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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0




 23. 시리아 정복


 1175년의 남은 시기에 살라딘은 시리아의 나머지 부분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이와 같은 살라딘의 성공 소식은 모술에 있던 장기드 왕조의 수장이자 누레딘의 조카인 세이프 앗 딘 가지 2세를 크게 자극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시리아는 본래 장기드 왕조의 땅이었는데 쿠르드족 출신의 어떤 뜨내기 하나가 시리아를 다 집어먹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세이프 앗 딘은 모술과 주변에서 병력을 모아들이기 시작했고 역시나 살라딘에 반대하는 알레포와 힘을 합쳤다. 1175년에 이들은 상당히 큰 규모의 병력을 편성해서 살라딘을 공격하기 위해 알레포에서 합류했다. 그런데 이 병력이 살라딘의 병력에 비해 대규모였는지 살라딘은 싸우기 보다는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 북부의 영토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술과 알레포 연합군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으므로 이를 거절했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바로 살라딘이 모든 시리아 영토를 포기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살라딘 역시 일전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전투를 벌인 곳은 바로 오론테스 강이었다. 이 전투는 1175년 4월 13일 벌어졌는데 알레포 모술 연합군이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공격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련한 살라딘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대패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살라딘은 결국 시리아 지배를 확립한 셈이었다. 


 이 전투 이후 살라딘은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 - 힘스 (Hims), 하마 (hama), 마랏트 알 누만 등 - 의 지배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그 지배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부터는 살라딘의 이름을 새긴 주화가 발행되고 기도 에서도 앗 살리흐 대신 살라딘의 이름이 낭송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표면적으로도 술탄의 길을 걸었다고 하겠다. 



(살라딘이 새겨진 Dirham 동전. 1190년에 발행된 것이다. 로마 시대 이후로 주화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는 것은 군주권의 상징이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Kreuzfahrer  (Original: Coin Collection of the University Library Leipzig, Germany))



 그러나 아직 세이프 앗 딘은 포기한 게 아니었다. 1176년 봄. 다시 세력을 추스린 세이프 앗 딘은 장기드 왕조의 땅을 찾기 위해 다시 시리아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노련한 병사들을 이끌고 세이프 앗 딘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살라딘의 군대가 다시 오론테스 강을 건널때 갑자기 일식이 일어났다고 한다. 미신이 많은 시대이니 만큼 이는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으나 살라딘은 여기에 개의치 않고 행군을 지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레포에서 24 km 떨어진 술탄의 언덕 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세이프 앗 딘의 군대와 살라딘의 군대는 처절한 전투를 벌였는데 결국 최후의 승자는 살라딘이었다.


 세이프 앗딘 본인은 겨우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고 많은 병사들과 장교는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편 살라딘은 이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에게 매우 관대하게도 선물까지 줘서 모두 석방했고 그 전투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에 대해서는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살라딘이 앞으로 흔히 보여주는 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당장에는 손해를 볼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민중의 마음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던 점은 정말 칭찬할 만한 행동이다. 결국 살라딘은 이와 같은 행동으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관용과 용기의 술탄이라는 칭송을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 살라딘은 자신의 명목상의 군주인 앗 살라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제 장기드 왕조의 힘은 시리아에서는 미약해졌으므로 더 이상 이들을 압박하지 않고 나름 관용을 베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와 같은 행동은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 만약 앗 살리흐를 어떻게든 제거하고 알레포를 장악하려 했다면 관용의 군주라는 그의 명성은 훼손됐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살라딘의 가장 강력한 힘인 민중의 지지도 약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살라딘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아사신 단을 공격하는데 힘을 집중했다. 그러나 적의 요새를 포위하던 중 결국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대략적인 낭설들은 대개 살라딘이 아사신 단의 암살 위협을 받은 탓에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알 수가 없어 기술은 생략한다.


