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차와 세금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20년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영국의 대표적 기업으로 그 지위를 지켰다. 그런데 당시 동인도 회사의 주수입원은 이전의 캘리코에서 차(Tea) 로 바뀌고 있었다. 사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커피, 초콜릿, 캘리코, 면화, 차 등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수입하는 수입 종합 상사였다.
차가 영국에 처음 선보인 것은 1662년 영국으로 시집온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초창기 상류층의 음료였던 차는 1690년대 영국 동인도 회사 수입의 불과 1%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수입하는 차는 동인도 제도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시 수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데로 동인도 제도 현지는 네덜란드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차의 수입은 매우 불안정 했다.
따라서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중국과의 직무역을 하고자 했다. 1697년에 이르러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접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면서 후일 아편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중국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홍차)
1717년에 이르면 영국 동인도 회사는 중국으로 부터 정기적으로 차를 수입하게 된다. 그러므로써 차의 공급이 안정되고 가격도 떨어졌다. 이후 영국에서는 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차의 수입량은 1701 년에서 1706년 사이 35000 파운드에 지나지 않았으나, 1750년대에는 연평균 373만 파운드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총액도 169만 파운드에 달할 정도로 수입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력 상품이 18세기 후반부터는 차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수입된 차는 여러가지 생각치 못한 문제를 일으켰다. 앞으로 설명할 보스턴 차사건을 비롯해서, 밀수 문제, 그리고 종국에는 아편전쟁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문제를 일으킨 문제의 음료였던 셈이다. 물론 차가 아니라 차에 얽힌 인간의 탐욕이 문제지만.
아무튼 이렇게 1700년대에는 커피와 차를 비롯한 수입산 음료와 설탕등 기호품 및 섬유등 소비재 수입이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수입 회사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1720년대 남해 회사 위기를 극복한 영국 정부는 20년 이상 책임 내각제를 시행한 명수상 로버트 월폴 (Robert Walpole) 의 개혁아래 재정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월폴은 이 회사들이 수입하는 물품에 관세를 매겨 당시 빛더미에 올라선 영국 정부를 구제하고자 하였다.
(영국의 명재상 로버트 월폴)
그는 이런 수입 소비제에 대해 부과되는 관세 제도를 개혁하여 탈세를 차단하고 수입품의 관리와 검사를 엄격하게 했다. 이로써 관세수입은 영국정부 세수의 1/4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에 수입되는 소비재에 대해서 이와 같은 관세를 부과한 것은 일종의 소비세와 비슷한 세금이었다. 당시 과도한 수입으로 인한 금과 은의 유출을 막고 정부의 세수를 안정시킨 점은 매우 칭찬할 만한 업적이긴 했지만, 그러나 종국에 차에 매긴 세금은 정말 생각치 못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밀수였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차의 인기가 별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륙으로 막대한 차가 수입되었는데 이는 차를 영국에 밀수출하여 짭짤한 수입을 얻기 위해서였다. 본시 영국 동인도 회사와 악연이랄 수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물론이고 스웨던 동인도 회사, 덴마크 동인도 회사 심지어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이르기까지 서로 앞을 다투어 차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1773년에서 1782년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대륙에는 연평균 13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차가 수입되었는데, 이중 750만 파운드가 다시 영국으로 밀수출 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높은 관세를 물면서 (한 때 관세가 125% 에 이르기도 했다) 수입을 했기때문에 밀수입 차에 비해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영국에는 밀수된 차가 활개를 쳤다.
결국 1784년에 관세 개혁이 이루어져 차에 매기는 과도한 세금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금은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바로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23. 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
1756년에서 1763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진 7년전쟁의 결과로 영국 정부는 거대한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 특히 영국 정부는 국가 부채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했는데, 이를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종 세금을 늘려야 하는 상태였다.
