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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2



 27.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1178 - 1180)


 한편 카이로로 돌아온 살라딘은 다시 설욕을 위해서 자신의 제국을 추스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그의 제국은 이집트 뿐 아니라 시리아 대부분과 요르단 일부 그리고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 일부와 예멘에 이를 만큼 넓어졌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번에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국 곧 세력을 회복하면 다시 한번 십자군을 앞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다시 십자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예상치 못하게 10년이나 뒤었다.


1178년에는 소규모 전투만 시리아에서 벌어졌을 뿐 대규모 접전은 없었다. 십자군과 살라딘의 전쟁에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179년이었다. 이해에 살라딘의 첩보원들은 십자군들이 다시 시리아를 노리고 공세를 준비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살라딘은 휘하 장군인 파루크 샤 (
 Farrukh-Shah) 에게 몰래 1000 명의 병력을 주어 다마스쿠스 인근 국경선을 강화하고 적의 공격을 사전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보두앵 4세와 그의 신하들은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베니어스 인근 국경선을 넘어가던 찰나 적의 기습을 받았다. 무슬림 군대는 골란 고원의 동쪽에서 접근하여 무방비 상태로 - 그들은 나름대로 여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예상하지 않았다. - 행군하던 십자군을 공격했다. (1179년 4월 10일)


 이 전투에서 보두앵 4세는 너무 앞쪽으로 나와 있었므로 곧 적의 병력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 때 왕을 구한 것은 바로 선왕 보두앵 3세/아말릭 1세 시절부터 왕국의 충신이었던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였다. 그는 간신히 혈로를 뚫어 보두앵 4세를 구했지만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어 결국 곧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사실 이 전투의 가장 큰 손실은 바로 험프리 2세 같은 중요한 인물을 잃은 것이었다. 험프리 2세는 기사도에 충실한 보기 드문 십자군 기사 겸 영주로 아직 어렸던 선왕 보두앵 3세를 지켜내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보좌했다. 이후 보두앵 3세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가 된 그는 보두앵 3세가 죽고 난 이후에는 과거 대립하기도 했었던 아말릭 1세를 도와 4차례에 거친 이집트 원정을 도왔다. 


 이 이집트 원정에서 살라딘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험프리 2세는 살라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1175년의 휴전 협정 - 물론 르노 드 샤티옹 같은 인물이 무단으로 무슬림 들을 약탈하러 다녔으므로 깨질 수 밖에 없었지만 - 을 맺기도 했던 것이다. 아말릭 1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다시 어린 보두앵 4세를 보좌했을 뿐 아니라 몽지사르 전투등 주요 전투에도 참전했던 경험많고 현명한 충신이었다. 그런데 1179년에 뜻하지 않게 보두앵 4세가 위험에 빠지자 자신을 희생해서 국왕과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 없으면 다시 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을 살린 것이다. 


 당시 아랍의 역사가인 이븐 알 아티르가 토론의 험프리 2세에 대해서 "어떤 말로도 그를 묘사할 수가 없다. 그의 이름은 용맹과 전술의 대명사였다. 그는 진정 신께서 무슬림을 벌주기 위해 퍼트린 역병이었다 " 라고 칭찬했던 만큼 험프리 2세의 손실은 예루살렘 왕국에 너무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제 선왕 시절부터 믿을 만한 왕국의 충신들은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정도만이 남아있지만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켜야 했고 섭정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므로 예루살렘에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힘들었다. 이로써 살판 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국왕의 모후인 아그네스였다. 


 아그네스는 자신을 내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왕국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려고 했다. 점점 나병으로 인해 고통이 심해가는 보두앵 4세는 옆에 험프리 2세 처럼 도와줄 사람 없이는 어머니를 누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역시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활개치는 간신배의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르노 드 샤티옹이었다. 


 그는 대 무슬림 강경파인 성전 기사단과 손을 잡고 부유한 무슬림 캐러밴을 약탈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르노는 아그네스와도 손을 잡으니 왕국의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었다. 기대했던 긴칼 기욤 (William longsword) 는 어이 없이 죽었고, 토론의 험프리 2세도 결국 전사했으며, 레몽 3세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예루살렘의 왕궁은 이들 간신배들의 차지였다. 


