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라트 알 누만 포위전 (Siege of Ma'arrat al-Numan 1098. 11 - 12)
1098년 여름 안티오크 전투 이후는 1차 십자군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다. 비록 어렵게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안티오크라는 전리품을 두고 지휘관들 사이의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차 십자군 내의 양대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툴루즈의 레몽 4세와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사이는 이제 거의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여기에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덮쳐 십자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벌써 원정이 시작된지 1년이 넘었건만 성지 탈환은 커녕 눈앞의 전리품을 두고 지휘관들이 분열되자 십자군 내에서도 다양한 갈등이 끓어올랐다. 일부 기사들과 십자군은 독자 행동을 할 움직임을 보였다.
사정이 이렇자 십자군 내에서도 심각한 위기 상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여론에 떠밀려 레몽과 보에몽은 마지 못해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안티오크 내에서 보에몽의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앞으로의 십자군의 지휘는 레몽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어느 정도 합의점이 찾아졌다.
1098년 가을이 되자 다시 십자군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실 십자군의 병력은 이미 1098년 7월에 남쪽의 다마스쿠스 방향의 무슬림의 주요 도시 - 현재도 시리아 서부의 중요 상업 도시이기도 한 - 인 마라트 알 누만 (혹은 마라 알 누만) 을 공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레몽 4세의 휘하 기사였던 레몽 필렛 (Raymond Pilet) 은 대규모의 무슬림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이후 다시 내분을 가라앉히고 전열을 가다듬은 십자군은 안티오크에서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점령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해서 1098년 11월 다시 이 마라트에 도달했다. 이 마라트 알 누만 포위전에서는 레몽과 보에몽의 십자군의 주력을 이끌고 이 도시를 포위했다.
당시 이 마라트는 잘 요새화된 도시였다. 마라트의 시민들과 수비대는 이미 이전의 십자군의 공격이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십자군이 스스로 패해 물러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의 기대에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일단 당시는 겨울이 다가오는 시절이었고, 십자군은 이전에도 흔히 그러했듯이 보급선이 거의 끊겨있는 상태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고, 주변의 원주민들은 이 이방인 침략자에게 순순히 식량을 넘겨주길 거부했다. 곧 십자군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직면했다.
따라서 11월 말 십자군이 도시의 포위를 완성했을 때도 마라트의 시민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포위가 길어지면 식량이 풍부한 마라트가 아니라 십자군이 큰 위협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나 식량을 조달하기 힘든 겨울이 다가오면 그 위기는 더욱 심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마라트의 시민들이 생각하지 못한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들 십자군들은 유럽에 있을 때부터 공성전의 전문가들이었고, 니케아와 안티오크에서 이미 처절한 공방전을 경험한 베테랑 들이었던 것이다.
십자군은 튼튼하긴 해도 니케아나 안티오크의 비할바는 못되는 마라트의 성벽을 보자 이번에는 충분히 공략이 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십자군은 2주간에 걸쳐 공성 타워 (Siege Tower) 를 건설했다. 이 중세의 공성 타워는 사실 고대 로마 시대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것이었다. 중세 암흑기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이 공성 타워는 중세인이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것이었다.
(중세 시대 사용하던 공성 타워의 삽화 :
Military Antiquities Respecting a History of The English Army from Conquest to the Present Time by Francis Grose, published by I. Stockdale, London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1세기에서 16세기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공성 타워의 구조도 This image comes from Dictionary of French Architecture from 11th to 16th Century (1856) by Eugène Viollet-le-Duc (1814-1879).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
마침내 공성 타워가 완성되자, 1098년 12월 11일 십자군은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성 타워가 성벽을 공격하는 동안, 다른 기사들은 방비가 허술한 반대쪽 성벽을 타고 성 내부로 들어갔다. 이제 누가 봐도 마라트의 함락은 기정 사실이었다.
(무슬림 병사의 머리를 투석기에 올려 적군의 성으로 공격하는 십자군. 당시 십자군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삽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사실 니케아 공방전의 그림이라고 한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에 성안의 시민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해볼 목적으로 보에몽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보에몽은 나름 계산을 가지고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아마도 이 성의 권리까지 차지할 속셈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직 레몽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일단 성이 함락되자 보에몽과 레몽의 해묵은 감정이 다시 폭발했다. 보에몽이 마라트의 성벽과 탑들을 장악하자 레몽은 성 내부를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단 굶주린 십자군이 쳐들어가자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미 항복한 시민들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다. 사실 이와 같은 약탈과 학살은 십자군의 통상적인 행동을 볼 때 별로 특별한 것도 없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당시는 약탈이 승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되었고, 기회가 되면 무슬림들도 약탈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라트의 학살이 당대에 큰 충격을 준 이유는 다른데에 있다. 그것은 당시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십자군들이 학살당한 무슬림들의 시체를 먹었다는 믿을 만한 기록과 증언들 때문이었다. 비록 민중 십자군도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때의 식인은 좀 더 대규모이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이 마라트의 식인 (Cannibalism of Ma`arrat) 은 특히 무슬림들에게 - 그리고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에게도 - 큰 충격을 주었다.
