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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20)





 36. 스테판 바토리의 역습


 스테판 바토리 (Stephen Bathory / Hungarian: Bathory Istvan, Polish: Stefan Batory, Lithuanian: Steponas Batoras, Romanian: Ştefan Bathory, Romanian Cyrillic: Штєфан Батори; Belarusian: Стэфан Баторый, Ukrainian: Степан Батори  등 국가에 따라 다양한 표기가 가능 ) 는 외교술에도 매우 뛰어났지만 사실 군사적 재능 또한 남달랐다. 실제로 이 두가지는 같이 힘을 합칠 때 그 힘이 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스테판 바토리의 인생은 사실 그 산 증인과도 같았다. 


 일단 1578 년 유리한 외교적 고지에 오른 것을 바탕으로 러시아를 대상으로 성공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보여준 것은 다시 루블린 연합 (폴란드 - 리투아니아) 의 국력을 과시하므로써 외교적 힘을 더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외교 (즉 주변의 적들과 화해하고 상대를 러시아 하나로 줄인 것) 만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스테판 바토리는 과거 이반 뇌제가 스트렐치를 창설하는 등 러시아 군제 개혁을 단행했던 것 이상의 대대적인 폴란드 군 군제 개혁을 단행한다. 비록 스테판 바토리가 왕위에 있었던 것은 1576 년에서 1586 년의 10 년 정도 되는 기간이었으나 이후 루블린 연합의 군사력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농민 보병은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 라는 반상비군 형태의 일반 보병 겸 공병 부대로 편성되게 되었다. 또 기병대는 당시의 전쟁의 변화상에 걸맞게 중세 기병이 아닌 기동력을 중시하는 경기병인 후사르 (Hussar) 를 기병 전력의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후사르 (혹은 후싸르) 는 15 세기 이후 등장한 경기병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사실 스테판 바토리가 즉위하기 전부터 폴란드 - 리투아니아군에 이 병과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판 바토리의 즉위와 함께 후사르는 대대적으로 개혁되어 폴란드의 주력 기병 전력이 되었다. 


 스테판 바토리는 점차 총과 대포가 널리 쓰이는 전장의 변화에 따라 기병 전략 역시 기동성과 공격력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스킷 (musket) 이나 아쿼버스 (arquebus) 같은 르네상스/근세 초기 총포들은 장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사정거리도 짧았다. 따라서 총포로 무장한 적에 대해서도  빠르게 돌격해서 목표를 타격한다면 기병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스테판 바토리의 시대에 폴란드 후사르들은 약 5 m 내외 길이의 중간에 나무 공이 있는 속이 빈 나무 창을 들었는데 (코피아 Kopia 라고 불렀다) 중세의 기병창보다 강도는 약했지만 보다 가벼웠다. 대신 있는 힘을 다해 돌격하고 나면 코피아는 부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오래 사용하기는 힘들었으나 기동력 있는 기병이 중시되는 전장의 변화에는 더 유용했다. 이 코피아가 후사르의 주력 무기였으며 이외에도 여러 형태의 기병도를 부무장으로 장착해서 칼로 보병이나 적 기병을 공격했다. 물론 총기도 소지는 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활용도가 낮았다.


 아무리 기동력이 중시된다고 해도 막상 전장에 아무 보호 장구도 없이 나가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후사르들은 지나치게 무게를 더하지 않는 선에서 흉판과 사슬 갑옷, 그리고 투구등을 착용했으며 흉판과 투구의 경우 당시에 쓰이던 화승총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방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들의 외형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날개장식이었다. 이 날개 장식의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적을 놀라게 만듬과 동시에 돌격해 오는 기병이 보다 크고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공격을 받는 보병들이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창 끝에는 깃발을 달아서 적에게 더 위압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기병 돌격시에는 적을 패닉 상태로 만드는 것이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유용했을 것이다. 깃발 같이 생긴 창을 휘두르면서 날개 달린 갑옷을 입고 기병대가 달려든다면 확실히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날개 장식은 항상 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폴란드 후사르의 상징 처럼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winged hussar 라고 부르기도 한다)  



(날개 장식과 나무 창, 깃발, 흉갑과 사슬 갑옷, 그리고 기병도 (사브르) 및 망치 등을 장비한 폴란드 후사르 Aleksander Orłowski (1777–1832) 작  public domain  ) 