 한편 자중 지란에 휩싸인 십자군들은 이 시기 더 이상 시리아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1175년에 레몽 3세와 토론의 험프리 2세가 서로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세이프 앗 딘 과의 전쟁에서 배후를 안전하게 할 목적으로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적 문제 때문에 이 휴전협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모든 십자군들이 이 협정에 신사적으로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십자군들은 독립적으로 살라딘의 영토로 들어와 주민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처음에는 영토 정복이 아닌 약탈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당장에는 십자군 과의 전쟁을 자제하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를 안정시키는 것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십자군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24. 미리오케팔론 전투 


 1176년의 후반기에 살라딘은 시리아를 안정시킨 다음에는 다시 이집트의 카이로로 돌아가 최근에 크게 확장된 자신의 제국을 제대로 통치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 이전과 같은 십자군의 공격에도 대비해 카이로의 방비를 튼튼하게 했다. 지금도 카이로에는 당시 살라딘이 축조한 요새와 성벽들이 남아있다. 아무튼 이 일이 끝나는 데로 휴전 협정 따위는 휴지조각 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부 십자군들의 약탈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떠날 참이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다시 한번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유럽의 방파제 역활을 하던 비잔티움 제국을 해체 시키고 발칸 반도 및 중부 유럽 근처까지 무슬림 세력이 지배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 중의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첫번째로 중요한 일이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 지배 약화의 첫 단추였던 만지케르트 전투였다면 두번째로 중요한 일은 바로 지금 설명할 미리오케팔론 전투였다.


 1077년의 만지케르트 전투가 벌어진지 99년 후인 1176년에 마누엘 1세는 중부 아나톨리아의 무슬림 세력에 대해서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세는 황제와 제국에 대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


 1170년대에 셀주크 투르크계의 롬 술탄국의 술탄은 클르츠 아르슬란 2세 (Kilij Arslan II ) 였다. 롬 술탄국과 비잔티움 제국은 자주 그러했듯이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롬 술탄국과 비잔티움 제국 모두 서로의 영토를 원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평화란 전쟁 사이의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공세를 취한 쪽은 바로 마누엘 1세였다.
 사실 마누엘 1세는 당시 58세로 그 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전쟁터에 나서기엔 다소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로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콤네누스 왕조의 황제들 - 알렉시우스 1세, 요한네스 2세, 마누엘 1세 - 은 죽기 직전까지도 병력을 직접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이는 잦은 제국이 잦은 전쟁에 시달린 탓도 있지만 역시나 흔하게 발생하는 군대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황제가 군권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있었다.


 마누엘 1세는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는 것은 물론 안티오크에서도 병력을 차출했다. 여기에 동맹인 헝가리의 벨라 3세 (Bela III of Hungary) 도 끌여들였다. 이렇게 해서 약 2만 5천 정도의 병력이 편성되었는데 쇠퇴기의 제국으로써는 대규모 병력이었던 셈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서구에서는 실제 전투 병력만 정확히 표시하기 때문에 오리엔트 군대에 비해서 병력 규모가 작아 보인다. 아마 삼국지연의였다면 10 - 20만 대군으로 표시했으리라)


 이번 공세의 목적은 도릴라이온을 기지로 해서 직접 롬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움 (코니아) 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롬 술탄국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를 수복한다는 계획이었다. 성공한다면 클르츠 아르슬란 2 세의 왕국은 붕괴 위기에 처하고 콤네누스 왕조와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아나톨리아 완전 수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최초에 십자군도 이 목적 때문에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진짜 원했던 것은 십자군이 아닌 용병이었지만)


 그러나 이 계획에는 뭔가 문제가 많았다. 이코니움까지의 거리는 짧지 않았고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는 산악 및 산림 지역이 많아서 대군이 행군하기에는 썩 좋지많은 않았다. 특히 이 지역은 투르크 족이 좋아하는 매복 전술에 이상적인 지형이 많았다. 따라서 적의 수도인 이코니움까지 한번에 공격하려는 계획은 적의 매복 전술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물론 마누엘 1세 역시 투르크 족과의 전쟁에는 이골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우세한 병력으로 승리를 가능한 빨리 이끌어 내겠다는 생각으로 무리수를 두었다. 사실 전쟁을 해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1174년 누레딘이 죽고 난 후 혼란을 틈타 클르츠 아르슬란 2세가 주변 지역을 병합해서 세력이 커졌으므로 더 이상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성장을 방관할 수만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견제는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처음 부터 너무 힘든 목표를 설정한 셈이었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이 공세가 시작되기 전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누엘 1세는 이미 전쟁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결국 마누엘 1세의 대군이 중부 아나톨리아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고 투르크 족들은 그들의 장기인 매복 전술을 십분 활용해서 비잔티움 군을 괴롭혔다.


