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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5



 10. 십자군의 4차 이집트 침공 


 1167년 역시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하고 돌아온 (물론 엄밀히 말하면 조공을 받고 왔지만) 아말릭 1세와 십자군은 솔직히 하림 전투이후 약화된 십자군 왕국을 누레딘으로 부터 지켜내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치고 있었다. 사실 3차례에 이르는 잦은 이집트 원정은 십자군 왕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뿐 아니라 누레딘의 위협으로부터 매우 취약해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미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약화된 이집트가 십자군의 우려대로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는 날에는 어차피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십자군으로써는 버텨내기 힘든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이집트가 본래 이슬람 국가이고 십자군 국가들과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투르크 족과 다른 시아파 무슬림으로 십자군 전쟁사 전체를 통틀어 수니파 무슬림과 시아파 무슬림 정권이 손을 잡고 십자군과 싸우는 일은 십자군과 무슬림이 손을 잡고 싸우는 일보다 극히 드물게 일어났다.


 따라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된 정부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이상 이들이 손을 잡고 십자군을 협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소수의 십자군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양쪽의 무슬림들에 둘러싸여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시점에서 아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집트가 시리아와 통일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누레딘이 아니라 살라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인해서 아말릭 1세와 십자군 왕국에게는 이집트를 정복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집트가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약화되었다면 시리아 보다는 십자군의 손에 정복되야 십자군 왕국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아말릭 1세에게는 이집트 원정을 다시 실행에 옮길 만한 병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말릭 1세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유럽에서 대규모 십자군이 조직되어 우트르메르로 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랫만에 프랑스에서 도달한 대규모 십자군은 1164년의 하림 전투에서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더구나 십자군 원정 자체가 오랜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어 다시금 대규모 십자군이 유럽에서 조직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의하면 4차 십자군 침공 전에도 유럽에서 새로운 십자군이 당도하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마도 대규모의 병력은 아닌 듯 다른 문헌에서는 언급이 없었다.)


 두번째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12세기 초에 조직되기 시작해서 이미 당시에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기사단들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기사단들은 이런 저런 명분으로 막대한 기부를 받아 재산을 축적했으며 곧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기사 집단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아말릭 1세가 도움을 구한 것은 바로 구호 기사단 (Knights Hospitellar) 이었다. 아말릭 1세는 이들의 도움을 얻어 4차 침공을 준비할 수 있었다.


 


(12 - 13 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구호 기사단의 그림. 흔히 중세 기사하면 상상하는 플레이트 메일이 아닌 체인 메일 갑옷을 입고 있는 점으로 봐서 나름 고증에 충실한 그림으로 보인다  Picture from the Grand Magisters Palace of Knights of Rhodes (Museum)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Attribution-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 You are free to share and mix, under the following condition -  You must attribute the work in the manner specified by the author or licensor. If you alter, transform, or build upon this work, you may distribute the resulting work only under the same or similar license to this one.   Author : Sportingn)



 한편 1167년 이후 아말릭 1세는 또 다른 지원군을 바랄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아말릭 1세는 마누엘 1세의 조카인 마리아 콤네나 (Maria Comnena) 와 116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것은 물론 형인 보두앵 3세 처럼 비잔티움 제국과 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마누엘 1세는 아말릭 1세의 이집트 침공 계획을 들었고 결국 이를 지지해 주기로 했다.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하는 아말릭 1세  출처 : Guillaume de Tyr, Historia et continuation (BNF Richelieu Manuscrits Français 68, folio 318v) (William of Tyre, Historia and continuation (BNF Richelieu French manuscripts 68, folio 318v))]  This image from the National Library of France (BNF) is a reproduction by scanning of a bidimensional work that is now in the public domain ({{PD-scan}}). For this reason, it is in the public domain )



 그런데 사실 아말릭 1세가 이집트 침공을 다시 하게 된 이유는 꼭 그의 야심 때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말릭 1세는 자신이 이집트로 떠나면 십자군 왕국이 다시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실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국왕의 부하들은 좀더 침공을 강력히 원했다.


 그것은 이교도와의 전쟁을 바라는 종교적 광신성 때문이 아니라 이집트의 풍요로움이 그들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1167년에 샤와르는 십자군이 물러가는 댓가로 연공금을 바치기로 했는데, 그 규모는 10만 디나르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집트는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중요한 수익원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3차 침공에서 이집트의 부유함과 허약함을 잘 알게된 십자군은 곧 이집트의 연공금이 아니라 이집트 자체가 몹씨 탐나게 되었다. 부득이 그게 안된다면 더 많은 연공금을 받고 싶어했다.


 1167년의 십자군의 3차 이집트 침공이 끝날 무렵에는 이집트의 군사력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으므로 이집트 군대는 이집트를 침략하려는 십자군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없었다. 이 경우 역시 방해가 될 상대는 역시 이집트를 노리고 있는 누레딘이었다. 이전에 누레딘과 아말릭 1세는 서로 이집트에서 철군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당시 누레딘은 이집트 방면은 일단 안심하고 메소포타미아에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마지못해서라도 이집트를 침략하게된 아말릭 1세는 상대가 방심한 틈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즉 적과 평화 협상을 맺은 후 적이 방심할 때 기습 공격을 퍼부어 기습의 잇점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이다.


