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꽤 옆길로 샌 것 같지만, 이제 본래 주제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2000년 대 중반 이후 무어의 법칙이 깨지면서 데스크톱과 랩톱 (노트북)의 성능 향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더 이상 수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고 서평만 보고 평가하기는 위험하지만, 이 대목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이제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2006년 7월 27일 출시된 콘로 (Core 2 Duo E6300 and E6400) 프로세서는 1.86/2.16GHz의 클럭에 듀얼 코어였으며 US$183, US$224 가격표를 달고 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4MB 캐쉬와 더 높은 클럭을 지닌 모델인 Core 2 Duo E6600(2.4GHz)/E6700(2.67GHz)가 316달러와 530달러에 출시되었습니다.
이제 2018년에 구할 수 있는 인텔의 300달러 대 프로세서와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300달러 대에서 구할 수 있던 Core 2 Duo E6600의 경우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2억91000만개이며 지금 300달러대에서 구할 수 있는 Core i7 8700K/8700의 경우 정확한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아이비브릿지와의 비교를 통해 생각하면 분명 14억개 이상이고 20억개 정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내장 그래픽을 포함해서 그렇기 때문에 1:1 비교는 어렵지만, 집적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년간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Core i7 8700K와의 비교는 같은 가격대 비교로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성능 비교 벤치는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UserBenchmark 결과만 인용하겠습니다.
결과값은 싱글 코어 성능 차이는 3배, 멀티코어 차이는 7배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무어의 법칙이 깨진 건 맞지만, 성능 향상이 더 이상 없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셈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시장 독점, PC 수요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던 데스크탑 시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수요가 크게 증가한 서버 부분이나 모바일, GPU로 바꾸게 되면 앞서 설명했듯이 더 급격한 성능 향상이 존재했습니다. 프로세서 시장에서 성장이 가장 느렸던 분야에서도 이렇게 대폭적인 성능 향상이 있었다면 나머지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PC 수요가 감소한 건 사실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매우 좋은 증거도 있습니다. PC 시장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죠. 저자가 책에서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라면 PC 판매량 감소 그래프를 보여줄 것입니다. 최근 시장 조사기관 가트너는 12분기 연속으로 PC 판매량이 감소해서 2017년 3분기에는 6700만대에 불과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3.6%가 감소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PC가 이미 충분히 보급된 점과 충분히 빨라져서 교체 주기가 길어진 것, 그리고 시장 독점구도에서 새로운 수요를 견인하기 어려운 것, 공정 미세화의 어려움으로 신제품 교체 주기가 길어진 것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ICT 혁신이 멈췄거나 혹은 그 파급력이 20세기에 등장한 세탁기, 냉장고, 상하수도의 도입 등 다른 혁신보다 못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PC 판매량이 조금씩 줄어드는 중요한 배경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대체제의 등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카테고리를 바꿔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기준으로 하면 지난 10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스마트폰 알람에 깨서 밤새 온 메일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고 출근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하고 게임을 합니다. 블로그를 쓸 기사 거리 중 상당수는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논문을 읽고 관련 주제를 검색합니다. 이제 TV나 종이 신문은 거의 보지 않고 있고 라디오도 안들은지 오래지만, 스마트폰은 거의 인생 동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등이 처음 도입되던 시절에는 엄청난 혁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의 등장이 이보다 못한 일이 될수는 없습니다. 웹 기반 서비스 (이 네이버를 포함)와 언제든지 웹에 접속할 수 있는 도구의 등장으로 우리의 삶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스마트폰으로 주식거리를 하고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기사를 읽거나 동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탁기, 냉장고, 상하수도, 자동차 없이 살기 불편하듯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는 삶 역시 이제 불편해졌습니다. 그리고 앞서 열거한 문명의 이기 가운데 스마트폰 처럼 끼고 사는 물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PC 산업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ICT 산업 전반이 성장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 만약 ICT의 성장이 멈췄다면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인텔, 삼성 전자 같은 IT 공룡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사상 최대 매출과 순이익을 갱신하고 시총 기준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인터넷에 접속한 디바이스의 숫자가 증가하고 소비하는 콘텐츠의 양이 증가하면 이를 감당할 서버가 급격히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서버 시장의 견고한 성장세를 뒷받침하면서 과거에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빅칩들이 등장하고 있고 메모리 산업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무어의 법칙은 신산업 초기 아직 기술 발전의 여지가 많을 때 나온 것으로 이것이 깨지는 것은 사실 시간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항공 산업에서도 제트기 시대가 도래할 때 까지 속도 향상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서 초기에는 매 10-20년 마다 항공기의 최고 속도가 2배 빨라진다는 법칙을 세워도 대충 맞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공기 저항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더 속도를 빠르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항공 산업이 제트 여객기가 최초 등장한 1950년대 이후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었을까요? 그리고 더 좋은 제트 여객기의 등장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해외 여행이 일반적인 된 건 항공 산업의 끊임없는 혁신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항공 산업은 지금도 꾸준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IT 산업의 빠른 발전에도 불구하고 소득 증가가 빠르게 일어나거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도체 같은 IT 산업은 자동차 산업처럼 고용 유발효과가 큰 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화두인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모두 앞으로 엄청난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믿기 어려우며 파급효과가 생각보다 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매우 작다거나 발전이 중지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 보는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습니다.
사실 책을 읽지 않아서 평가가 어렵긴 하지만 (언젠가 시간 될 때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마도 이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반박한 이유는 이런 괴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단 이 내용은 여기까지 하고 연재 포스트에서 못다한 많은 이야기는 앞으로 포스트를 통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10년간 모바일 AP의 발전이나 기타 반도체 부분에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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