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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 회사 이야기 15



 
 35.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


 : 이제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 18세기 후반의 영국으로 갈 차례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 말고도 세계사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산업 혁명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산업혁명의 발생의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회사가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일단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발생하게 된 여러가지 이유 중 몇가지는 분명히 동인도 회사와 연관이 있었다. 17, 18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로 부터 들여온 막대한 양의 면직물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영국의 섬유 산업계를 크게 위협했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070557939  참조 )


 18세기 초만 해도 임금이 영국 고용인의 1/3 - 1/4에 불과한 인도산 캘리코의 가격 경쟁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입 섬유 제품의 위협은 영국 산업계를 크게 자극시켜 이의 발전을 촉발했다. 즉 값싼 수입 면직물에 대항하기 위해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이 영국 내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단 방적기(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 분야에 있어서, 영국의 하그리브스는 1767년 몇개의 추를 이용해서 이전보다 훨씬 빨리 실을 뽑을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고, 1768년에는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이용해서 사람의 힘보다 더 효율적으로 실을 뽑을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 1779년에는 이 두 방적기의 장점만을 결합한 뮬 방적기가 나와 생산력은 더욱 증가되었다.


 한편 역직기 (기계로 움직이는 베틀, 즉 실로 천짜는 기계) 에 있어서도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1785년 카트라이트가 동력을 사용한 역직기를 개발한데 이어 이를 계속 개량하여 성능이 크게 향상, 결국 산업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물론 이와 같은 기계들의 새로운 동력원이 된 증기 기관도 빼놓을 수 없는 혁명이다. 1765년 영국의 와트는 이전의 비효율적이던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혁명적으로 개조해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용도 이외에도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태동하고 있던 산업 혁명을 위해서는 복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일련의 혁명 과정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역활이 주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영국에서 섬유 산업이 크게 일어난 것은 단지 수입 직물에 대항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수요가 크게 증되된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 회사가 분명히 다소간의 역활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 영국 동인도 회사같은 주식회사들은 해외 식민지 획득, 그리고 스스로가 당시의 대표적인 주식회사로써 상업 자본의 축적같은 과정을 통해 의도적이진 않지만 산업 혁명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산업 혁명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기여한 사실보다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영국 동인도 회사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영국 최초의 근대적인 주식회사이자, 당시 영국 최대의 기업으로써 영국 경제발전에 미친 공로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언뜻 생각하기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전성기를 구가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기 쉽다. 더군다나 영국 동인도 회사하면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생각되니 제국주의 시대에 번영을 누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실제로 발생한 일은 정 반대였다.


 그 이유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독점 무역이라는 전근대적 방식의 영업을 하고 있다는데서 기인한다. 즉 산업 혁명이 발생하고 자본주의의 시대가 되자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 방임주의가 큰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정부의 규제와 독점은 사라져야 했다. 오늘날 생각을 해보자. 현재 어떤 국가도 한 지역과의 무역권을 특정 회사에 독점권을 주고 보장하는 국가는 없다. 만약 현재 우리나라의 어떤 기업이 우리나라와 미국간의 모든 무역을 독점하고 그 외에는 모두 불법직인 밀수입이라고 가정하자. 항목이 하나 두개도 아니고 또 그 물량도 엄청난데, 이것이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와같은 독점 무역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수많은 기업들이 자유롭게 물건을 수입/수출하면서 무역을 하게 해주는 것이 당연이 한 회사가 무역을 독점하게 하는 것보다 바람직하고 자연스럽다.


 사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세워지던 시절에는 기업이란 것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다소 길드적인 성향의 상인 연합이 무역권을 독점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역양도 많지 않고 항목도 단순했다. (17세기 초만해도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수입의 대부분이 향신료 무역에서 나왔음을 상기하자. 1년 무역양이라고 해봤자 범선 몇척에 실어나를 정도의 향신료였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발생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이는 큰 문제가 된다. 특히 인도를 비롯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독점 무역 지역에 자유롭게 물품을 수출하고 수입하려는 영국 자본가들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영국 정부 또한 이를 반대할 명분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아니 사실 이런 전근대적이고 반자본주의적 규제는 수출 증대를 위해 없애버리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번만은 동인도회사의 로비도 소용이 없었다. 1813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중국 황제의 관할 구역을 제외한 지역에 대해서 모든 독점권을 상실했다. 자유 무역주의가 이제 새로운 기치가 되었다. 보다 넓어진 시장에서 영국의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제 상업 회사로써 그 영향력이 점차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비례해서 인도 식민지 경영 위탁 업체로써의 업무는 커질 수 밖에 없었으니 결국 회사는 식민지 대리 경영 기업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36. 아편 전쟁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회사가 모든 상업 회사의 역활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업 영역은 한번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일단 한때 회사의 주력 상품이었던 캘리코 무역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인도산 면직물보다 더 값싸고 좋은 영국산 면직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인도는 면직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결국 인도 면직물 산업을 붕괴시켰고, 인도내 면직물 산업 중심지들은 황폐해져 버렸다. 인도는 면화같은 원료를 공급하고 영국산 면직물의 수출시장이 되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차 무역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양호했다. 비록 독점시기에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밀수 차로 인해 시장 지배력을 빼앗겼고, 독점 종료 이후에는 다른 경쟁자들의 도전을 받긴 했어도, 아직도 차 수입에 있어서는 메이저 기업이었다.


