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프랑스 동인도 회사
이제 약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정복을 설명할 차례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설명을 위해 미리 설명을 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프랑스 동인도 회사이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한 때 동인도 회사 설립 붐이 일던 시기인 1603년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당시 회사를 설립한 건 앙리 4세 였는데, 이 회사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는 달리 주주들에 의해 설립된 진짜 회사가 아니라 국왕에 의해 설립된 국가 기관이었다. 우리 나라 교과서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설립된 것 처럼 설명된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실 이런 설명은 앙리 4세가 설립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실패로 끝나고 소리 소문 없이 없어졌다.
그러다 1664년에 이르러 대표적인 중상주의자인 프랑스의 재상 콜베르는 아시아 지역과 무역을 할 목적으로 다시 3개의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중 La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 혹은Compagnie française pour le commerce des Indes orientales 이 프랑스 동인도 회사로 불리게 된다. (음 그런데 필자가 프랑스어를 전혀 몰라서.... 이 명칭이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영어로는 French East India Company 로 번역하지만)
(프랑스 동인도 회사 깃발 - 그런데 혁명 후의 깃발인 인듯한데...)
사실 다른 나라 - 특히 가장 큰 동인도 회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 - 는 정부의 희망과는 달리 중상주의적 정책과는 반대되는 영업을 펼쳤지만 사실상 국영 기업이나 다를 바 없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이와는 다소 사업 영역이 달랐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처럼 수입 전문 업체라기 보다는 식민지 건설 및 영토 획득이 주요 사업 (?) 가운데 하나였다.
루이 14세는 이 회사에 마다가스카르 섬의 권리까지 부여했는데, 식민지 건설 사업이 주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식민지 건설 사업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결국 회사는 근처의 인도양 섬들에 약간의 기반을 얻었을 뿐이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인도에 상관을 건설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다른 유럽 동인도 회사들 처럼 인도에 상관을 세우지만 이 상관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한때 미시시피 버블의 주역 존 로 (John Law) 의 지배아래 놓이는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1723년에 이르러 다시 독립하게 된다.
당시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돌파구를 인도에서 찾는다. 당시 인도의 무굴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인도에 진출하고자 한 것이다.
(Joseph François Dupleix 의 석상)
그러나 이때까지의 실패와는 달리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만큼은 유능한 군인이자 총독인 Joseph François Dupleix (1697 –1763) (프랑스어는 잘 몰라서 뭐라고 읽는지 ... ) 의 지도 아래 인도 현지 세력과 영국 동인도 회사를 밀어부치면서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강력한 군대의 힘이 있었다. 그 군대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도 현지의 용병 부대인 세포이 (Sepoy : 페르시아어로 병사 (soldier)를 뜻하는 سپاهی Sipâhi 에서 나온 단어이다) 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1742년에 이르러 인도내의 프랑스의 모든 지휘권을 확보한 그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세포이 군대를 건설했다. (세포이는 꼭 영국 동인도 회사 용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Joseph François Dupleix 에게는 거대한 야망이 있었다. 그것은 인도내에 거대한 프랑스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를 시기한 프랑스내의 다른 세력들의 방해도 있었지만 Dupleix 는 착실히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군대를 동원 현지 세력을 정복하거나 회유한 그는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요 근거지인 마드라스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여담이지만 사실 프랑스 동인도 회사야 말로 우리들이 흔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왕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회사라기 보다는 일종의 국가 기관이었고, 중상주의에 충실했으며, 식민지 획득을 중요한 목적으로 한 회사는 사실 프랑스 동인도 회사이다)
(1741년에서 1754년 사이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내에 큰 영역을 차지하거나 영향아래 두었다. 한때 3천만명의 인구가 그 지배하에 있었다)
1740년에서 1748년 사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당시 영국 해군이 인도내 프랑스 세력을 공격한 점을 구실 삼은 프랑스 세력은 1746년 영국의 주요 근거지인 마드라스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런데 이때 병력을 이끈 것은 Dupleix의 라이벌인 La Bourdonnais 였다)
이른바 마드라스 전투 (Battle of Madras) 결국 프랑스의 우세 속에 끝났고, 마드라스는 함락되었다. La Bourdonnais 는 영국 상관을 복구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같이온 Dupleix 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을 감금했다. 그런데 이 때 예상치 않게 한명의 젊은 동인도 회사 직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마드라스의 영국 경비대와 시민들은 모두 갇힌 상태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현지 인도인으로 변장하고 인근의 영국 요새인 Port St David 으로 탈출했던 것이다. 이들을 이끌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젊은 직원이 후일 플라시 전투의 주역이자 인도 초대 총독이 되는 바로 그 사람 - 로버트 클라이브이다.
