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피의 블랙홀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에 이르러 청색 작전을 진행 중이던 독일군은 동쪽으로 이제 볼가강에 도달해 볼가강 연안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직전에 이르렀다. 아니 이르른 것 처럼 보였다. 몇일이면 점령할 줄 알았던 도시가 몇달이 지나도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군은 A/B 집단군으로 나뉘어서 A 집단군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전진하여 목표인 그로즈니에 거의 도달했고, B 집단군은 선두의 6군이 스탈린그라드를 두드리며 볼가강을 넘어서 카스피해 연안의 주요 유전지대를 장악하려 했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는 달리 스탈린그라드는 쉽사리 점령되지 않았다.
본래 차리친 (노란강(물)이란 타타르어, 지금은 볼고그라드) 이란 이름을 지닌 이 도시는 앞서 포스트에서 설명한대로 볼가강의 수로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도시를 장악하고 수로와 철도를 차단한다면 소련의 주요 유전지대와 소련의 나머지 부분을 차단시킬 수 있음으로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그 가치는 적백 내전에서도 입증된 바가 있다.
스탈린은 앞서 적백 내전 당시 이 도시에 사령부를 마련하고 군을 지휘(?)한 적이 있다는 것은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 도시는 그 인연으로 1925년 이름을 스탈린그라드로 변경하게 된다. 당시 떠오르던 실세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한 공산당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밖에 이 도시에 없었던 서기장 동무이지만 스탈린도 이 도시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이기에 특별히 여겨서 본래 이 지역은 5개년 개발 계획당시 집중적으로 공업화된 도시였다.
이 도시의 특징은 구글어스에서 보듯이 볼가강 서안에 늘어선듯이 위치한 도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군은 볼가강과 돈강을 도하하지 않는 이상 이 도시를 포위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볼가강 반대쪽에도 많은 소련군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쉽게 우회하긴 어려웠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독일군의 끊임없는 공습과 폭격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지속적으로 병력과 물자를 강을 건너 투입했기 때문에 이 도시가 그토록 점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도시에서 이렇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 전투가 6개월에 걸쳐 무려 500만명의 피를 빨아먹은 블랙홀이 된 것은 몇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최초에는 중요 목표중 하나인 이 도시는 스탈린에겐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전략적 요충지인건 사실이었고, 이 도시를 상실하고 볼가강의 수로를 내준다면 소련이 위험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도시를 적에게 넘겨주기 거부했다. 그것은 이 독재자의 자존심의 보루였다.
(누구 콧수염이 더 강할까. 옆에서 보면 스탈린이 더 강해 보인다)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히틀러는 이 도시를 꼭 점령하려고 했다. 점점 이 전투는 이 콧수염 달린 두 독재자중 누구 콧수염이 더 센지를 겨루는 것 같은 양상으로 변해갔다.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 6군은 이 도시를 꼭 점령하려 했고, 소련 62군은 어떤 희생에서도 이 도시를 사수해야만 했다.
파울루스 장군은 처음에는 전투를 매우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피의 블랙홀 안으로 부하들을 진입시킨 순간 그들은 아무리 죽여도 다음날이면 더 많이 나타나는 소련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독일군의 장기는 넓은 평지에서 빠른 속도로 전투를 벌이는 기동전에 있었다. 그들에게 시가전은 낮선 영역이었다. 일단 그들이 이 도시로 들어간 순간 폐허가 된 도시에는 곳곳에 소련군이 숨어서 그들을 노렸다. 양군에서 모두 저격수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일단 폐허로 들어서는 순간 독일군은 그들의 장기인 기동성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 지루하고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시가전이 계속되었다.)
