그의 주군이던 누레딘이 의도한 대로 예루살렘 자체를 노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알레포를 구원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성전기사단 같은 왕국내 반 무슬림 강경파들은 이에 반발했는데 솔직히 이는 앞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이 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망치한이라고 알레포 다음은 십자군 국가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 레몽 3세는 선왕 보두앵 3세와 아말릭 1세의 믿을 만한 신하였던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 (Humphrey II of Toron), 이벨린의 발리언 (Balian of Ibelin), 시돈의 영주 레지날드 (Reginald of Sidon) 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성전 기사단 같은 강경파와 일부 파벌들이 레몽 3세를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앞날은 밝지 못했다. 레몽 3세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해도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으니 예루살렘 왕국의 패망은 사실 시간 문제였다.


 아무튼 레몽 3세는 새롭게 살라딘의 영토가 된 홈스를 공격하여 상대의 주의를 분산시켰고, (1175년 2월 1일) 
구무쉬 티긴 역시 미심적은 상대인 아사신 파의 리더인 라시드 앗 딘 시난 (Rashid ad Din Sinan) 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니 이번에는 살라딘도 할 수 없이 병력을 물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아사신 파의 살라딘 사이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는 데 아무튼 확실한 역사적 사실은 처음에는 아사신 파를 분쇄하기 위해 노력했던 살라딘도 결국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한편 이 일이 끝난 뒤 구무쉬티긴은 레몽 3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알레포에 수감된 중요한 십자군 포로들을 석방했다. 이 포로들은 레몽 3세와 같이 하림 전투에서 사로잡힌 조슬랭 3세와 그전에 사로잡혀 이미 10여년 동안 감옥에 같혀 있던 인간 말종 르노 드 샤티옹이었다. 


 사실 르노 드 샤티옹의 경우는 무려 총 500 kg 상당의 황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1176년에야 풀려났다. (햇수로는 17년정도) 그러나 실제로 그가 이후에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사실 500 kg 의 황금을 몸값으로  지불하더라도 감옥에 좀더 가둬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었으로 일단 르노 드 샤티옹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 즉시 자신과 예루살렘 왕국을 파멸로 이르게할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은 마누엘 1세와 살라딘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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