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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이반 뇌제 (21)






 38. 리보니아 전쟁 : 무엇을 남겼는가 ?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발트해로의 접근을 차단당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좁은 접근로마저 이제는 스웨던과 폴란드에 의해 차단당해 서방으로의 창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 전쟁의 마지막 순간에 그나마 프스코프나 노브고로드 등의 주요 도시라도 지킬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만큼 전황이 좋지 못했다. 


 러시아로써는 25 년간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한 것 치고는 치욕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손실도 막대한 전쟁이었다. 반면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은 이전보다 힘이 더 강해졌으며 특히 스웨덴은 북유럽 7 년 전쟁도 유리하게 마무리 지은데 이어 리보니아에서도 지분을 챙기는 데 성공해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리보니아 전쟁 이후 1600 년 경 구 리보니아 연방 및 인근 지역의 세력 분포  
  Map extract showing the status of Livonia in around 1600, before the Truce of Deulino. Compare with File:Map of Poland and Lithuania after the Union of Lublin (1569).svg.
  •    Poland-Lithuania
  •    Duchies of Poland-Lithuania
  •    Kingdom of Sweden
  •    Denmark-Norway
  •    Russia


 리보니아 전쟁에 러시아가 참전하게 된 것은 사실상 차르 이반 4 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미래를 내다볼 때 발트해로의 창을 확보하기 위해 리보니아 연방에 간섭했던 것은 시대를 앞선 안목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훗날 등장하는 표트르 대제가 비록 우여 곡절도 많았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최대한 효율적으로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이반 뇌제는 러시아 내에서 오프리치니나를 일으키면서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외교적으로 큰 실책을 범해 러시아의 주요 적인 스웨덴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연합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러시아군이 리보니아 방면에 투입된 틈을 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타타르 족이 연합 모스크바와 중부 러시아를 유린하게 만든 점은 이반 뇌제의 최대 실정 (失政) 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때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수만 10 - 15 만명에 달했으며 모스크바는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다. 본래 인구 10 만이 넘던 이 도시는 1580 년에 방문한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인구가 3 만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적들이 분열한 시기인 북유럽 7 년 전쟁 (Northern Seven Years' War  1563 - 1570 년) 을 적절하게 노려 리보니아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반 뇌제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반역자들을 처단한다면서 숙청과 처형, 토지 몰수 - 홋날 오프리치니나로 알려진 - 에 집중해 호기를 놓쳤다. 여기에 잠재적 동맹국이 될 수 있던 스웨덴과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최종적으로 이 전쟁에서 패배를 확정지은 이반 뇌제의 실책이었다.


 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다른 나라 국민들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긴 했지만 리보니아 주민들과 러시아 국민이 입은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현재의 남한 면적만한 작은 나라 때문에 당시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던 러시아가 - 이반 뇌제 당시 400 만 제곱 평방 킬로미터로 영토가 팽창했다 -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특히 러시아가 큰 고통을 받은 것은 1570 년대 초였다. 이 때는 타타르의 침공과 더불어 역병과 기근, 이반 뇌제의 노브고로드 학살 등이 겹쳐 러시아는 백성들의 시체와 불타버린 집들이 넘쳐났다. 물론 25 년 씩이나 강대국들의 전쟁의 무대가 된 리보니아 역시 말할 것 없이 황폐화 되었다.


 이후 리보니아와 인근 발트해 연안은 또 다시 러시아, 폴란드, 스웨덴의 전쟁 무대가 되었으나 이 중에서 특히 스웨덴이 점점 세력을 키워 러시아를 완전히 발트해와 단절 시켰다. 이반 뇌제의 사후인 1590 년에서 1595 년 사이 다시 발발한 러시아 - 스웨덴 전쟁에서 러시아는 결국 스웨덴에 또 밀려 에스토니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그나마 있던 영토까지 내줬다. 스웨덴은 힘을 키워 결국 리보니아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이것이 나중에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발트해 연안 영토를 장악한 스웨덴. 녹색 부분이 스웨덴이 획득한 영토. 나중에 니스타드 조약 Treaty of Nystad (1721 년) 으로 이 영토는 대부분 러시아에 넘어가게 된다.  Map showing the development of the Swedish Empire in the Baltic, 1550-1721, the time of the Truce of Plussa through to the Treaty of Nystad.   http://en.wikipedia.org/wiki/File:Swedish_Empire_in_the_Baltic_(1560-1721).png ) 




(표트르 대제  Русский: Картина Поля Делароша (Paul Delaroche) "Петр Великий"   public domain image)


 사실 러시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던 서유럽과의 무역과 교류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육로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들 - 오스만 투르크, 폴란드 - 리투아니아, 스웨덴 - 으로 막혀있었고 이들은 일종의 철의 장막을 형성하고 서유럽의 근대 문물이 러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오는 것을 차단했다. 이미 서방의 과학기술과 무기가 러시아의 것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반 뇌제가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발트해로의 진출을 국정과제로 삼은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과제를 결국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이반 뇌제의 잘못이었다. 


 결국 이반 뇌제의 원대한 구상은 표트르 대제 시절에 이르러 리보니아 전쟁 이상으로 치열했던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 1700 - 1721 년) 을 치르고 난 뒤 실현되었다. 사실 표트르 대제는 이반 뇌제 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즉 서구식 개혁 - 그러나 반쪽 짜리인 - 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역사의 가정이긴 하지만 이반 뇌제가 리보니아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아마도 대대적 서구화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만 해도 서유럽이 그 정도로 크게 앞섰던 것은 아니었는데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가 특별히 낙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카잔과의 전쟁에서도 잘 사용했던 서유럽의 화포기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유용한 기술을 들여오고 발트해 무역에 참가해서 상당한 이득을 보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표트르 대제식의 제한적 서구화 보다 문화 교류를 더 촉진 시켜 러시아를 더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리보니아 전쟁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면 

 1. 러시아를 발트해에서 사실상 단절시켰다. (전쟁 이전에도 접근이 용이하진 않았지만 더 고립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이로 인해 러시아가 서유럽과 아무 교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한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을 방문했던 표트르 대제는 당시 근대화와 과학 혁명을 겪던 유럽에 비해 러시아가 매우 뒤쳐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서구로 향하는 창은 러시아에 진짜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이반 뇌제의 안목은 시대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필요 없었다면 표트르 대제가 다시 추진했을리 없었을 것이다.     


 2. 리보니아 전쟁 이후 스웨덴은 북유럽의 확실한 강대국이 되었다. 스웨덴 제국은 이후 러시아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대북방 전쟁 초기에도 그런 인식이 적지 않았다. 그 인식을 바꾼 전투가 폴타바 전투 (1709년) 이었다.

 3.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다 이후 동란이 시대 (Смутное время) 에 역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러시아는 이 재앙 이후 다시 일어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4. 루블린 연합 (폴란드 - 리투아니아) 의 힘이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이후 동란의 시기에 이르러 루블린 연합은 러시아 제위에 간섭하는 등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5. 이 전쟁의 결과가 120 년 이후 표트르 대제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리보니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다. 


 사실 이반 뇌제가 리보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 합병과 시베리아 진출에 견줄만한 치적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 이후를 생각해 보면 결국 필요 없는 일을 시도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이반 뇌제 스스로가 자초한 일 -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오프리치니나와 더불어 이반 뇌제 시대의 큰 오점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리보니아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반 뇌제 시기 서방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합병하므로써 시베리아로의 접근로는 활짝 열렸다. 훗날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된 것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이반 뇌제의 치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잠시 이 이야기를 언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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