(1605 년 행진하는 후사르들 Entry of the wedding procession of Sigismund III Vasa into Cracow. public domain ) 


 스테판 바토리의 시절 그 수가 대폭 증가하고 빠른 기동력을 가지도록 잘 훈련된 후사르들은 곧 러시아 전선에서 그 능력을 과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579 년, 전해 리보니아에서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한 스테판 바토리는 마침내 리투아니아 내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낼 대대적인 공세전을 시작했다. 이 두번째 공격에는 스웨덴 군도 같이 동참했다. 그러나 양국군이 유기적인 연합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스웨덴 군은 해안에서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은 동유럽 중앙에서 작전을 독립적으로 실행했다. 사실 벤덴 전투가 이들이 대규모 연합 작전을 펼친 마지막 전투였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가 모집한 병력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물론 헝가리, 루마니아, 독일, 보헤미아 지방 등에서 온 병력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숫자도 55000 명 이상으로 당시 폴란드 - 리투아니아가 동원한 병력 중에서는 가장 큰 편에 속했다. 이미 여러 차례의 실책으로 인해 상당히 많은 병력을 잃은 러시아로써는 막기 쉽지 않은 병력이었다.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가 이 병력을 직접 지휘했는데 국왕의 주력 부대는 1579 년 러시아의 리투아니아 침공 교두보였던 폴로츠크 (Polotsk) 로 진격해서 마침내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폴로츠크 포위전은 그해 8월 11일 시작해서 8월 29일 항복을 받아냈다. 이제까지는 러시아가 침공하는 쪽이고 폴란드 - 리투아니아는 방어하는 쪽이었다면 폴로츠크 전투 이후에는 상황이 반대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전선 자체가 러시아 영토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인 1580 년에 스테판 바토리는 아예 러시아와의 본래 국경선을 넘어 내륙으로 진격했다. (3차 공세) 벨리키예 루키 (Velikiye Luki) 전투는 이해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투로 8월 29일 이 도시에 당도한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은 9월 5일에는 도시를 함락시키고 승리를 굳혔다. 2 차 대전 당시에도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의 격전지인 이 도시를 점령하자 러시아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는 것과 같았다. 내친김에 폴란드 기병대는 9월 20일 토로페츠 (Toropets) 전투 에서 큰 승리를 거둬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은 이 전쟁에서 승산을 굳히기 시작했다.    





  
 1580 년 이후의 상황은 주 전장이 러시아 내륙으로 이동하여 리보니아 전쟁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이 정도만 해도 이반 뇌제에게는 위기 상황이지만 그 다음해에는 더 큰 위기가 닥쳤다. 



  37. 프스코프 전투와 종전


 1581 년 스테판 바토리는 러시아 내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마침내 1581 년 8월 18일에 러시아 제 3 의 도시인 프스코프 (Pskov) 에 도달했다. 이 프스코프 공방전은 리보니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결국 전쟁을 러시아의 패배로 확정지은 전투였다.


 프스코프는 오랜 세월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강력한 도시로 무역 (특히 한자 동맹 도시들과의) 을 통해 번성했었다. 당시에도 러시아 3 위의 도시였는데 사실 가장 큰 도시인 모스크바가 타타르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노브고르드 역시 이반 뇌제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그나마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위치상 현재도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20 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도시는 리보니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전진 기지로 활용되었으므로 이 전쟁에서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군이 이 도시를 함락하게 될 경우 러시아 동부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위치상 리보니아에 있는 러시아군의 보급 루트를 차단하는 게 되므로 리보니아 전역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고립 무원에 상태에 빠질 위기 상황이었다. (위의 지도 참조. 마치 거대한 포위 섬멸전을 진행하는 것 같은 모양세인데 실제로 프스코프가 점령당하면 리보니아와 동부 방면 러시아군은 위험했다.) 따라서 이 리보니아 공방전은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모두 사활을 걸고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프스코프 공방전의 삽화.  마치 그림만 보면 프스코프가 함락된 것 같지만 그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Boris Chorikov 작 1836년 / public domain)