 이런 무리들이 나라를 쥐고 있으면 비슷한 무리들이 또 나타나 한몫 잡아보려 하기 마련인데, 꼭 당시의 예루살렘 왕국이 그랬다. 당시 유럽에서 우트르메르로 온 인물 가운데 과거 십자군에도 참여했던 위그 8세 뤼지냥 (Hugh VIII of Lusignan) 이란 인물의 아들 가운데 아말릭 (Amalric of Lusignan) 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벨린의 영주 보두앵 ( Baldwin of Ibelin) 의 딸과 결혼했는데 아말릭한테는 기 드 뤼지냥 (Guy of Lusignan) 이라는 훤칠하게 잘 생긴 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형인 아말릭이 아그네스의 눈에 들면서 그때까지 아무런 업적도 없던 무명 귀족인 기 드 뤼지냥에도 출세길이 열린다. 사실 기가 어떻게 국왕의 누이이자 미망인인 시빌라와 결혼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들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든지 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불미스런 소문도 연루되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1180년 국왕 보두앵 4세 역시 어쩔 수 없이 이들의 결혼을 승인한 것이다. 




(기 드 뤼지냥의 그림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당연히 트리폴리의 레몽 3세는 이 결혼에 반대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이전의 긴칼 기욤이나 풀크 국왕의 경우처럼 유럽에서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해올 수 있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처음 후보로 거론된 것은 부르군디의 위그 3세 (Hugh III of Burgundi) 였으나 결국 이 결혼으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사실 레몽은 자신의 지지자였던 이벨린의 보두앵과의 결혼도 지지했다. 적어도 군사적으로 믿을 만한 용맹을 보이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잦은 전쟁에 시달리는 왕국을 지키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알 수 없게도 아그네스와 시빌라는 기 드 뤼지냥을 매우 좋아했다. 또 레몽 3세를 싫어했기 때문에 이벨린의 보두앵은 퇴짜를 놓았다. 사실 이벨린이 보두앵의 경우는 싫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신 유럽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영주를 다시 영입하는게 왕국을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보두앵 4세가 죽으면 그 이후에는 시발라의 남편이 새로운 국왕이 되어 살라딘의 압도적 대군으로 부터 왕국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왠만큼 멍청하지 않은 이상 시빌라의 새로운 남편감은 군사적 재능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아그네스와 시빌라, 그리고 르노 등의 무리는 아무런 군사적 업적도 경험도 없는 기 드 뤼지냥을 새로운 남편감으로 선택했다. 사실 이 결정은 그들 모두를 몰락 하게 만드는 결정이었지만 그들은 자기 손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28. 휴전 협정


 1179년에는 4월에 베니어스 근방에서 토론의 험프리 2세가 전사한 것 말고도 또 다시 예루살렘 왕국에 뼈아픈 손실이 있었다. 그해 6월 다시 보두앵 4세는 험프리 2세의 복수를 갚고자 시리아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성전 기사단의 8대 단장인 오도 (
Eudes de St. Amand (or Odo or Odon)) 가 국왕을 보좌했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십자군이 살라딘의 기지를 급습해서 승기를 잡은 듯 했으나 너무 신나서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엷게 분산되어 결국 무슬림 군대의 역습을 받고 수많은 지휘관들과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다만 국왕만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살라딘은 사로잡힌 대부분의 포로를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 기사단장 오도 만큼은 이를 거부했다. 처음에 살라딘은 십자군에 붙잡힌 에미르 한명과 오도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오도는 성전 기사단은 자신의 몸값으로 단검과 허리때 말고는 줄게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사실 성전 기사단의 규칙 중 하나는 바로 무슬림과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고 몸값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살라딘 역시 적의 지휘관을 아무 댓가 없이 풀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도는 그냥 감옥에 갖히게 된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아무튼 1179년에 2차례의 공세가 재앙적인 결과로 끝나자 보두앵 4세는 더 이상의 공세는 무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솔직히 살라딘의 대 공세가 걱정되는 시점이었다. 실제로 소규모 무슬림의 공세가 그해 하반기에 이어졌다. 그러나 1180년에는 신께서 예루살렘 왕국을 살렸다. 당시 기근이 든 상황이라 살라딘도 공세를 미루기로 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어차피 십자군 입장에서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만도 버거웠기 때문에 이 휴전 협정은 당연히 일사 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휴전 협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한 건 바로 카락에 있는 르노 드 샤티옹 때문이었다.