 그런데 이 차 무역이 말썽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막대한 차는 은과 같은 귀금속을 주고 수입한 것이었다. 불행히 영국산 섬유 제품은 중국에선 별 인기가 없었다. 이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영국에서는 은값이 폭등하게 되었고, 회사는 곤란을 겪게 되었다. 특히 1784년 이후 차에 대해 관세가 대폭 줄게 되자 차 수입은 더 늘어나게 되어 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사실 이 아편은 약품으로도 사용되었으니 향신료 무역으로 시작된 영국 동인도 회사와 잘 맞는 상품 같긴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향신료와는 달리 아편은 중독이 되고 사람을 폐인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돈에 대한 탐욕은 인간을 얼마든지 악하게 만들 수 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아무 꺼리낌없이 이 상품을 팔았다.


 이미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76년에 웨렌 헤이스팅스 총독의 지휘아래 인도내의 아편 무역을 독점하려고 했었다. 당시 벵갈지역에서는 멀쩡하던 밭들이 아편 밭으로 바뀌는 광경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다고 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다른 회사와는 달리 인도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아편 재배를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편 무역에 있어 메이저 회사가 될 수 있었다. 이 아편은 1830년대에 중국내에서는 히트 상품이었다. 아편 판매가 워낙 잘 되다 보니 은이 오히려 중국에서 유출되어 중국내 은값이 오를 정도였다. 그리고 아편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입의 12% 를 차지해서 새로운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이 아편은 중국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일단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어나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중국내 은 가격이 오르면서 이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중국 경제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아편을 금지시키려고 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중국 정부는 대표적인 아편 반대론자인 임칙서를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아편 거래를 금지시켰다. 이에 대해서 영국 정부가 무력을 행사하니 이는 바로 아편 전쟁 (1840 - 1842) 인 것이다. 이 때 지상군 중 상당수는 인도에서 온 동인도 회사 군대였다.



 (아편 전쟁 기록화)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부득이 전쟁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인도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도를 위탁 경영하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그 수입의 상당 부분을 아편 전매 사업에서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 현지에서 걷히는 세금은 막대한 군대와 관료조직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편 수입이 끊어지면 은 거래에도 지대한 문제가 발생할 뿐 아니라 영국 동인도 회사와 인도 식민지, 그리고 나아가 영국 경제도 파탄지경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무력하게 패배해서 홍콩을 식민지로 할양하고 아편 무역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서구 열강의 침입의 전조였다. 중국 역사의 암울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실 무력으로 마약을 외국에 판매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계 역사의 암울한 장면가운데 하나였다.




(지구 반대편의 유럽인들이 이렇게 여유롭게 차를 마시기 위해서 중국 현지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아편 중독으로 고통받았다. 사실 차가 문제라기 보다는 바로 차에 얽힌 인간의 돈에 대한 탐욕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에 앞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도 암울한 (?) 일이 있었다. 그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이 1833년에 연장이 취소된 것이다. 결국 1600년 독점 무역 회사로 시작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무역 독점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자체 식민지인 인도에 기반한 아편, 면화, 차등이 이제는 주요 상업 부분이었지만 그 비중은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857년 세포이의 항쟁이후 식민지 경영권이 박탈되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상업 부분까지 모두 정리 당하게 된다.





 37. 래플즈와 싱가포르


 토마스 래플즈 (Thomas Stamford Raffles) 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자전적인 성공 스토리 중에 하나이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영국은 주변으로 세력을 팽창하는 중이었다. 어린 나이에 동인도 회사에 입사해서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은 래플즈는 23세의 말라카의 새로운 식민지인 피낭의 사무관 보로 승진했다.



 이 때 인도 총독인 민토 백작(Lord Minto)의 눈에 든 래플즈는 당시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를 차지해야 함을 역설했다. 마침 당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된 상태라 대 나폴레옹 전쟁을 하고 있던 영국은 다른 구실도 필요 없이 1811년 8월 자바섬을 공략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능력을 입증한 래플즈는 부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협정에 의해 자바섬은 네덜란드에 반환되고 갑자기 할일이 없어진 래플즈는 다른 장소를 물색해 새로운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로 삼기로 결심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래플즈의 동상)


 1819년 1월, 래플즈는 요충지인 싱가포르를 조호르 왕국으로 부터 임차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매달 2000 달러 이상의 배당금을 주는 조건으로 싱가포르를 영구히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임차하는 조건에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되며 1826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네덜란드로 부터 뺏은 땅들과 합쳐 회사의 식민지인 해엽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위치도 약간 다르고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도 해산된 상태였지만 어찌 보면 영국 동인도 회사가 과거 네덜란드에 당한 치욕을 다시 한번 갚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이 해엽 식민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영국 식민청으로 관할이 바뀌고 후에 싱가포르 공화국과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독립하게 된다. 


 아무튼 싱가포르의 아버지인 래플즈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 방임주의의 신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싱가포르를 자유항으로 발전시키고 독점 무역 회사인 (당시에는 거의 허울뿐이었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자유 무역을 지지했다. 또 노예 해방을 추진했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만년에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여 곤욕을 치뤘다. 심지어 그가 1826년에 뇌종양으로 죽자 그의 미망인에게 추징금을 물리는 등 지금 관점으로 보면 부당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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