(소련 62군은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끝까지 버텼다. 그들은 병력의 80%을 잃는 경우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신병을 보충받아 싸웠다)
그래도 독일군은 정예한 군대답게 매섭게 소련군을 밀어 부쳤다. 그들은 곧 도시의 80%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20%는 끝내 장악할 수 없었다. 소련군은 볼가강에서 계속 넘어와서 엄청난 피를 뿌리며 이 도시를 지켰다. 소련 각지에서 기초적인 훈련만 받은 신병들이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했다. 어떤때는 심지어 그들에게 나누어줄 총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병사들은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를 보신분은 알겠지만 실제로 소련군은 그런 상태에서도 깃발만이라도 들고 나가야 했다. 이 도시를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은 그만큼 잔인하고도 절대적이었다. 스탈린은 이 도시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국민들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도시의 지키는 소련 62군의 사령관은 본래 알렉산드르 로파틴이었다. 그는 부하들이 너무 희생되자 부하들을 볼가강 동안으로 소개시켰다. 그 이유로 그는 면직되었고, 이를 이어 바실리 추이코프가 62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은 현명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어떠한 희생을 치뤄서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 - 참고로 그는 여러차례 부상을 당해가며 싸웠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지휘관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지휘하에서 모두 13500명이 용기 부족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차피 적인 히틀러로 부터 어떠한 자비도 바라기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그의 판단은 옳은 것이긴 했다. 그는 예레멘코로 부터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란 명령을 받자 "죽거나 사수하거나 둘중 하나"라고 말했다.)
여기에 새로이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 된 예레멘코와 정치위원인 흐루시초프도 손발이 잘 맞는 콤비로 좀처럼 독일군의 승리를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
히틀러는 거의 광분했다. 비록 전략 요충지일진 몰라도 본래 스탈린 그라드가 목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히틀러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카프카스 지역을 장악해야할 부대들이 소환되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차라리 이 도시를 우회하여 볼가강의 수로를 차단하자는 장군들의 애원도 히틀러에게 거부 당했다.
이러한 히틀러의 오판이야 말로 종국에는 독일군은 붕괴시키고 소련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제 최고 사령관 대리 및 부총사령관이 된 주코프는 참모 총장인 바실레프스키와 함께 스탈린그라드를 살릴 묘안을 가지고 스탈린을 찾아간다.
그 묘안이란 62군이란 미끼를 물고 계속 실랑이를 벌이는 독일군의 양 측면에 있는 약체인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을 격파해서 독일 6군을 포함한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천왕성 작전' 이라는 이 작전은 주코프의 입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실레프스키나 다른 소련군 지휘관도 이러한 아이디어는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독일군도 걱정했던 문제이니 아이디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45일에 걸쳐 100만 이 넘는 병력을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양측면에 집결시키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독일군 사령부가 소련군의 예비 병력이 더 없을 것이라 오판했기 때문이다) 주코프는 이 어려운 임무를 실행해 옮긴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독일군의 매서운 공세 앞에 45일이나 추이코프와 예레멘코가 더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전투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 주코프는 일부러 이들에게 이 사실을 몇일 전까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작전이 성공한 건 모든 장군들이 반대하는데 히틀러가 독일군은 계속 이 도시에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사 전문가들의 의견을 끝까지 무시한 히틀러가 일을 그르친 것이다. 스탈린이 적당한 시기에 실제적 지휘권을 주코프를 비롯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이양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다.
(천왕성 작전의 개요도)
1942년 11월 19일 100만 이상의 소련군이 남과 북에서 독일군 양측면의 루마니아과 이탈리아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들은 순식간에 스탈린그라드 주변을 장악해 계획대로 6군을 비롯한 독일군 33만명을 포위망에 가둔다. (위의 그림)
이 위기 상황에서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포위망을 뚫고 일단 빠져나오는게 정상일 것이다. 독일 6군의 지휘관인 파울루스는 물론 모든 독일군 장군들은 당연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상황을 완전 오판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스탈린 그라드 점령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고립된 군대가 계속 싸우게 할 수 있는 총통의 비결은 바로 항공기를 이용한 물자 공수였다. 괴링은 하루 500톤 이상의 물자 수송이 가능하다는 허풍을 쳤다. (그러나 나중에 연구된 바로는 사실 괴링도 이런 허풍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히틀러의 압력으로 괴링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건 누가 바도 허풍이었다)
한편 독일군 최고의 명장인 만슈타인에게는 급조된 돈 집단군을 이끌고 고립된 6군을 구원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급조된 집단군은 이름만 집단군으로 사실은 온갖 잡다한 병력이 모인 짜집기 군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휘관이 누구인가? 독일군이 아니라 2차 대전 통틀어 최고의 명장이라 할만한 만슈타인이다. 이 만슈타인이 공격을 가하자 주코프도 움찔 할 수 밖에 없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 - 이 걸출한 장군의 가장 큰 불행은 히틀러 같은 인물을 상관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짜집기 집단군은 소련군을 매섭게 몰아친다. '겨울 폭풍 작전' 으로 알려진 이 구원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 했다. 스탈린 그라드에서 불과 4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만슈타인이 전진하자 그는 파울루스에게 명령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은 요지 부동이었다. 그에게 이 도시를 포기하자는 옵션은 절대로 없었다)
결국 소심한 남자 파울루스는 총통의 눈치를 살피며, 연료 부족을 핑게로 포위망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주코프가 준비한 60개 사단과 1000대 이상의 탱크에 맞설 만한 병력이 없었던 만슈타인 장군은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결심한다. 자신의 부대까지 무너지면 그 때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진출한 A 집단군까지 갖히는 형국이 될 것이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군 전체가 와해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파울루스와 6군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소련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승리를 이루었다. 6군은 항복하고 독일군은 다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이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였다. 피를 빨아먹는 블랙홀같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은 이전의 오합지졸 군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군대로 재탄생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입증되었다.