7년 전쟁 당시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때만 해도 영국 정부와 영국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사이는 비교적 양호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세금을 늘리기 시작하자 이 둘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7년 전쟁 당시 세력도 : 파란색은 영국, 프러시아, 포르투갈 연합이고 초록색은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연합이다.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은 서로 싸웠다)
1764년, 영국 정부는 설탕조례 (Sugar Act) 를 통과시켜 이제까지 싼값에 서인도 제도에서 아메리카 식민지로 수입되던 설탕을 영국에서 관세를 물고 수입하도록 했다. 여기까지는 반발이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1765년 시행된 인지조례 (Stamp Act) 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폭발적인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학교 졸업장까지 포함된 각종 문서에 인지를 돈주고 사서 붙여야 한다는 법령에 엄청난 반대 여론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영국 정부는 한발 물러서 인지 조례를 사실상 폐지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금 안거둘 수도 없는 일. 다시 1767년 타운센드 조례 (Townshend Act) 라는 일련의 조례를 통해 영국 정부는 종이, 유리, 차, 커피등의 산물에 세금을 거두고 여기에 다시 강제적인 조항까지 첨부하자 식민지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당시 식민지인들은 '대표없는 곳에 조세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라는 유명한 문구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대표가 없는 영국의회가 멋대로 세금을 부과하는데 강력하게 항의를 하게 된다. 여기에 놀란 영국 정부는 타운센드 조례를 대부분 폐지하고 차에 대해서만 파운드당 3 펜스의 세금을 붙이기로 결정한다. 차에 대한 세금을 남겨둔 이유는 일단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영국 정부의 권한을 잃을까 두려워한 당시 노스 (North) 내각의 실수였다. 식민지에서는 이를 억압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세금은 식민지 관리의 임급을 지급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 수상인 노스경)
그러나 세금을 대부분 폐지해 주었는데도 영국 정부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관계는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는데,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바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차 조례 (Tea Act) 였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767년 당시 차에 붙는 관세는 25% 정도로 이전보다는 낮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이 세금을 다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로 네덜란드에서 무관세로 수입된 차를 밀수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메리카 식민지 상인들의 중요 수입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밀수였다.
이런 밀수입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차 무역의 독점 기업인 동인도 회사가 수입한 차중 영국내에서 소비되는 차에 대해서만 25%의 관세를 물고, 식민지와 유럽 국가에 수출하는 차에 대해서는 25%의 관세를 환급해주는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면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재수출하는 무역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772년 영국 의회는 세금을 좀 더 거둘 목적으로 환급금을 25% 전액에서 15%로 낮추게 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식민지로 다시 수출되는 차에 대해서도 10%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의미이다. 타운센드 세금에다 이런 관세까지 더해지자 영국 동인도 회사차는 밀수입 차에 대해 가격 경쟁력을 잃어 밀수업자들만 살판나는 세상이 되었다. 반면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가 안팔려 거의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안팔리는 막대한 수입차 재고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의회에 열심히 로비를 해서 차 조례 (Tea Act) 를 통과 시키게 만든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흔히 잘못알고 있기로 보스턴 차 사건의 발단이 무거운 세금 때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반대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다면 차 조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할 것이다.
1773년에 통과된 차 조례는 사실 바로 이 관세를 면제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즉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관세 없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차를 판매 할 수 있었다. 또 당시엔 동인도 회사가 식민지에서 직접 차를 판매할 수 없게 했는데, 이런 규제 조항도 삭제해서 동인도 회사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차를 직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이 조례는 결과적으로 밀수차를 없애고 동인도 회사의 독점 무역을 가능하게 해줄 것 처럼 보였다.
이는 현지 밀수업자를 포함한 상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싼값에 차를 들여오면 현지 상인들은 거의 고사될게 분명했다. 여기다 차 뿐만 아니라 다른 품목에 대해서도 이런 조치를 취하면 향후 식민지 상인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것이다.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었다가 취소했다가 해서 식민지의 반발 심리가 커진 상태에서 상인들 (이중에는 밀수업자도 포함되어 있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중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보스턴 차 사건이었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배가 항구에 들어오지도 못했지만 보스턴의 토마스 허친슨 주지사는 배가 들어오도록 허용했다. 차를 가득 실은 세척의 배 - 다트머스, 엘레노아, 비버 - 가 항구에 들어오자 결국 예견된 사태가 터졌다.
(보스턴 차 사건의 기록화)
1773년 12월 16일, 새뮤얼 아담스가 이끄는 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 가 모호크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배에 난입해서 342상자의 차를 바다에 버린 것이다. 거의 1만 파운드의 차가 버려진 셈이었다. 이들은 차만 버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손한 자물쇠는 변상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정부와 식민지의 갈등의 골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급기야는 미국 독립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사실 여기서 동인도 회사와 차의 역활은 2차적이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대표가 없어서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 영국 의회에 복종해야 하는 식민지 영국인들의 반발이 결국 독립된 의회와 주권을 가진 국가를 설립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역사의 한장면을 차지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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