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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13





24. 본토 상륙 


 십자군 잔존 세력 (삼대 기사단 및 키프로스 왕국) 이 수복 대상으로 삼을 만한 요새들은 해안가에 건설되어 일단 침공 및 방어가 용이한 것들이었다. 그 대표적 후보는 바로 아틀릿 요새 (Citadel of Atlit) 이었다. 이 요새는 본래 성전 기사단이 5차 십자군 시절 건설했던 것으로 현재의 이스라엘 하이파 (Haifa) 북쪽 해안 13 km 지점에 있었다. 최대 4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해안가 성채로 과거 성전 기사단의 주요 요새가운데 하나였으나 1291 년 아크레 함락 이후 어쩔 수 없이 맘루크 조에 내주어야 했던 요새다. 


  

(아틀릿 요새의 잔해로 본래는 훨씬 큰 성채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많이 붕괴된 상태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Atlit_fortress001.JPG ) 


 또 다른 요새는 바로 토르토사 (Tortosa) 의 성채로 비록 성지에서는 약간 멀었지만, 루아드 요새 및 키프로스에서 더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크레 자체는 너무 견고한 성채이기 때문에 현재 그들이 가진 병력으로 점령은 물론 설사 점령한다 쳐도 방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요소들을 감안한 끝에 첫번째 목표는 바로 토르토사로 정해졌다. 이 요새는 사실 트리폴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 거사를 실행하기 전 십자군 내에서 트러블이 발생했다. 그것은 앙리 2세와 성전 기사단 과의 갈등이었는데 사실 이전 기사단장인 기욤 드 보죄 시절부터 이들의 사이는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훗날 성전 기사단이 키프로스 왕국의 권력 투쟁에까지 간섭하게 되는 이야기는 지금 내용과는 연관이 없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아무튼 기사단과 키프로스 왕국 역시 사이 좋게만 지낸 건 아니었다. 


 아무튼 훗날 필리프 4세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마지막 성전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 ( Jacques de Molay) 와 왕의 동생인 아말릭은 1300 년 11월 600 명의 병사 (그중 150 명이 성전 기사단) 을 이끌고 상륙을 시도했다. 이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토로토사를 공략했는데 사실 병력 규모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1300 년 말에 오기로 했던 가잔 칸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토르토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기사 사소한 계산 착오가 발생한다. 즉 가잔 칸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기는 했는데 1300 년 11월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몽골군의 진격이 늦어지자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토르토사 점령 25일 만에 루아드의 전진기지로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군이 시리아에 도착한 것은 1301 년 2월이었는데 여기에는 이전처럼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의 국왕 헤툼 2세가 이끄는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병력에는 자파 백작인 기 (Guy of Ibelin) 이 이끄는 소수의 십자군 잔존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군 장군인 쿠틀루스카 (Kutlushka) 는 여기서 병력을 합친후 안티오크 남쪽을 경유해 병력을 남하시켰다. 


   

(1300 - 1301 년의 전쟁 상황. 녹색으로 표시된 십자군의 진격은 붉은 색으로 표시된 몽골군의 진격에 한발 앞섰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HGCOM ) 


 이번에 몽골군은 6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기세 좋게 남하했으나 다시 일한국쪽에 문제가 생기는 덕분에 회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일은 매우 비일 비재했는데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일 한국이 사방에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차카타이 한국을 비롯 킵차크 한국등 같은 몽골계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튼 이렇게 벌집을 건드리고 몽골군이 퇴각한 덕분에 오히려 루아드의 요새에서 버티던 십자군의 존재만 크게 부각되고 말았다. 



 25. 루아드 함락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자크 드 몰레는 급전을 보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새로운 지원군과 물자를 요청했다. 그리고 다른 유럽의 유력자에게도 급전을 보냈으나 역시 반응은 없었다. 결국 성전 기사단은 독자적으로 방어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루아드의 요새는 기본적으로 성전 기사단에 요새였고 1301 년 11월에 교황은 교서를 내려 공식적으로 성전 기사단의 요새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병력은 하나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자크 드 몰레이는 120 명의 기사와 500 명의 궁수, 400 명의 종자로 이 성을 방어하게 하고 요새를 보수했다. 그리고 다시 가잔 칸이 병력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1 년 이상 버틸 수 있었다면 시간에 맞출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번엔 맘루크 조 측에서 그런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다. 알 나시르 무함마드는 병력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지만 대신 계속해서 귀찮게 구는 십자군 잔존 세력들을 이번 기회에 아애 없애버려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술탄은 16 척의 갤리선으로 함대를 이집트에서 트리폴리로 파견했다. 그리고 여기서 루아드에 상륙해서 요새를 포위했다. (1302 년) 이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크레 포위전 때와는 달리 베네치아 같은 해상 도시 국가들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텐데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치아 등은 아크레에는 큰 투자를 했지만 루아드에는 전혀 투자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맘루크 조에 해군이 없다고 생각하고 방심하던 십자군으로써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비록 키프로스 왕국도 소규모 해군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루아드 공방전에서는 맘루크 함대를 압도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당시 지중해의 해양 패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는 같은 기독교 형제들이 당하는 것을 구경만 했다. 상인들의 국가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이익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사실 그것이 그들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결국 포위가 길어지자 성채의 식량도 바닥이 나고 수비대는 굶주리기 시작했다. 1302 년 11월 26 일. 십자군 측은 퇴각을 보장한다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맘루크 군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맘루크 측은 십자군을 신뢰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아크레가 함락된 후 12 년이 지난 1303 년경 루아드는 함락되었고 (약간 시점이 확실치 않은데 1302 년 말일 수도 있다) 일부 이집트로 끌려간 기사 외에 나머지는 모두 처형되었다. 