25. 로버트 클라이브
로버트 클라이브 (Robert Clive, 1st Baron Clive)는 1725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연수입 500 파운드 정도를 버는 유능한 법률가였는데, 자신의 평범한 아들이 나중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버트 클라이브의 초상화)
사실 로버트 클라이브는 법률가인 아버지와는 달리 소년 시절 좀 문제아였다. 무려 3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18세의 약관도 안되는 어린 나이로 청운의 꿈을 품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배를 타고 인도로 향하게 된다.
그가 인도에 도달했던 시점에 인도는 사실상 여러개의 작은 세력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틈을 탄 프랑스 세력과 영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인도 회사의 신출내기 사원이 근무하던 곳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마드라스였다.
마드라스의 영국 상관은 인도 진출의 초창기인 1639년 부터 존재한 상관으로 클라이브는 마드라스에 있는 성조지 요새 (Port St George) 였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마드라스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함락된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영국인들을 이끌고 탈출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사실 운이 좋았다고 할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Dupleix 가 흔히 클라이브의 라이벌이라고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벌이라고 부르기엔 약간 세대차가 나고 또 활약한 시기가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결정적으로 인도 현지에서 반독립적 세력으로 끝없이 영국과의 전쟁을 벌이던 Dupleix 가 1754년에 프랑스로 강제 송환되었기 때문에 클라이브는 이 '라이벌'과 플라시 전투에서 맞붙을 일은 없었다. 물론 이는 클리이브를 위해선 다행인 일이지만.
이후에도 그렇지만 전쟁은 대다수의 이들에겐 비극일지라도 일부에겐 출세의 기회도 된다. 로버트 클라이브는 마드라스 전투 이후 대 프랑스 전쟁에서 자신을 부각시키며 영국군 지휘관인 스트링거 로렌스 같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 내키지 않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 현지 세력을 향한 총성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젊은 나이지만 이미 그 실력을 입증한 클라이브는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친프랑스파인 카르나틱 태수 (Nawab of Carnatic - 카르나틱은 인도 남부 지역이라고 함) 인 산다 사히브 (Chanda Sahib)와 히데라바드 영주 (Nizam of Hyderabad) 를 영국쪽으로 기울도록 교섭했다. 특히 이 카르나틱 태수 산다 사히브는 Dupleix 의 지원하에 태수가 된 인물이었으니 당시 클라이브의 능력은 십분 발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산다 사히브가 다시 프랑스와 손을 잡지만 말이다.
아무튼 당시 프랑스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표면적인 평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위태로운 평화시기에 클라이브는 현지 지휘관 로렌스 소령과 협력해서 당시 영국군 부대의 보급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는 보급만 담당한건 아니었다. 그는 대위급으로 대우 받으며 실제 군경험이 없었지만 장교처럼 일했다.
1751년, 다시 클라이브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카르나틱 주의 산다 사히브는 다시 프랑스와 연합하여 자신의 라이벌인 모하메드 알리 칸 왈라자 (Mohamed Ali Khan Walajah) 를 공격하기 위해 카르나틱 주의 수도인 아르콧 (Arcot) 을 떠났다. 이때 클라이브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무하마드 알리를 지원할 목적으로 현재 비어있는 상태인 아르콧을 공격하자는 묘안을 짜냈다.
클라이브는 영국군 200명과 세포이 300명, 그리고 장교 8명과 대포 3문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아르콧을 기습해서 포위 공격에 대비한 방어 진지를 건설했다. 현재인을 포섭해서 병력을 보강한 클라이브는 산다 사히브의 아들 라자 사히브 (Raza Sahib) 가 프랑스의 지원군까지 포함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르콧으로 회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클라이브의 의도대로 산다 사히브 군은 양분되었고, 모하메드 알리는 구원될 수 있었다.