 1168년 마침내 십자군의 기습적인 4차 이집트 침공이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깝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해서 허약한 이집트 군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먼 거리를 달려서 올 수 밖에 없는 시리아 군을 격파하는 시간차 각개격파가 가능하다면 십자군의 성공도 점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1차 십자군도 이루기 쉽지 않은 과제였다. 아말릭 1세에게는 이와 같은 재능이 없다는 것은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1168년 10월 30일, 십자군은 다시 이집트의 주요 관문인 빌베이스에 도달했다. 빌베이스는 십자군의 기습 공격에도 잘 버티긴 했지만 결국 11월 3일 함락되고 말았다. 빌베이스에는 무슬림 뿐 아니라 독실한 콥트 교회 신자 (동방 기독교도 가운데 하나) 들도 다수 살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종교적 다양성은 곧 십자군의 칼날 앞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십자군이 함락된 빌베이스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던 것이다.


 당시 이집트의 국민들은 음흉하고 배신을 잘하는 샤와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인해 십자군도 몹씨 증오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두 누레딘과 그 뒤를 잇게 될 살라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셈이었다.


 아무튼 십자군은 당시의 이집트의 공식 수도인 - 그것은 사실 카이로도 알렉산드리아도 아니었다 - 푸스타트 (Fustat) 로 향했다. 그러나 샤와르는 자신의 도시를 직접 불태우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혔다. 다시 한번 샤와르는 막대한 액수를 제시하며 누레딘과 협상을 했다.


 샤와르를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약속을 배반한 십자군을 응징함과 동시에 역시 이집트를 장악할 목적으로 누레딘은 다시 시르쿠와 살라딘을 불렀다. 이제 앞서 두번의 원정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인 이집트 정복을 완성할 차례였다.





 11. 또 다시 이집트로 


 누레딘과 시르쿠는 주저 없이 - 물론 이집트가 십자군 국가에 넘어가는 상황은 그들로써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 샤와르의 요청을 받아들여 3차 파병을 계획한다. 당연히 현지 사정에 밝은 시르쿠가 원정군 사령관이 되고 살라딘이 그 휘하에서 부장으로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 대해서 살라딘은 뜻밖에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삼촌인 시르쿠가 살라딘과 같이 원정을 떠나려 하자 살라딘은 자신이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야심이 없기 때문에 사양함을 밝혔다. 설령 알라께서 자신에게 이집트를 준다해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그러나 시르쿠는 물론이고 누레딘은 살라딘이 당연히 이 3차 원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부득이 살라딘이 이 명령에 따른 것은 결국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 3차 원정의 결과로 결국 살라딘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의 군주에 이르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누레딘은 2000의 정예 기병과 6000의 보병을 시르쿠에게 내주었으며, 군자금으로 20만 디나르의 거금을 하사했다. 시르쿠는 여의 그 신속한 기동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이번에야 말로 샤와르와 아말릭 1세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의 조카인 살라딘도 함께 였다.




(십자군의 4차 이집트 침공과 시리아의 3차 이집트 침공 - 결국 이 전쟁으로 이집트는 누레딘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살라딘의 손에 넘어간 셈이다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5 Generic license. You are free to share & remix, but you must attribute the work in the manner specified by the author or licensor.   Author :  Amonixinator) )


 한편 이집트에 아말릭 1세와 십자군은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였다. 그들은 본래 목표대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이집트 핵심부를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카이로의 튼튼한 성벽은 쉽게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된 것이다.


 카이로로 피신한 샤와르는 비록 십자군을 격파할 군사력은 없었지만 대신 십자군이 카이로를 점령하는 것은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시간만 질질끌면서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아말릭 1세는 초초한 상태에 빠졌다. 이제 아말릭 1세는 연공금만 더 내놓는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의향이 있다는 것을 샤와르에게 알렸다.


 샤와르는 아말릭 1세를 기만할 목적으로 이 협상에 응했다. 진짜 목표는 시르쿠의 대군이 올때까지 십자군을 카이로의 성문앞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시르쿠는 1168년 12월 17일 시리아를 출발해 신속한 기동으로 중간에 자신의 군대를 요격하려 나온 십자군을 따돌리고 1169년 1월 8일 마침내 카이로 인근 지역에 당도했다.


 비록 아말릭 1세가 시르쿠의 군대가 언젠가 들이닥칠 것을 예상하곤 있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샤와르의 군대와 시르쿠의 군대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은 아말릭 1세였다. 결국 십자군은 허둥지둥 예루살렘 왕국으로 귀환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샤와르가 시도 했던 일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샤와르는 다시 한번 본래 누레딘에게 주기로 했던 연공금 및 약속들을 지키지 않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두번 상대방을 기만한게 아닌 만큼 시르쿠나 살라딘 모두 여기에 속을 리는 없었다.


 결국 샤와르는 살라딘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샤와르를 체포한 시르쿠는 처음에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칼리프와 백성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특히 샤와르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 시아파 칼리프인 알 아디드 (Al Adid) 는 단호하게 샤와르의 목을 요구했다. 사실 지금까지 샤와르가 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백성들도 기꺼이 샤와르만 아니라면 새로운 지배자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샤와르는 참수되었다. (1169년 1월 18일)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알 아디드는 이제 시르쿠를 새로운 와지르로 선포했다. 사실 그냥 인정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제 시르쿠는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상위 군주인 누레딘의 영토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집트에 대한 누레딘이 영향력이 감소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집트는 다마스쿠스로 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 시점 까지 살라딘은 그냥 조용하고 지적이며 온화한 시르쿠의 조카이자 부관이었다. 이 젊지만 야심없는 청년은 다시 한번 운명의 장난을 겪게 된다. 그의 삼촌인 시르쿠가 이집트의 와지르가 된지 2달 만에 급사한 것이다. (1169년 3월 23일) 그가 전혀 의도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제 이집트의 권력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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