 성전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는 루아드에 없었기 때문에 무사했으나 상당수의 병력을 잃은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다만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성전 기사단의 재산은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들의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잔 칸 뿐이었다.



 26. 마지 알 사파 전투 ( Battle of Marj al-Saffar ), 그리고 종말   


 1303 년 마침내 가잔 칸은 8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의 재위 기간 중 3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맘루크 조 침공에 나선다. 이번에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간것은 아니었고 그의 장군인 쿠틀루-샤 (Qutlugh-Shah) 및 물레이 (Mulay) 에게 병력을 지휘하도록 명했다. 1차 목표는 시리아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알레포는 물론 하마의 주민들까지 다마스쿠스로 피신했다. 몽골군의 잔인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였기 때문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술탄에게 급전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 알 나시르 무함마드는 3차 홈스 전투의 설욕을 위해 이집트에서 출격했다. 이들이 이끈 병력의 규모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몽골 군보다는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군이 다마스쿠스에 당도할 무렵에는 몽골군이 하마를 공격하던 중이었다. 술탄이 북상했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군은 바로 다마스쿠스로 진격해서 다마스쿠스 근방의 마지 알 사파 평원에서 적과 마주쳤다. 이 때가 1303 년 4월 19일이었는데 이 때는 라마단 기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맘루크 군에게 오히려 더 용전 분투할 상황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투는 다음날인 4월 20일 시작되었는데 초반에 쿠틀루 샤의 공격으로 맘루크 군의 우익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맘루크 군의 중앙과 좌익은 전진해서 몽골군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오른쪽을 파고 드는 몽골군의 공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이 전투가 맘루크 군의 승리로 반전된 것은 쿠틀루 샤가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목적으로 근처의 언덕에 오르면서 부터다. 이 시점에서 이집트 군은 언덕을 둘러싸고 공격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골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처음부터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시작한게 아니라 유리한 위치를 전투중에 선점하려 무리하게 기동한 것이 실수였다. 


 결국 그 다음날까지 몽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자 신속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맘루크 조의 대승리였다. 그리고 사실상 몽골의 시리아 침공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이기도 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부터 마지 알 사파 전투까지 대부분의 전투를 우세하게 진행했던 맘루크 조는 결국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가잔 칸은 승하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맘루크 조 침공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거듭되는 실패에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 등의 경계를 국경선으로 정했고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지역과 지금의 이라크 일부 지역은 맘루크 조의 영토로 인정되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맘루크조 영토와 푸른 색으로 표시된 일 한국 영토   CC-BY-SA-2.5,2.0,1.0; Original uploader was Arab League  )


 이는 몽골 제국의 서진을 막은 중요한 사건이었고 넓게 보면 맘루크 조가 몽골족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한 셈이지만 이 결과가 모든 이들에게 행복한 사건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군이 시리아를 점령하면 이와 동시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궁리를 하던 십자군 잔존 세력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이 전투의 최종적인 결과로 십자군이 성지를 되찾을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셈이었다. 사실 좀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면 이미 12 세기 후반에 성지를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진 것과 같았지만 이 때까지 인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에도 무모하게 십자군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이집트 침공을 시도한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대개 정말 의미없는 내용이라 그것까지 설명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십자군의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것만 알아두자. 


 사실상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은 진작에 끝난 상태라고 할 수 있었고 일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결국 하나씩 사라졌다. 아마도 그중에 가장 극적인 것은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성전 기사단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그 재산이 필리프 4세에게 몰수 당한 사건일 텐데 이 일은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노린 계획적 음모로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알려졌다. 


 병원 (구호) 기사단은 이보다 더 오래 버텼는데 사실 그들은 현재까지도 존재하며 사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로도스 섬에서 몰타 섬으로 이동해가면서 무슬림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으나 상징적인 의미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다음에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마무리와 십자군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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