근대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등지의 오지의 원시 부족들을 무시무시한 식인종으로 묘사하곤 했지만 사실 중세의 이슬람 작가들은 이 프랑크인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그렇게 불렀다) 들을 잔혹한 식인종으로 종종 묘사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 마라트의 식인은 엄청난 충격을 준 잔학 행위였다.
그러면 이들의 기록을 믿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무슬림 측의 기록 뿐 아니라 서방측의 기록도 같이 확인해 봐야할 것이다. 일년 후 교황에게 보내진 십자군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저희들은 심각한 기아에 직면에서 죽은 사라센인들의 몸을 뜯어 먹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건에 동시대에 살았던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십자군 연대기 작가인 라울 드 캉 (Ralph of Caen - Gesta Tancredi in expeditione Hierosolymitana 의 작가이며 노르망디의 로버트와 보에몽을 수행한 성직자임) 에 의하면 "이교도 어른들은 솥에 넣어 끓여 먹었고, 아이들은 꼬챙이로 꿰어 석쇠에 구워 먹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보두앵을 따라 십자군에 종군했으며, 클레르몽 공의회 부터 십자군에 참가한 십자군 연대기 작가인 풀처 (Fulcher of Chartres) 에 의하면 - "나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해 미쳐서 이미 죽은 사라센인들의 엉덩이에서 살을 떼어서 불에 구워서 먹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채 다 익지도 않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과 그들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그리고 당시 아랍권의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마라 혹은 마라트에서 식인 행위가 일어난 것은 거의 명확한 듯 싶다.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까지 없는 사실을 지어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마라트 알 누만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1- 2만 정도인 듯 싶다. 물론 정확한 사망자 수와는 관계없이 이 행위는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행위였다.
16. 아르카 포위전 (Siege of Arqa 1099년 상반기)
일단 마라트에서의 십자군의 충격적인 행동은 의도한 바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십자군에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이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에 경악한 무슬림들이 왠만하면 이들과 싸우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의 반독립적인 도시와 지방 영주들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십자군과의 싸움을 피하려고 들었다.
모술의 지배자 카르부카는 몰락했고,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와 알레포의 리드완은 자기들끼리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파티마 왕조는 아직도 십자군을 수니파와 싸우는 잠재적 동맹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실 개별 도시와 영주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싸움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예루살렘이라고 공언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고자 하는 이 지역 군주들은 기꺼이 이 침략자들에게 식량을 보급해 주었다. 식량도 소중했지만 목숨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십자군을 도와주면 저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침략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특히 지중해에 면한 몇몇 수니파 지도자들은 시아파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십자군을 선택할 심산이었다. 한편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미 약화된 투르크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빼앗았다. 그러니 이 시기에도 역시나 무슬림의 가장 큰 적은 무슬림으로 간주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무르익자, 1099년 1월 5일 이미 폐허로 변한 마라트의 성벽을 무너뜨린 레몽은 1월 13일 남쪽으로 다시 행군을 서둘렀다. 마라트 자체가 작은 도시인데다, 당시 십자군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십자군을 선두에서 이끈 것은 레몽 4세였다. 여기에 아직까지 좀 부유했던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도 동행했다. 탕크레드, 플랑드르의 로베르와 고드프루아는 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 내키지 않는 원정에 참여했다.
사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이제 형편이 좀 바뀌어 이전에 헝가리에서 볼모로 내주었던 사랑스런 막내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 1세의 새로운 영지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이제 세상의 쓴맛을 좀 본 고드프루아는 성지 탈환이라는 너무나 어려운 임무를 지속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보에몽과 보두앵은 각기 차지한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장악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특히 보두앵 1세는 무거운 세금을 물려서 이전의 인기없는 지배자 토로스 처럼 인기가 떨어졌으므로 사실 좀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니 보두앵은 이번 원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1099년 초반의 이렇게 복잡한 십자군의 상황은 레몽의 탐욕 때문에 한층 더 복잡했다. 일단 1월달에 출발한 레몽의 목표는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중해에 연안의 도시인 트리폴리 (Tripoli - 지금의 레바논 북쪽의 도시) 였다. 사실 레몽의 목적은 안티오크 공국을 차린 보에몽 처럼 트리폴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가까운 도시인 아르카 (Arqa) 를 먼저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아르카는 트리폴리 북동쪽 2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레바논 북부의 지역이다)
하지만 이 뻔한 야심을 알고 있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이 내키지 않는 포위전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레몽 4세의 가신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의 지휘를 거부했다. 여기에 보에몽도 이들의 부대에 같이 참가했다. 1099년 2월, 라타키아에서 그들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렇게 다시 십자군은 또 분열되었다.
한편 역시나 안티오크의 영지가 걱정되었던 보에몽은 곧 이 부대에서 이탈하여 안티오크로 귀환했고, 그 뒤엔 조카인 탕크레드가 종군했다. 한편 십자군의 일부 부대는 레몽 4세의 지휘를 받은 가스통 4세 (Gaston IV of Béarn / Viscount) 가 이끌고 남하했다.
