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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24)





 41. 이반 뇌제의 유산



 " 군주 개인에게 집중된 권력 이외에 어떤 권위도 이토록 방대한 영토에 적합한 힘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군주는 절대적이다..... 온갖 다른 정부 형태는 러시아에 해로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완전히 파멸로 몰아넣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훈시 (Nakaz) 중 ) 


 러시아 역사는 이반 뇌제의 등장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크게 변했다. 특히 지배자의 권력과 특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모스크바 대공들은 설혹 차르 (Tsar) 라는 명칭을 사용했을지라도 전제 군주라고 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권력을 행사했다. 여전히 러시아는 분령 시대의 공국과 보야르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모스크바 대공은 그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배자이긴 했지만 이반 뇌제 이후 시기의 차르 처럼 절대적 권력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반 뇌제의 시기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란 절대적인 권력자를 의미하게 된다. 


 이반 뇌제는 사실 빈약한 권력적 기반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르의 신성한 권력에 대한 확신이 매우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에 걸쳐 이를 확인하고 자신의 뜻으로 옮겼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신성한 차르의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로 생각하여 잔인하게 처단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1560 년대 이후 숙청은 잔인함 뿐 아니라 예측을 불허하는 방향과 범위로 인해 이반 그로즈니 (Ivan Grozny) 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종 직전에 참회하기 전까지 이반 뇌제는 자신의 잔인한 행동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이반 뇌제의 생각에 의하면 신하들은 무조건 차르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반 뇌제의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 중 하나. 19세기 말 작품으로 실제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이반 뇌제의 일반적인 이미지에 부합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Viktor Vasnetsov. Tsar Ivan The Terrible. 1897. Oil on canvass 247*132 Tretyakov Gallery   public domain image) 


 이반 뇌제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로 망명한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릅스키 공 (Knyaz Andrey Mikhailovich Kurbsky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Курбский; 1528–1583) 과의 서신 교환에서 비록 차르가 잘못했더라도 신하인 쿠릅스키 공은 참고 견디는 것이 도리라는 내용의 주장을 펼쳤다. 심지어 자신이 폭군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이자 충실한 신하인 쿠릅스키공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쳤는데 이것이 차르의 절대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이반 뇌제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이반 뇌제는 어린시절 자신의 권력이 매우 위태롭던 궁정에서 살아남으면서 차르의 절대적 권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뇌리에 각인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차르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신하들은 무조건 차르를 따라야했다. 이와 같은 차르의 신성한 권력은 백성이나 신하들의 동의나 선출에 의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으로 부터 부여받은 권력이었다. 따라서 한낮 인간인 백성과 신하들은 차르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와 같은 군주의 전제 권력에 대한 신념은 이반 뇌제의 외교에서도 드러난다. 이반 뇌제는 신하들에게 옹립된 스웨덴 군주나 폴란드 군주는 자신보다 격이 낮다고 생각했다. 선거로 뽑힌 군주는 자신처럼 혈통과 신에 의해 선택받은 신성한 군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내용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 세와의 서신에서도 드러난다. 이 서신에서 이반 뇌제는 잉글랜드에서는 군주 만이 아니라 심지어 장사하는 농민들까지 나라를 통치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엘리자베스 1 세는 사실 영국 역사에서는 매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군주였다. 하지만 이반 뇌제의 생각으로는 군주가 마땅히 휘둘러야 하는 권력이 제한 받은 반면 여왕의 신하와 백성들은 너무 큰 발언권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차르의 절대권력에 대한 생각은 이반 뇌제의 사후에도 죽지 않고 사실상 1917 년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 시절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있다. 이와 같은 절대권력에 대한 생각은 앞서 인용한 예카테리나 2세의 글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본래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다 계몽주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예카테리나 2세 역시 결국 차리즘을 벋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력한 전제 군주로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고 러시아를 제국으로 부르게 한 표트르 대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표트르 대제 Русский: Картина Поля Делароша (Paul Delaroche) "Петр Великий" ) 


 표트르 대제 역시 어린 시절 권력이 불안했으나 결국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각종 개혁과 성공을 가능하게한 강력한 전제 권력은 솔직히 표트르 본인의 손으로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인 차르의 권력과 권위는 바로 이반 뇌제의 유산이었다. 이것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지적 처럼 다양한 인종과 방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인 러시아를 통치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 러시아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차르의 절대적 권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과 신념은 19 세기를 넘어 심지어 20 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결국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18 - 19 세기에 절대주의는 사실상 붕괴되고 적어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반해 러시아는 19세기에 와서야 농노제를 폐지했으니 상당히 시대에 뒤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러시아의 강력한 전제 권력은 사실상 이반 뇌제가 후세에 남긴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라는 나라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실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는 대부분 강력한 권력을 잡거나 몰락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이점은 소비에트 시대나 심지어 현재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스탈린  A cropped image of Joseph Stalin during the Tehran Conference. In the full photo he is sitting beside Franklin D. Roosevelt, and Winston Churchill on the portico of the Russian Embassy. ) 


