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바르나 십자군의 시작
중세 시대 역대 교황들은 다양한 형태의 십자군을 주도했다. 물론 이 십자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바르나 십자군이 일어난 15세기 중반은 이미 마지막 십자군 요새가 바다로 밀려난지 1세기 반이 흐른 시점으로 이 시기에는 더 이상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같은 것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장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압박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유럽 세계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기 위해서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1396년 충격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한동안 유럽에서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에게는 천만 다행으로 티무르의 오스만 침공 이후 오스만 제국이 내분을 겪어 한숨은 돌릴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유럽으로 치고 들어오자 다시 유럽 사회가 긴장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특히 헝가리처럼 바로 옆에 있는 국가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1431년 즉위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Pope Eugene IV)는 십자군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침 1440년대 초반은 이를 위한 적절한 시기인 듯 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초상화 Portrait of Pope Eugenius IV, after Jean Fouquet.)
헝가리에서는 내전이 마무리되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가 국왕 자리에 올라 현재의 동유럽 상당 부분을 장악한 폴란드 - 헝가리 동군 연합을 결성했다. 또 헝가리에서 대 오스만 전선의 최전방을 담당한 트랜실바니아 공 야노스 훈야디는 1441년에서 1442년 사이 오스만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둬 사기가 올라 있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 역시 교황과 서방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도움 역시 기대할 수 있었다.
이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43년 1월 1일 교황 연두 교서에서 현재 오스만 제국이 매우 약화된 상태라는 (물론 희망 사항이지만...) 견해를 피력하면서 지금이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을 축출할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했다. 교황이 이와 같은 희망을 품었던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자주 반기를 드는 카라만 왕조(Karamanids) 와의 협공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 초기의 카라만 조의 세력. 참고로 지도에서 북쪽 발칸 반도 지역들은 오스만의 봉신들이었다.
교황이 믿는 다른 한축은 물론 헝가리였다. 사실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의 잠재적인 도움 역시 기대되었다. 새로운 국왕을 젊었지만 아무튼 오스만 제국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큰 공적을 세울 의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국왕보다 군사적으로 더 믿음이 가는 쪽은 역시 대 오스만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훈야디였다.
훈야디는 오스만 군을 상대할 독특한 전술을 발전시켰다. 훈야디는 후스파와의 전쟁에서 나왔던 마차를 이용한 이동 요새 전법을 구사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베겐부르크(Wagenburg)라고 불리는 이 전술은 여러대의 마차들을 엮어 일종의 이동식 조립 요새를 만드는 것으로 그 기원은 종교 전쟁 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전술을 볼 수 있다.
(후스파의 베겐부르크 The Hussite Wagenburg. 15세기 삽화)
일단 이런식의 마차 요새가 생기면 기병으로도 쉽게 적을 공격할 수 없었는데 훈야디는 이 방식으로 우세한 병력을 지닌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큰 피해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이런 마차는 제대로 된 도로가 별로 없는 중세의 도로 환경과 산악 지형에서는 오히려 기동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으나 대 오스만 전은 대부분 방어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훈야디가 연거푸 큰 승리를 거두자 유럽 세계는 다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끼던 주변국들과 튜턴 기사단까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유럽에는 범유럽 십자군이 형성되었다.
1443년 결성된 바르나 십자군(Crusade of Varna)은 헝가리군이 주축이 되었어며 여기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불가리아 반군, 튜튼 기사단, 교황청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병력 구성은 헝가리/폴란드/보헤미아 군이 약 15000 정도의 병력으로 주축을 이뤘으며, 여기에 왈라키아 역시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7000명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잡다한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과거와는 달리 영국/프랑스/신성로마제국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왈라키아의 참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왈라키아는 훈야디가 세운 괴뢰 정권 수반인 바사라브 2세가 축출되고 다시 미르세아 2세와 블라드 2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정권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이들은 바르나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이들 부자는 기지(?)를 발휘했는데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충성을 지키면서 미르세아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바르나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볼모로 잡혀있는 두 아들 - 블라드 드라큘라와 라두 미남공 - 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다행히 1443년에는 이런 연극이 어느 정도 통했던 게, 왈라키아에서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므로 십자군에서도 뭐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고, 무라드 2세도 당시에는 평화를 고려하는 중이어서 인질을 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 바르나 십자군의 진행
1443년 바르나 십자군의 초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카라만 왕조와는 협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십자군의 초반 진격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을 맞이한 오스만의 지휘관인 카심 파샤(Kasim Pasha)와 그의 동료인 투라한 베이(Turahan Bey)는 자신들의 기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수도인 소피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도망만 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과 식량을 모두 징발하거나 불태웠는데, 적이 대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온 만큼 장기전에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오스만 군은 점차 십자군을 안쪽으로 끌어 당겼는데 이는 십자군에 승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던 것 같다.
결국 1443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시작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충분한 월동 준비가 어려웠던 십자군은 곧 겨울의 혹한을 적진에서 버텨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십자군은 1443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불가리아의 즐라티차(Zlatitsa)를 지나면서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 전투 이후 십자군은 이전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얻었는데, 드라고만(Dragoman)에서 마흐무드 베이(Mahmud Bey) 가 있끄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오스만군보다는 십자군의 피해가 더 막심했으나 이와 같은 성과는 십자군에게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가져왔다.
따라서 1444년, 다시 헝가리로 귀국했을 때, 헝가리 군은 무라드 2세의 휴전 제의를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 은퇴를 고려중이던 무라드 2세는 십자군, 특히 헝가리의 국왕과의 휴전을 간절히 희망했다. 결국 1444년 상반기에 사절들이 서로 오가는 가운데 평화 협상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국왕은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교황의 특사인 추기경 줄리앙 세자리니(Julian Cesarini the Elder)는 국왕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교황이 원하는 것은 1444년에도 십자군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국왕는 국내외적으로 강한 압박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계속해서 헝가리 왕위를 요구하는 유복자 라디슬라우스(Ladislaus the Posthumous) 지지자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위험도 있었다.
참고로 라디슬라우스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의 보호아래 있었다. 황제가 그를 보호한 이유는 사실 라디슬라우스의 왕위 계승권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브와디스와프 3세가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황제가 움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폴란드 - 헝가리 국왕이란 자리는 명칭은 멋있지만 사실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만큼 그 위치는 생각보다 불안했다.
결국 1444년 8월 15일, 양국간의 평화 협정이 맺어지긴 하지만 이 평화 협정은 잠시 후 휴지조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바로 술탄 무라드 2세이다. 술탄은 독특하게도 이제는 평화와 휴식을 진정으로 원해서 카라만 왕조 및 헝가리와의 평화 협정이 맺어지자 왕위를 아들은 메흐메트 2세에게 넘기고 자신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술탄이 왕위에 오르자 헝가리에서는 이를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정통성 없는 통치자가 없는 정통성을 마련하려면 전쟁 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결국 무라드 2세의 양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성경과 코란을 걸고 한 맹세를 헌신짝 처럼 던저 버리고 다시 십자군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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