한편 아르카의 레몽은 의외로 강력한 트리폴리의 에미르가 이끄는 군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르카는 거듭된 공격을 잘 방어했다. 결국 나머지 십자군 부대도 이 강한 적을 측면에 놔두고 가기 어려웠기 때문인지 다시 아르카로 반전했다. (1098년 3월)
어려운 적을 맞아 고드프루아, 로베르, 탕크레드, 가스통이 이끌던 부대가 다시 레몽의 군대와 합쳐졌다. 그러나 아르카의 무슬림들은 용감하게 잘 싸웠다. 4개월간 연속되는 포위로도 이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레몽이 트리폴리군과 동맹을 맺는 대신 점령하기로한 계획은 아주 큰 잘못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트리폴리의 에미르 - 잘랄 알 물크 - 는 최초에 십자군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아마 이 수니파 무슬림 지배자는 십자군보다는 셀주크 제국의 분열과 십자군의 침입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다시 북상하고 있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더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는 십자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고 길을 내줄 심산이었다.
에미르는 아르카 포위전이 시작되기 전에 바로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레몽을 포함한 십자군 사절단을 이 부유한 레바논의 도시에 초대했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화려함과 부유함을 본 십자군의 머릿속에는 동맹이나 식량 보급은 이미 과거 진행형이었다. 이제 그들의 최대 과제는 이 트리폴리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사실 십자군은 이 도시를 함락하는 일을 매우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트리폴리의 무슬림 전사들은 용감이 맞서 싸웠고, 이제 십자군은 트리폴리는 커녕 아르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레몽의 인기는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먼저 공격했다면 명분을 바탕으로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노린 경쟁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탐 대실이라고 작은 탐욕이 대업을 망친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이 때의 레몽이 그랬다. 결과적으로 레몽의 근시안적인 탐욕 덕분에 나중에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 고드프루아만 좋은 일 시킨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기 레몽의 지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미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레몽이 지지하던 피에르 바르톨로뮤 - 이전에 안티오크에서 성스러운 창을 발견한 수도승 - 의 몰락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1098년에 십자군의 영적인 지휘관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한 이후 십자군에는 딱히 영적인 지휘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종교적인 목적도 지닌 - 앞서 이야기 했듯이 탐욕 만이 십자군을 이끈 원동력은 아니었다 - 군대에 있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에 성창을 찾은 피에르 바르톨로뮤는 자신이 바로 신의 계시를 받은 성직자인 양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기전까지의 아데마르 주교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피에르가 협잡꾼에 불과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에 피에르는 아데마르 주교가 죽은 후 자신이 다시 계시를 보았는데, 아데마르 주교 자신이 피에르가 찾은 성창은 진짜라고 말했다고 이야기 했다. (여기에 아데마르가 성창의 존재를 의심했기 때문에 잠시 지옥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고 한다)
고인을 욕되게 하는 말을 들은 많은 이들이 그를 의심하자 이제 피에르는 성 안드레아는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 까지 자신에게 와서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가 전하는 계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맨발로 예루살렘까지 행군하라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군의 행동에 분노하고 계신다든가하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그는 아르카를 공격해야 하며 아르카의 함락은 계시로 확인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레몽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였으므로 많은 이들이 그를 더 의심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피에르 바르톨로뮤는 더 극단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신의 기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죄법 (試罪法 - Trial by Ordeal) 혹은 신명 재판이라는 이 시험은 과거 튜튼 족 사이에 내려오는 민간 재판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은 무죄로 해준다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불속을 맨발로 걸어서 살으면 무죄라든가 손발을 묶고 물속에 던저서 살면 무죄라든가 하는 방법이었다.
(나중에 등장하는 마녀재판과의 차이점은 살아남는 무죄도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마녀 재판의 경우 불속을 맨발로 걸어서 죽으면 무죄였고, 불속을 맨발로 걸어서도 살면 마녀라는 확고한 증거로 채택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선택한 것은 불에의한 시죄법이었다. (Ordeal by Fire) 아마 그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점으로 봐서 나름대로 자기 자신은 정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은 것 같았다. 1099년 4월 8일, 그리스도 수난일인 성금요일 (聖金曜日:Good Friday) 에 피에르는 두개의 불기둥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두개의 불기둥 사이를 걸어들어가는 피에르 바르톨로뮤 - Gustave Doré (1832-1883) 작 Barthelemi undergoing the Ordeal of Fire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결과적으로 피에르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가 진실되지 못하게 신을 이름을 빌려 계시를 내린 탓인지는 모르지만 12일간 화상으로 인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신의 자비로 사망했다 (1099년 4월 20일)
이 일은 결국 피에르 바르톨로뮤를 지지하던 레몽의 지도력에 더 큰 치명타를 가했다. 더구나 결국 1099년 5월에 아르카 포위전에 실패하고 포위를 풀고 물러났기 때문에, 십자군의 승리를 보장한다던 성창의 진위까지 다시 한번 크게 의심 받았다.
레몽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탐욕을 후회하면서 후퇴했다. 레몽은 아르카 포위전의 실패로 더 이상 십자군 전체의 지휘권을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한편 십자군의 잔존 세력은 다시 한번 집결해서 그들의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이제 예루살렘 포위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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