 르노는 캐러밴 루트 근처의 요새인 카락의 영주였다. 그는 이 휴전협정 따위를 준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를 큰 돈벌이의 기회로 사용하고자 했다. 일단 휴전 협정이 발효되자 이전에는 십자군과 살라딘의 전쟁으로 중단된 캐러밴과 메카로의 순례 행렬이 다시 재개 되었다. 카락의 요새 근방에는 곧 부유한 상인 행렬이 줄을 잇게 되었다.


 르노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현재 휴전 협정 중이라는 점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그의 눈앞에는 막대한 약탈품이 어른 거리는 듯 했다. 과거 사이프러스 약탈 이후 가장 큰 약탈이 1181년에 무슬림 상인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이 사실을 알게된 살라딘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보두앵 4세에게 약탈한 물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보두앵 4세 역시 분노했다. 현재 왕국의 상황으로 보건대 인적 자원 및 유능한 지휘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전쟁은 무리였다. 그런데 르노 드 샤티옹 때문에 어렵사리 맺은 휴전 협정이 휴지 조각이 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르노는 약탈품을 돌려주라는 국왕의 명령마저 무시했다. 국왕이 모후 아그네스의 총신인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왕의 명령마저 대놓고 무시해버리니 보두앵 4세의 입지는 더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181년에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살라딘은 조약 위반에 대해서 십자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 중요한 일이란 모술의 세이프 앗 딘 가지 2세와 알레포의 앗 살리흐가 죽은 것이다.



 29. 이집트를 떠나다


 모술의 통치자이자 장기드 왕조의 가장 강력한 군주인 세이프 앗 딘 가지 2세는 죽을 때 자신의 형제인 이즈 앗 딘 (
Izz ad-Din Mas'ud I bin Mawdud) 에게 모술의 통치를 맡기고 죽었다. 한편 1181년 12월 4일 누르 앗딘의 아들이자 세이프 앗 딘 가지 2세의 사촌인 앗 살리흐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앗 살리흐는 죽으면서 그의 가신들이 이즈 앗 딘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앗 살리흐가 생각하기에 이제 장기드 왕조에서 살라딘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은 모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으면서도 누레딘의 영토를 자기 대신 찬탈한 살라딘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에 알레포의 가신들은 이즈 앗 딘에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사실 이즈 앗 딘 역시 알레포를 접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즈 앗 딘은 사실 살라딘의 적수가 아니었고 이즈 앗 딘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가 알레포에 당도하자 금고에서 황금과 돈만 모두 챙긴 다음 알레포는 다른 장기드 영주에게 양보했다. 그는 다른 형제인 이마드 앗 딘 장기 2세였다. 이즈 앗 딘은 알레포를 그에게 양보하면서 그 대신 신자르 (Sinjar) 를 받아갔다. 물론 알레포를 살라딘이 노릴 것이라는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살라딘은 본래 다른 무슬림 영주들과도 2년간의 휴전 협정에 합의했기 때문에 이 협정이 끝나는 1182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1182년 5월 11일 살라딘은 이집트 전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길고 긴 원정길에 나선다. 그리고 이 때를 마지막으로 이집트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실 그가 이집트의 술탄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집트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지금의 리비아 지역까지 다스린데다 이후에는 다마스쿠스를 근거지로 하기 때문에 이집트의 술탄이라는 명칭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이 쿠르드족 출신 술탄이 서구에 맞선 이슬람의 영웅으로 크게 추대 받고 있기 때문에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그는 크게 영웅시 되었고, 이집트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오늘날 이집트 군의 문장은 바로 살라딘의 독수리 (Eagle of Saladin) 이다. 




(현재 이집트 군의 문장인 살라딘의 독수리   I,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hereby release it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아무튼 그해 여름 십자군은 카락에서 살라딘의 대군이 시리아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카락에 군대를 집중시키는 동안 살라딘의 다른 장군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해왔다.


 살라딘의 주력 병력은 무사히 시리아에 당도했다. 곧 다마스쿠스가 살라딘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었고 그는 여기서 죽을 때가지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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