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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11







20. 최후의 요새 루아드 (Ruad)


 대개의 역사가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최후를 1291 년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은 확실히 맞는 이야기이다. 사실 그전 수십년간에도 거의 명맥만 유지하던 상태긴 했지만 일단 망명 정부의 수도 역활을 하던 아크레가 함락되고 주변의 다른 십자군 도시와 요새들도 그 후 수년 사이 대부분 함락되었기 때문에 1291 년을 기점으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은 성지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완전히 십자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는 데는 12 년이라는 세월이 추가로 필요했다. 왜냐하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291 년 아크레가 함락되고 사실상 성지 회복의 희망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집단으로 본래 우트르메르 (지금의 팔레스타인 부근) 에 큰 세력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성지 수호를 그 사명으로 내건 성전 기사단이나 본래는 병자 구호로 시작했으나 역시 성전 기사단과 비슷하게 성지 수호 기치를 내걸었던 구호 기사단이 있다.  


 두 기사단은 거듭되는 십자군 국가의 몰락과 1291 년의 공방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오랜 세월 기부와 사업을 통해 유럽에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데다 성지 수호의 대의에 참가하기 원하는 사람이 이전보다는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오래지 않아 병력을 다시 충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트르메르에 남아있는 기사단 요새는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1298 년에서 1299 년사이 거의 육지쪽 마지막 요새들인 서반티카 (Servantiker - 현재의 시리아 국경 근처의 터키 지역, 시리아 관문의 주요 지역) 와 로슈 - 기욤 (Roche - Guillaume 역시 비슷한 시리아 관문의 요새  로슈 기욤은 성전 기사단 요새로 1250 미터의 고산 지대에 있었다) 요새가 함락되었다. 이들 요새들은 실리시안 아르메니아 왕국을 노리는 맘루크 군과의 전쟁기간 중 모두 상실했다.   



 따라서 1300 년이 되자 남아있는 시리아 측 십자군 요새는 루아드 (Ruad) 가 유일했다. 루아드는 현재의 시리아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현재는 아와드 (Arwad) 라고 불리고 있다. 이 섬은 0.2 ㎢ 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육지쪽 항구인 타르투스 (Tartus) 와 약 3 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존재해 해군력이 약한 맘루크 군으로써는 쉽게 정복을 할 수 가 없었다.   



(구글 어스에서 본 루아드(아와드). 길이 400 미터 정도 되는 작은 섬에 성채와 항구가 존재한다) 



(루아드의 성채 유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ichel Benoist  ) 


 사실 이런 점을 보면 루아드는 육지쪽 요새도 아니기 때문에 이미 육지에서는 십자군이 1299 년까지 다 밀려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양대 기사단은 물론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키프로스의 앙리 2 세 까지 가세해 여기를 근거지로 본토 상륙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맘루크 조에서 볼 때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만 이들을 다 합쳐도 도저히 맘루크 조를 상대할 병력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십자군이 대거 조직 되지 않는한 상륙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는데 당시 유럽 본토에서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이란 것은 현지 사정이나 역사를 잘 모르는 일부 사람들의 모험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들만으로는 잃어버린 십자군 성채와 도시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1299 년에 이르러 이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몽골 (일한국) 이 다시 맘루크 조를 침공했던 것이다. 


 21. 일한국의 침공


 1291 년 아르군 칸이 사망한 이후 일 한국은 한동안 혼란에 빠지지만 결국 1295 년 가잔 칸 (Ghazan Khan, Mahmud Ghazan  재위 1295 - 1304) 이 즉위해 이 혼란을 수습하고 일한국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다. 가진 칸은 일한국의 7 대 칸으로 아르군 칸의 아들이며 아바카의 손자였다. 그는 본래 기독교로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나중엔 불교의 가르침도 받았으나 결국에 이슬람 교로 개종하게 된다. 이 이후에는 일한국은 이슬람화 하면서 서서히 현지인들과 동화하게 되는데 이는 몽골 족이 세운 일한국이 안정화 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이름도 마무드 로 변경했다)




(가잔 칸. (가운데) 그의 인생 역정은 당시 몽골 제국이 종교에 대해 얼마나 관대하고 포용성이 넓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기독교도로 세례를 받고 불교를 배웠으며 최종적으로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것은 몽골 제국이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World History", Rachid Ad-Din, 14th century. Reproduction photographed from "Le Royaume Armenien de Cilicie", Claude Mutafian.   ) 


 일단 가잔 칸은 국내 사정을 안정시키기고 난 이후 다시 서쪽으로 팽창 정책을 진행했는데 이는 멀리는 훌라구 시절부터 이어져온 일한국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지금의 이란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일 한국은 더 나아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팽창을 통해 대제국을 세우기 원했던 것이다. 이는 역대 일한국의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채택했던 정책이지만 여기에는 맘루크 조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버티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단일 왕국을 때마침 건설한 것은 맘루크 조에게 있어 매우 시의 적절했는데 12 세기 처럼 이들이 모두 분열되어 있었다면 몽골 제국에 의해 매우 쉽게 정복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맘루크 조 아래 통일된 시리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그들의 왕국은 아인 잘루트 전투 이후 숫한 일한국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는 물론 지리적 이점과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물론 어느 정도 맘루크 조에 의한 통일성이 유지되어 외적을 막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맘루크조의 왕국은 그 지배 영역이 이전에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제국과 거의 유사한 범위 (즉 현재의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그리고 메카를 비롯한 성지 주변) 를 지배했다. 



(맘루크 조의 최대 판도, 1279 년 당시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Mamluks1279.png ) 


 아무튼 맘루크 조와 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가잔 칸이 맘루크 조를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이에 1299 년 다시 시리아를 침공한 가잔 칸은 알레포를 손쉽게 함락했다. 몽골군은 이후 남하해 현재의 시리아 홈스 (Homs) 에 도달한다. 여기서 3차 홈스 전투로도 알려진 와디 알 카잔다르(Battle of Wadi al-Khazandar) 전투가 발생한다. 


 일 한국은 이를 위해 6만에 달하는 몽골 주력군 이외에 4만에 달하는 보조 병력 - 아르메니아 및 조지아 (그루지아) 왕국 같은 속국에서 모아온 병력 - 을 이끌고 다시 끔 맘루크 조를 위협했다. 그리고 물론 이 상황에 고무된 십자군 잔존 세력은 다시 본토 회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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