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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9





16. 공격측의 준비 


 역사상 아크레를 공격했던 많은 시도들은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앞서 여러차례 설명한 천혜의 요새로써의 특징들 때문이다. 따라서 아크레는 레반트 (지중해 동부,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분수령을 만들어 냈는데 중요한 아크레 포위전 (Siege of Acre) 만 생각해봐도 3 차 십자군 (1189 - 1191), 최후의 십자군 (1291),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1799), 오토만 제국 내전 당시 (1821), 오토만 제국 - 이집트 전쟁 (1832)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실상 근대화로 인해 성벽의 가치가 거의 사라지기 전까지 이 요새도시는 그 점령하기 어려움으로 인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이 도시가 매우 점령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3차 십자군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앞서 이야기 했듯이 3차 십자군 이후로 예루살렘 왕국 망명 정부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도시의 방어는 한층 견고해져 그야말로 난공불락, 금성탕지의 요새였다. 그로인해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은 팔레스타인 해변가에 다른 도시들은 대부분 함락시켜도 그 한가운데 위치한 이 도시만큼은 번번이 함락시키는데 실패했다. 


 이전에 여러차례 맘루크 조 술탄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했던 도시를 공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임 술탄 알 아슈라프 카릴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일단 무슬림 보호를 위해 성전을 일으킨다는 명분하에 시리아와 이집트 각지에서 병력을 모아들였다. 각지의 태수들이 이 부름에 응해 병력을 모아 집결했는데 역사상 기록에 의하면 16 만의 보병과 6만의 기병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전성기 시절의 살라딘조차 동원하지 못했던 병력이고 과거 훌라구가 이끌고 서남아시아를 유린했던 병력보다 많기 때문에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맘루크조의 사정을 고려할 때 수만명의 병력을 편성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므로 일단 성을 방어하는 측을 압도할 수준은 충분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크레는 삼각형으로 바다로 돌출된 지형에 건설되어 있어 육지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크게 보면 거의 삼각형의 한변만 지상군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실 10 만이 아니라 100 만 대군이라 할 지라도 한번 공격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매우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순수 보병으로 사다리를 이용하여 올라가는 전법은 높은 지형에 건설된 성벽 때문에 불리했으며 공성탑 역시 비슷한 이유로 활용이 어려웠다. 


 이전에 아크레를 공격하는데 검증된 방법은 바로 투석기와 공성 지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카릴이 택한 방법은 바로 투석기였는데 중세의 투석기는 병력보다는 성벽을 부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어디든 성벽이 무너지면 이곳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해 공성전을 마무리 짓는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1290 년 - 1291 년 사이에 많은 목재를 베어 100 대 정도의 투석기가 완성되었다. 


 술탄이 걱정한 것은 포위전이 장기화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집트와 시리아가 빈틈을 타고 외적이 처들어올 가능성도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식량 조달 문제와 질병 창궐의 우려가 있었다. 실제 3차 십자군 당시 증명되었듯이 상당수 병사가 오랜 포위전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사실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끌고 왔으므로 빨리 결판을 내야지 3차 십자군 당시 처럼 2년 이상 끌게 되면 설령 이긴다 해도 작은 도시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너무 엄청난 손실을 강요당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끌고가려는 십자군 측과 이를 빨리 해결하려는 맘루크 군 측 전략은 좀 지나치게 말하면 아크레의 성벽이 튼튼한지 아니면 투석기가 더 강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100 대의 투석기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맘루크 군은 아크레를 향해 진격해 1291 년 3월부터 그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7. 아크레 포위전 


 아크레 포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291 년 4월부터이다. 1291 년 4월 5일. 하마의 태수가 이끄는 병력이 성전 기사단의 탑 (Templar's Tower) 앞에 병력을 주둔시켰고 이집트에서 온 주력 부대는 Montmusard 의 끝에서 아크레 만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디흐리즈 (Dihliz) 라고 불리는 술탄의 붉은 텐트 (사령부를 겸하는 의미) 는 교황 특사의 탑 (Tower of the Legate) 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에 그 자리를 잡았다.  




(1291 년 당시 아크레 공방전 시점에서의 지도  


 공격 위치를 잡은 다음날인 4월 6일 마침내 맘루크 군의 투석기에서 아크레의 성벽을 목표로 엄청난 돌 포탄 세례가 쏟아졌다. 물론 방어하는 측도 당하지만은 않고 육지에서는 물론이고 바다에서도 투석기로 응사했다. 다만 이 경우 시간이 흐를 수록 공격하는 측이 더 유리해졌다. 왜냐하면 많은 인원으로 인해 투석기를 쉬지 않고 포병을 교대해 가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전 시작 후 8일간 아크레의 성벽에는 돌 포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가 않았다. 


 이 공격후 자신감을 얻은 맘루크 군은 본래 공격선에서 더 앞으로 전진해서 성벽에 상당히 근접했다. 그런 만큼 투석기 공격은 더 거세질 상황이었다. 또 충분히 가까운 위치에 이르게 되면 여기서 부터 성벽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다. 비록 이 시기에 키프로스 왕국에서 지원병력이 도달하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크레의 성벽도 적의 투석기의 공격을 결국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십자군 측은 비장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특공대였는데 야간에 기사들을 주력으로 구성된 특공대가 적의 투석기를 파괴시키거나 혹은 불태우기 위해서 출격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시도는 4월 15일 이었는데 재수없게도 무슬림 군대의 막사 줄에 말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들통나 적지 않은 병력만 손실하고 말았다. 수일 후 시행된 2차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미리 준비된 맘루크 군대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월 5일, 마침내 키프로스 왕국의 앙리 2세가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병력을 태우고 40 척의 배와 함께 아크레 항에 도달했다. 따라서 의기 소침했던 방어군은 잠시나마 다시 희망을 되찾지만 곧 이들을 포함 앙리 2 세 역시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식으로 투석기의 공격이 계속되면 2차 성벽까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곧 십자군 측에서 마지막으로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을 본 알 아슈라프 카릴은 항복하려는 의사로 생각했는지 도시의 열쇠를 가져왔는지 물어왔다. (중세 서양에서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는 것이 도시가 항복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절들은 아크레가 그렇게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은 다만 고통받는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왔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이어 이들은 신뢰를 회복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그냥 휴전 협상을 위해 왔음을 밝혔다. 술탄은 십자군이 평화롭게 도시를 양도한다면 누구도 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물론 이 대답은 사절단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말 최후에 순간에서야 항복하거나 혹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매우 타이밍이 좋지 않게도 마침 아크레에서 발사한 투석기가 술탄의 텐트 옆에 돌을 날렸다. 이를 본 카릴은 사절단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들 중 2명을 죽이라고 명했으나 옆에 있던 에미르의 만류로 사절단은 다행히 목숨만은 보전해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로써 아크레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투석기의 맹렬한 공격과 더불어 충분히 가까운 위치까지 군대를 진격시킨 맘루크 군은 5월 8일 부터 탑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거나 점령했다. 뒤집어 말하면 십자군이 탑들을 하나씩 포기했다. 상황은 이제 함락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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