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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최후 6





11. 트리폴리 백작령의 최후 


여기서 잠시 트리폴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티오크를 상실했던 보에몽 6세는 이미 1275 년에 사망했다. 그를 이은 것은 아들인 보에몽 7세 (Bohemond VII, Count of Tripoli) 였다. 보에몽 7 세 치세 역시 그다지 순조롭지는 않았는데 특히 성전기사단의 지원을 받은 엠브리아코 가문의 기 드 제베일 (Guy of Jebail) 과의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가문은 제노바의 영향력 있는 상인 가문으로 이지역 이권에 이전부터 간섭하고 있었고 트리폴리 자체를 장악하려 들었지만 실패했다.  


 아무튼 이 전쟁에서 승리한 보에몽 7 세는 그나마 트리폴리 백작 지위는 지킬 수 있었다. 그는 1287 년에 사망했는데 자식이 없었으므로 여동생인 루시아 (Lucia) 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트리폴리의 백작부인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백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트리폴리의 루시아 주교 옆에 있는 두건을 쓴 여자라고 추정됨.  public domain image) 


 그러나 불행히도 루시아는 좋지 않은 시기에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1287 년에는 본래 안티오크 공국의 일부로 당시까지 트리폴리 백작의 지배를 받았던 라타키아가 함락되었다. 이어 칼라운이 트리폴리를 노리는 것은 누가봐도 명확했다. 


 트리폴리 백작령 혼자서는 칼라운을 막아내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루시아는 몽골 제국은 물론 서유럽에까지 원군을 요청해 보지만 그녀와 트리폴리 백작령을 도와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같은 기독교인들이 그녀를 위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기 드 제베일의 동생인 바르톨로뮤 엠브리아코 (Bartolemew Emriaco) 는 이 도시를 자신이 장악하고자 음모를 꾸몄는데 그 음모를 달성하기 위해 칼라운에게 군대를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호시탐탐 십자군 영토를 노리면서도 -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방위상의 이유도 있다 - 휴전 조약에 발이 묶여있던 칼라운은 이제 당당하게 휴전협정을 깰 명분이 생겼다. 비록 종종 지켜지지 않던 협정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칼라운은 1289 년 시리아 방면으로 대군을 파견했는데 병사들은 그 목적지가 어딘지 몰랐으나 그들이 가는 방면이 트리폴리 쪽인 것은 확실했다. 1289 년 3월, 트리폴리는 칼라운에 의해 포위된다. 이상황에 이르자 인근의 십자군 세력들이 아직 포위되지 않은 항구로 많지 않은 병력을 파견했다. 이 병력은 구호, 성전 기사단 및 아크레, 키프로스 왕국들에서 보낸 것이지만 사실 일시적으로 트리폴리의 함락을 지연시켰을 뿐이다. 


 맘루크조의 강력한 투석기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180 년간에 이르는 트리폴리의 십자군 지배는 막을 내렸다. 4월 26일 성으로 난입한 맘루크 병사들은 닥치는 데로 주민을 학살하고 1200 명을 노예로 삼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 그들은 여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병기창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결국 2년후 있을 아크레 포위전에 무기를 대주는 셈이었다. 트리폴리 함락에서 한가지 정당한 일이 있었다면 칼라운을 끌여들인 바르톨로뮤 엠브리아코 본인도 이 혼란 중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트리폴리의 함락, 13- 14 세기 기록화   public domain image) 


 트리폴리 함락 당시에도 바다는 기독교 세력이 지키고 있었으므로 루시아를 비롯 몇몇 운좋은 주민들은 항구로 탈출할 수 있었다. 루시아의 이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엊갈리지만 아무튼 1299 년 이전에 죽은 것 같다. 이렇게 되서 보에몽 1세로부터 거의 190 년 정도 지속된 안티오크 공작/트리폴리 백작가는 완전히 대가 끊기게 된다. 나름 평지 풍파를 이기고 살아남은 안티오크 공작가의 쓸쓸한 최후였다. 



 12. 유럽의 반응


 당시 유럽의 반응은 한마디로 싸늘했다. 이미 십자군의 인기는 바닥을 찍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새로운 십자군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일 한국의 아르군 칸과의 협상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1291 년 새로운 연합군이 생겨날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은 게 유럽의 국왕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이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은데다 더 중요하게는 아르군 칸이 1291 년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아르군 칸의 사망과 더불어 맘루크조와의 전쟁 계획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아르군 칸의 뒤 이은 가이크하투 (Gaykhatu) 는 그의 동생으로 지폐를 도입하는 업적을 세운 후 신속하게 암살되었다. 그 뒤를 이은 바이두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등 한동안 일 한국은 맘루크조와 전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아무튼 1289 년에 우트르메르 현지에서는 트리폴리 까지 함락되고 이제 점점 남은 도시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아크레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국 국왕인 키프로스의 앙리 2세 (Henry II of Jerusalem) 는 유럽으로 Jean de Grailly 라는 귀족을 보내 현지의 심각한 상황을 알리고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로 이 요청에 응한 군주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서유럽의 주요 군주들이 국력을 탕진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은 것을 잘 봐왔다. 더구나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슬람 세력은 맘루크 조라는 강력한 통일 제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성공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했다. 이제 십자군의 이상은 널리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후세의 상상화인 마지막 십자군. 노인 혼자 외롭게 가는 모습이 당시의 십자군에 대한 인식을 대변하는 듯 하다.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은 고루하고 실현가능성 없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public domain image)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병사가 필요했던 아크레와 앙리 2세는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을 모집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이 오히려 아크레의 명을 재촉했다. 급하게 병사를 뽑아 갤리선에 실어 아크레까지 데려오는 것은 좋았는데 곧 돈이 모자라 급료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정상적인 병사보단 부랑자나 기타 무직자 등 여러모로 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은 급료가 연체되자 곧 본색을 드러냈다. 우선 부유한 무슬림 상인들을 약탈하고 도시를 유린했다. 비록 이들이 무슬림 상인만 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은 휴전 협상을 파기하고 전쟁을 벌일 구실을 원하던 칼라운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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