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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 전쟁의 총평, 그리고 유산들 (1)






 십자군 전쟁 - 여기서는 편의상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다루는 부분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만을 이야기 함. 예외는 알비주아 십자군 - 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문제이다. 사실 역사 전공도 아니고 십자군은 더더욱 교육을 받아본바 없지만 나른 블로그에 계속 글을 올렸으니 여기에 대한 간단한 리뷰와 평가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전부터 강조하듯이 실제로 전문적인 역사가도 또 해당 분야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참고로만 보고 이를 활용해서 2차 저작물을 만들거나 하는 일은 삼가주시기 바란다.



 1. 십자군 왕국 - 예루살렘 왕국의 흥망 


 1차 십자군 원정이 남긴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 왕국이었다. 예루살렘 왕국 (Kingdom of Jerusalem) 은 동아시아 식으로 말하면 태조라고 할 수 있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Godfrey of Bouillon) 에 의해 시작되지만 사실상 왕국을 창업한 것은 그의 동생인 보두앵 1세  (Baldwin I of Jerusalem 재위 1100 - 1118 ) 였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곧 사망했고 대부분의 다른 십자군 영주들은 독자 영토를 확보하든지 귀국하든지 했기 때문에 에데사를 확보했던 보두앵 1 세는 사실상 왕국을 창업하는 수준의 일을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보두앵 1세는 1100 년 즉위한 이후 1101 년 부터 영토 팽창을 시도해 예루살렘 왕국의 국경선을 어느 정도 확정지었는데 여기에는 현재의 이스라엘 대부분과 요르단강 너머의 영토라는 뜻의 울트레 주르뎅 (Oultrejordain or Oultrejourdain   "beyond the Jordan") 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사해 (Dead Sea) 너머 지역, 현재의 요르단 일부 지역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이를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135 년경의 십자군 국가 영토  http://en.wikipedia.org/wiki/File:Near_East_1135.svg  )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    Map of Israel, the Palestinian territories (West Bank and Gaza Strip), the Golan Heights, and portions of neighbouring countries. Also United Nations deployment areas in countries adjoining Israel or Israeli-held territory, as of January 2004. public domain )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는 전성기 시절 현재의 이스라엘 보다 큰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토가 아주 넓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시리아가 통일되거나 (당시의 시리아는 지금의 요르단까지 포함한 의미) 이집트가 공격한다면 국력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보두앵 1 세 시기 이집트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것은 물론 왕국 내부에 정복하지 못한 영토들을 대부분 정복에 성공하므로써 오히려 더 강대한 이집트에 대한 공세에 나설 수 있었다. 