(모하메드 알리 칸 왈라자 (Mohamed Ali Khan Walajah) )
나중에 아르콧 포위전 (Seige of Arcot) 으로 알려진 이 공방전은 50일간 계속되었다. 비록 동인도 회사의 사무관이었던 클라이브지만 특유의 용기와 지도력을 발휘한 덕에 그들은 성공적으로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모하메드 알리의 지원군으로 보강된 클라이브는 영국으로부터 귀환한 로렌스 소령과 합세하여 다시 병력을 보강했다. 이후 영국군과 모하메드 알리 연합군은 우세한 상태로 전쟁을 이끌었고, 결국 1754년 휴전 협정이 맺어질때 친영파인 모하메드 알리 칸 왈라드는 태수 (Nawab) 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26. 캘커타 공방전과 벵갈 전쟁
로버트 클라이브는 아르콧 포위전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영국으로 금위환향했다. 10여년전 문제아로 퇴학당해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배를 타고 온 소년이 이제는 전쟁 영웅이 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영국 수상인 피트는 그를 가르켜 하늘이 낸 장군 (heaven-born general) 이라 칭송했다. 클라이브는 물론 사관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지만, 흡족한 영국 정부는 그에게 영국군 중령의 지위를 하사했다.
그러나 클라이브가 없는 동안 다시 프랑스 세력은 인도에서 팽창 정책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에 1755년 다시 클라이브는 인도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 제법 지위가 향상된 클라이브는 성데이빗 요새 (Port St David) 및 마드라스의 영국 상관을 책임지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1754년에 Dupleix 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국이 마냥 기뻐할 수 만도 없었는데, 인도 내부에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인도 남부의 카르나틱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였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동부의 벵갈에서 새로운 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1756년 새롭게 벵갈의 태수 (Nawab of Bengal - 벵갈은 지금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서벵갈을 합친 지역) 이 된 시라지 웃다울라 (Siraj Ud Daula ) 는 영국에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벵갈 지역)
웃다울라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가 받지 않은 무역 - 실제로 회사는 본래 무굴 제국과의 합의한 내용 보다 더 많은 월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 시행하였을 뿐 아니라 세금도 물지 않고 있었고, 자신의 궁정에 관여하려 했으며, 힌두교 상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자신에 대해 적대적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시라지 웃다울라 (Siraj Ud Daula ) )
새 태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1756년 7월 카심바자 (Kasimbazar)의 영국인들을 공격했으며, 다시 7월 20일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내 주요 근거지인 캘커타 (Calcutta) 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때 영국 동인도 회사가 입은 금전적인 손해가 2백만 파운드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당시 포로로 잡힌 영국인들도 대부분 사망했으니 (black hole of calcutta 라고 부르는 사건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물론 영국인들이 격분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일단 새 태수에게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해 12월까지 답변이 없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클라이브와 영국 왕립 해군의 제임스 왓슨 제독은 각자 수로와 육로 방향에서 캘커타 탈환을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지상군은 해군의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주요 목표물인 Baj-Baj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다시 해를 넘겨 1757년 1월에는 캘커타가 완전히 영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당연히 벵갈 태수도 영국의 행동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757년 2월 2일, 벵갈 군은 약 6만의 보병과 4만의 기병, 그리고 대포 30문이라는 대병력을 이끌고 캘커타로 진격했다. 당시 병력 수치가 다소 부풀려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클라이브가 이끄는 2000 명의 보병에 비해서 월등히 우세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2월 5일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은 10% 의 병력 손실을 입긴 했어도 패배하진 않았다. 당시 영국군은 - 물론 세포이의 비중이 높지만 - 잘 훈련되고 근대화된 군대이기 때문에 현지 인도 토착 세력이 가진 병력보다 머릿수에서 밀려도 꼭 전투에서 밀리는 건 아니었다. 벵갈 태수는 일단 캘커타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자신의 영토의 중요한 곳을 장악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태수에겐 눈엣가시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앞서 설명했듯이 그가 영국 동인도 회사를 밀어내야 하는 이유들도 여전히 있었다. 당연히 그는 영국 세력을 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757년,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전투가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플라시 전투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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