32. 쿠르스크 전투
1943년, 독일은 또 한번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그것은 큰 상처를 입은 독일군이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무려 70만에 달하는 독일 노동자들이 군에 입대하였고, 독일군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병력을 어느 정도 재건할 수 있었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만슈타인의 선전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독일군이 하르코프등을 다시 재점령하고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 주변의 돌출부에 소련군이 집중되어 있는 점을 착안 이 돌출부를 양옆에서 절단해 들어가 포위한다는 이른바 치타델 (성채 : Zitadelle) 작전을 세운다.
본래 만슈타인의 의도는 적이 이 지역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전에 쳐들어가 적을 격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계획은 이번에도 군사 아마추어 히틀러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히틀러는 새로운 전차와 병력이 보급되는 6월 이후로 공세를 늦추기로 했다.
이 천금 같은 시기에 소련군 지휘부는 이번에는 41년이나 42년같은 오판을 다시 하지 않았다. 주코프는 쿠르스크가 독일군의 다음 목표일 것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선제 공격을 하고 싶어 했지만 주코프 원수는 잘 준비된 방어선 안쪽으로 독일 기갑부대를 유인해서 소모시킨 후 후방의 예비대를 동원 이들을 격파하자고 설득한다. 비록 스탈린이 히틀러와 닮은 꼴 독재자긴 하지만 그는 이번엔 주코프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1943년 7월 5일에 이르러서야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시작되었을때 독일군이 직면한 것은 아주 잘 만들어진 적의 요새화된 방어 진지였다. 다만 독일군의 공격도 매서웠다. 북쪽의 제9 기갑군을 이끄는 모델과 남쪽의 제4 기갑군을 이끄는 호트는 쿠르스크 돌출부의 양쪽으로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에서는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양측이 1000대에 달하는 전차를 동원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과거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차의 수가 600대로 제시되기도 했으나 최근의 연구에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이 때 700대나 되는 전차 (주로 소련 전차) 가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정예한 군대답게 잘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소련군도 더 이상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결국 독일군은 이번에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전투가 어이 없이 끝나게 된 것은 사실 히틀러 때문이었다.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병력을 돌리기로 결심하여 7월 13일 이 작전은 취소된다. 당시 만슈타인은 이 때가 아니면 소련의 주력을 격파할 수 없다고 거듭 설명했으나 허사였다.
사실 만슈타인 의견대로 전투를 계속했으면 결국 독일군의 승리로 마무리지어 졌을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히틀러의 후퇴 지시로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사실 막대했다. 독일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양측에는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손실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독일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본래 인적, 물적 자원에서 우위인 소련의 장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연합군의 전략 공습이 거둔 성과로 인해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군수 장관 슈페어의 선전에도 연합군 처럼 커질 수가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의 승리는 분명해 졌다. 독일군은 드네프르강까지 후퇴했다. 43년 11월 6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맞게 붉은 군대는 키에프를 탈환했다. 스탈린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불꽃놀이와 파티를 준비했다. 성대한 파티에 술까지 넘쳐나서 외교관들이 의식을 잃고 실려나갈 정도였다. 다만 아직 독일군은 그냥 무너지기엔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련군은 한번 더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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