 황제가 보낸 전위 부대를 이끈 것은 안드로니코스 바타체스 (
Andronikos Vatatzes) 였는데 그 역시 이 매복 전술에 걸려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투르크 군은 그의 목을 걸고 비잔티움 군을 조롱했는데 황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다. 사실 우세한 제국의 병력이 두려웠던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역시 이를 거절하고 공격을 지속했다. (이점은 만지케르트 전투와 흡사하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당시의 지도. 미리오케팔론 (Myriokephalon) 은 거의 롬 술탄국과의 경계에 있다. 본래 목적은 이곳을 지나쳐서 적의 수도인 이코니움 (Ikonium) 까지 한번에 공략하는 것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비잔티움 군대는 미리오케팔론의 좁은 길목이 있는 부근까지 행군했다. 사실 이 좁고 매복하기 편해 보이는 길을 본 경험있는 지휘관들은 좀 더 먼길을 우회하더라도 이 곳을 지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비잔티움 군대의 여러 대형 공성 병기들 때문에 매복 공격이 없더라도 지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 군대에는 경험없는 젊은 귀족들도 많았고 그들은 그냥 전진을 주장했다. 


 아마도 이 시점이 마누엘 1세가 자신의 경륜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믿을 수 없게도 마누엘 1세 본인이 뭔가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젊은 귀족들의 뜻에 따랐다. 마치 지난 수십년간 전쟁터에서 산전 수전 다 겪은 지휘관으로써의 노련함은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 두고 온 것 같은 결정이었다. 


 과연 이들이 미리오케팔론에 들어가자 이전에도 익숙한 투르크군의 전술이 시작되었다. 일단 소규모의 투르크 병력에 제국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물론 유인 전술이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군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미리오케팔론의 좁은 길목을 따라 군대가 길게 늘어져 있을 때 마침내 투르크 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176년 9월 17일) 


 이 전투에서 황제의 처남인 안티오크의 보두앵은 용감이 싸웠으나 전사했다. 그러나 황제 본인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는 않았다. 비록 미리오케팔론에서 투르크 군이 유리한 위치에 있기는 했어도 병력면에서 잘 훈련되고 우세한 비잔티움 군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상당한 병력을 손실했으며 결국 승리를 확신할 수 없던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다시 화평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와서야 황제는 여기에 동의했다. 여기에 대해서 역사가들의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데 황제가 죽거나 사로잡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병력만 손실해서 돌아간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화평의 결과로 황제는 여러가지 양보를 해야 했다. 그러고서야 막대한 병력을 잃고서 미리오케팔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을 기습하는 투르크 군. 구스타프 도레 작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황제는 직접 편지를 써서 이 전투를 만지케르트 전투에 비견하는 참사로 묘사했다. 오직 다른 점은 황제가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술탄과 조약을 맺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후세의 평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사실 만지케르트 전투 자체도 아주 결정적인 패배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 제국이 자중지란에 빠져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앞에 아나톨리아 지대를 거의 그냥 내주다 시피 했기 때문에 대 재앙이 된 사건이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역시 아주 결정적인 패배는 아니었다. 사실 거의 영토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만지케르트 전투 보다 여로 모로 나았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그리고 아마도 제국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대 공세를 아무 성과도 없이 마무리 지음으로써 투르크 족을 아나톨리아 에서 몰아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가 사라졌다.


 여기에 제국은 이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치뤄내기 위해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남 이탈리아 수복을 위한 대규모 공세와 아나톨리아 고원 수복을 위한 공세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남에 따라 결국 제국의 재정 상태만 파탄 상황으로 몰고간 셈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마누엘 1세는 평균 보다는 유능한 군주이긴 했지만 결국 막대한 비용을 들인 원정들이 모두 실패로 - 물론 실패의 원인에는 마누엘 1세 본인의 군사적 재능이 모자란 것도 있었다. - 끝남에 따라 제국의 쇠퇴와 멸망은 기정사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마누엘 1세가 1180년 승하하고 이후에는 더 모자란 군주들이 들어섬에 따라 이제 비잔티움 제국은 돌이키기 어려운 멸망 - 그러나 그것도 수세기가 걸렸다 - 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이와같은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는 결국 십자군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살라딘의 공격을 받았을 때 비잔티움 제국은 거의 아무런 원조를 해줄 수 가 없었다. 만약 1169년 처럼 대규모의 해군을 이집트로 파견했다면 그것 만으로도 살라딘을 이집트에 묶어 놓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라딘을 위해서는 무척 다행하게도,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서는 매우 불행하게도 미리오케팔론 전투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힘이 거이 소진되고 결국 마누엘 1세 역시 건강이 악화되기 때문에 살라딘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대 십자군 성전에 나설 수 있었다. 다음은 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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