 보두앵 1세는 자신의 친척인 보두앵 2세 (Baldwin II of Jerusalem, Baldwin II of Edessa = Baldwin of Bourcq  1118 - 1131 )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는데 (1118 년) 그는 보두앵 1세 처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은 없었으나 그래도 평균 이상을 한 명군이었다. 보두앵 1,2 세 시절 예루살렘 왕국의 국경은 위의 지도처럼 그려지고  주변의 다른 무슬림 국가들은 분열된 상태였는데다 이집트의 파티마조는 권력 투쟁이라는 말기적 증상을 보이면서 망할 날을 기다리는 상황이라 한동안 왕국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보두앵 1,2 세 시절 특기할 점은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도시 국가들이 아크레나 기타 해안 도시들에 자신들의 거류지를 만들고 예루살렘 왕국에 협력하는 댓가로 (여기에는 물론 군사적 협력도 포함되어 있다) 상업에 대한 특권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본격적으로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등 북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이 동방에 거점을 건설하고 동서 무역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동서 문화의 교류가 크게 촉진된 것은 물론 이들 도시의 성장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는데 이는 후세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만든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들 도시 국가를 끼어들게 만든 것은 왕국의 경제 활동에만 큰 보탬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방위상에서도 큰 이점이 있었다. 독자적인 해군까지 확보하기 힘들었던 예루살렘 왕국은 이들의 해상전력에 많은 보탬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이들이 개척한 항해 루트를 통해 끊임없이 순례자는 물론 새로운 십자군과 물자, 그리고 인구가 유입되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의 전성기 시절은 물론이고 사실상 붕괴상태에 이른 후반기 100 년간 지탱할 수 있는 힘이되었다. (물론 이들은 성지 수호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들이 개척한 항해 루트의 중요성은 3차 십자군 이후로는 거의 해상으로만 병력이 우트르메르 (해외의 영토라는 뜻의 프랑스어 (Outremer = over sea ) 로 십자군 국가를 의미함 ) 로 도달한데서도 알 수 있다. 사실 넓게 보면 이 동방 무역 라인 자체는 십자군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경제와 교류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예루살렘 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면  구호 기사단 (병원 기사단, Knights Hospitaller) 과 성전 기사단 (Knights Templar  ) 이 보두앵 1,2 세 시절에 우트르메르에 기반을 다진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왕국의 존속에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은 물론 무슬림들에 대한 공세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왕국 곳곳 (여기에는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도 포함) 에 요새를 건설해 적의 침공을 계속해서 방어하는 상비군의 역할을 한 점이 왕국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 말기에 이미 해안가에 좁은 교두보에 붙어 있던 십자군 잔존 세력을 일소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도 부분적으로는 요새화된 수많은 성채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십자군 요새인 크락 데 슈발리에 Krak des Chevaliers  이스라엘에 가까운 시리아 국경지대에 위치. 본래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가 구호 기사단에 기증한 요새로 구호 기사단이 강력한 십자군 성채로 개조했다. 현재는 유네스코 지정 World Heritage Site 이기도 하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Bernard Gagnon   ) 


 보두앵 1,2 세 시절은 왕국의 창업기였다. 그러나 왕국은 서서히 주변의 무슬림 세력이 혼란을 극복하면서 위협을 받았다. 이 위협은 보두앵 2세 이후 왕국이 후계 문제로 혼란을 겪고 내분을 겪으면서 더 심각해졌다. 그러나 에데사 함락으로 촉발된 2 차 십자군은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이후 왕국은 내전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보두앵 3세 치세로 넘어가게 된다. 12 세기 중반에 등장한 보두앵 3세는 오래 살았다면 왕국을 좀 더 안정화 시킬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에 죽고 동생 아말릭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말릭 1세는 할 수 있는 일은 나름 다했다. 즉 형인 보두앵 3세 처럼 비잔티움 황제를 상위 군주로 섬기고 결혼 동맹을 통해 그 도움을 얻고자 했다. 2차 십자군의 실패 이후 예루살렘 왕국은 점차 주변 무슬림 국가들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마누엘 1세 시절 비잔티움 제국은 전혀 의미 없는 해외 원정으로 인해 막대한 국력을 소진하느라 예루살렘 왕국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말릭 1세는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최악의 상태란 이집트와 시리아에 통일 제국이 건설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사이 낀 소국 예루살렘 왕국은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 1160 년대 꾸준히 행했던 이집트 원정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이 아말릭 1세의 능력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중과부족인지는 평가하기 힘들겠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살라딘이 등장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포함하는 아이유브 제국을 건설한 12 세기 후반 상황은 - 여기에는 몇가지 우연과 필연이 같이 작용했다 -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바로 몰락하지 않고 예루살렘 왕국이 하틴 전투때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기적적인 상황은 사실 1291 년까지 100 년을 더 버틴 것인데 이것은 물론 성지를 회복하고자 하는 유럽인들의 종교적 열망과 현지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 그리고 기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난 일이었다. 