 이반 뇌제를 능가하는 강력한 전제 권력과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를 합친 것 이상으로 잔인했던 스탈린의 경우에도 엄청난 숙청 작업과 세뇌작업을 통해 지배자의 절대적 권력과 국민들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숭배를 강요했는데 이점에서 흔히 이반 뇌제와 비교된다. (그리고 스탈린이 이반 뇌제를 열렬히 지지하고 존경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반 뇌제 같은 광범위한 숙청 작업과 예측이 불가능한 행동을 하진 않지만 현재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러시아의 역사적 특징 중 하나인 강력한 지배자의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반 뇌제는 현재도 러시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반 뇌제가 러시아에 남긴 또다른 큰 유산은 바로 광대한 러시아의 영토이다. 러시아는 1550 년에서 1700 년까지 매년 3.5 만 ㎢ 씩 영토가 팽창되었다. 이것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 정복 이후 시베리아 진출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그대로다. 이반 뇌제의 집권 시기에 있어던 일이 결국 현재의 러시아 영토를 만들었다. 



(1500 에서 1700 년 사이 러시아의 팽창  
Territory of the Tsardom of Russia in
  •    AD 1500,
  •    1600 and
  •    1700.


 어쩌면 이반 뇌제가 없었어도 이것과 비슷한 러시아의 팽창은 있지 않았을까 ? 그것은 사실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반 뇌제의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이후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표트르 대제 처럼 러시아를 한번 근대화 시켰던 인물이나 비록 엄청난 희생을 치루긴 했지만 스탈린 처럼 러시아를 산업화 시켰던 인물의 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이반 뇌제 시기 토대가 마련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가 아니었더라면 그 과업을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반 뇌제는 현재의 러시아를 만든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만든 남자라고 불리는 것 처럼 말이다. (진시황도 황제 제도와 통일 중국을 만들어 이후 중국 역사를 지배했다. 그리고 사실 이반 뇌제를 능가할 만큼 잔인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반 뇌제의 이해 없이 러시아 역사를 이해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해석하기 극히 곤란한 여러가지 기행이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이반 뇌제의 행동과 정책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현대의 러시아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반 뇌제의 여러가지 측면 - 예를 들어 정말 정신 질환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전제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잔인한 행동이었는지, 그리고 리보니아 전쟁은 서방으로의 창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노력이었는지 아니면 여기서 질 수 없다는 오기의 결과였는지 - 은 쉽게 해석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더구나 선뜻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라 지금도 그 업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상당히 평가가 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반 뇌제는 16 세기를 통틀어 세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후의 강대국 러시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와 잔인한 폭군이라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함께하는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업적 때문에 이반 뇌제를 긍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보여준 잔인성을 들어 비판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전자가 스탈린이라면 후자는 쿠릅스키 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부분일 수도 있다. 다만 이반 뇌제의 잔인성 때문에 그 업적을 폄하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 업적 때문에 잔인성에  눈감을 수도 없다는 건 분명하다.  



 42. 간략한 후기 


 후기는 별 내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러시아 역사는 커녕 역사 자체를 전공하지 않았고 본래 전공 분야 자체가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보니 작성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몇권의 책 - 니콜라스 랴자놉스키/마크 스타인버그의 '러시아의 역사' 그리고 Robert Payne, Nikita Romanoff 의 'Ivan the terrible' - 과 영문판 위키의 힘을 빌어 주로 작성했습니다. 


 당연히 여기저기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인용하시거나 참고하실 때는 항상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적당한 분량으로 이반 뇌제에 대한 포스트를 마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흡족합니다. 옛날에 쓴 1 편짜리 포스트는 내용도 적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어 이제는 삭제합니다. 표트르 대제에 관한 내용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생각해 보고 다음에 쓸 연재는 블라드 3 세 입니다.  




댓글

  1. 안녕하세요. 질문이 있어서 댓글 드리는데요... (포스트와 무관해서 죄송합니다..)

    블로그 왼쪽에 글 목록이 주루룩 나오는데, 이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저도 저렇게 만들어놓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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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냥 좌측 상단 메뉴에서 sidebar 를 선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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