 1187 년 하틴 전투는 왕국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이 전투와 3차 십자군 이후 왕국의 영토는 해안가에 좁은 벨트에 불과했으나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의 혼란상과 더불어 몽골 제국의 등장, 그리고 어떻게든 성지를 유지하려는 유럽인들의 노력으로 인해 100 년간 왕국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이시기 왕국의 수도 노릇을 한 것은 아크레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아크레 왕국 (Kingdom of Acre)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 100 년간의 왕국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으며 그 왕위 계승도 극히 불안정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계승도. 사실 이 계승도의 많은 부분이 결혼에 의한 것이지 정상적인 국왕 -> 왕자 사이 계승이 아니었다    Source  : wiki )


 특히 보두앵 1세에서 부터 시작된 왕국의 혈통은 사실상 후반 100년간은 적절한 남편감을 왕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겨우 유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왕위는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사실상 해체에 이르게 만드는 일을 더 확정지었다. 


 이미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를 물려 받기 전에도 예루살렘 왕국은 남아 있는 영주들과 기사단의 연합에 지나지 않기는 했다. 이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외교적으로 예루살렘 자체를 수복했으며 13세기 중반까지는 상당한 영토를 회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왕국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왜냐면 유럽에서 교황 및 반란 세력과의 대립에 바쁜 프리드리히 2세가 5차 십자군 (혹은 6차) 이후로는 왕국에 다시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지 영주들은 황제의 대리인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결국 개별 영주와 도시, 그리고 기사단만 있고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존재는 희미해졌다. 호엔 슈타우펜 조가 붕괴된 이후 예루살렘 국왕자리는 키프로스 왕국에 넘어갔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바꿀 순 없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란 13세기 후반에는 일종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효과적으로 국력을 모아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13 세기 후반에 주기적인 몽골 제국의 맘루크조 침공이 없었다면 진작에 십자군 잔존 세력들은 일소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이들이 좀 더 버틸 수 있는데 도움이 된 부분은 앞서 설명했듯이 무슬림에게도 도움이 되는 동서 무역과 견고한 십자군 성채들, 그리고 가끔식 와서 평화협정을 맺게 만드는 십자군의 존재였다.


 사실 1291 년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이 특이한 경우이지 망한 것이 이상하지는 않은 예루살렘 왕국이었다. 그들의 왕국은 주변의 무슬림 왕국과 긴장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이들이 하나로 통일된 12세기 후반부터는 더욱 이 문제가 심해졌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들이 설령 종교적으로 이슬람교를 믿었다고 해도 이 상황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살라딘을 비롯 주요 무슬림 지배자들이 줄곧 공격한 상대는 오히려 같은 이슬람 교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종교를 믿는 무슬림을 공격해 이들을 합병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정복하고 나면 그 다음 팔레스타인은 당연한 수순이다. 같은 종교를 믿는다 해도 이점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슬림이 분열된 시기에는 이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던 예루살렘 왕국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종교인 기독교를 믿었고 평소 무슬림이 이교도로 적대시 했기 때문에 (물론 항상 그런것은 아니었고 이들과 교역이나 동맹, 심지어 공동으로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이들과의 전쟁에서는 성전이라는 아주 좋은 구실이 붙을 수가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을 좀 더 앞당겼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종교가 근본적인 멸망의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 왕국이 사라진 것은 이집트나 시리아를 병합해서 스스로 제국이 되지 못한 이상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살라딘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을 통합한 제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왕국은 국력에서 결국 이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왕국은 보두앵 1세 시절부터 이집트를 침공해왔지만 (물론 이집트의 풍부한 재화가 또 큰 목적이었다) 1160 년대에 이집트 원정이 엄청난 물자와 인력만 소모하고 실패로 끝나 왕국의 재앙이 되었다.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고는 해도 이 틈바구니에서 잘 버티고 있다. 미국의 도움 외에도 중세시대와는 달리 이집트가 강대국은 아닌데다 주변 아랍국가들이 항상 일치 단결하지는 않는 것과 무엇보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원정이 실패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서게 된 것은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의 서곡이었다. 강대국 영토 한 가운데 있는 소국이 이 정도 버틴게 더 신기할 상황이었는데 이 정도나마 버틴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십자군(특히 기사단) 의 존재와 무역루트의 건재, 종교적 이유와 몽골 제국의 침공등 여러가지 이유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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