 프스코프에 투입된 폴란드 - 리투아니아 병력은 약 31000 명 정도로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물론 헝가리, 독일, 왈라키아등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성 병력이 섞여 있었다. 지휘는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가 맡았다. 한편 이를 방어하는 러시아측 사령관은 명목상 바실리 스코핀 - 슈이스키 공 (Prince Vasili Skopin - Shuisky) 이었으나 실제 지휘를 담당한 것은 이반 슈이스키 공 (Prince Ivan Shuisky) 이었고 병력은 스트렐치와 코자크 (Cossack, 코삭, 코작 등 여러 발음 표기가 있음) 로 구성된 4000 명 정도 되는 러시아 정규군과 무장한 프스코프 시민 12000 명이었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은 8월 24 - 26 일 사이 성을 포위하고 9월초 이틀간에 걸친 포격을 진행한 다음 9월 8일 성벽을 향해 총공격을 시작했다. 잘 훈련된 군대와 뛰어난 기량의 지휘관인 스테판 바토리가 지휘하는 공격은 매우 매서웠으나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러시아 군의 항전도 대단해서 9월 공세는 공격측의 엄청난 희생만 남기고 소득없이 끝났다. 


 이후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은 공성 지뢰, 대포, 일반 공격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다채로운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프스코프는 그렇게 간단히 문을 열지 않았다. 아무 도움도 없이 홀로 고립된 프스코프 주둔군과 시민들의 항쟁은 러시아 역사에 남을 만큼 영웅적이다. 그러는 사이 11월이 오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포위하고 있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 역시 초초해졌다. 이러면 러시아의 혹한의 겨울을 적국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스코프가 이렇게 3달 가량 시간을 끌때 러시아 군의 주력은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 ? 이때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의 주력을 역포위했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반 뇌제가 사방에 적을 만든 덕에 리보니아와 발트해 해안가의 러시아 동부군은 스웨덴 군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전에 당했던 일의 보복을 하기 위해 스웨덴 군 역시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1579 년에 스웨덴 함대와 지상군이 공략했던 나르바 (Narva)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그 다음해 부터 발트해에 인접한 러시아 도시들이 하나씩 스웨덴의 손에 떨어졌다. 1581 년에는 리보니아 북부의 베센베르크 (Wesenberg) 가 함락된 이후 마침내 발트해에 면한 전략적 요충지인 나르바가 함락되었다. 승리한 스웨덴 군은 이전 학살극에 대한 보복으로 7000 명의 러시아인을 학살했으니 향후 양국간의 피의 보복의 역사가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리보니아와 인근 주둔 러시아 군도 쉽게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사실 진격보다 더 어려운게 퇴각이기 때문이다. 사실 프스코프를 공격하는 스테판 바토리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군의 주력을 끌어들인 후 탁 트인 평야에서 결전을 치르려는 것이었다. 강력한 기동성과 공격력을 지닌 후사르는 포위전 보다는 이런 전투에 안성 맞춤이라 실제 승산도 높았다. 


 하지만 프스코프를 점령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러시아군의 주력이 프스코프를 구원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 지속되자 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12월에 되자 얀 자모이스키가 프스코프의 포위를 지속하는 한편 왕은 기병대를 포함하여 주 병력을 데리고 프스코프 주변 지대를 황폐화 시켰다. 


 한편 이반 뇌제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으나 군사적으로 스웨덴 - 폴란드 동맹군을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결국 1582 년 초가 되자 러시아의 겨울까지 이겨낸 스테판 바토리의 뚝심이 승리했다. 프스코프는 그 때까지도 버텼지만 결국 차르는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상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스코프가 함락되고 리보니아에 있는 러시아 군이 와해되면 협상도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72 년 Jan Matejko (1838–1893) 에 의해 그려진 스테판 바토리와 프스코프 공방전. 사실 이 그림은 애국적 낭만주의가 결합된 상상화이다. 프스코프는 절대 항복한 적도 적앞에 무릎을 꿇은 적도 없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사실 폴란드가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신음했던 시기로 그림의 동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날개 장식을 단 후사르의 모습과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러시아 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물론 왼편에 앉아 있는 이가 스테판 바토리이다.  public domain image  )


 결국 교황의 중재를 통해 1582 년 1월 15일 얌 자폴스키 조약 (Treaty of Jam Zapolski ) 이 맺어졌다. 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에게 스웨덴이 차지한 리보니아 북부 (에스토니아) 를 제외한 모든 리보니아 연방의 영토를 양보하고 폴로츠크를 양도했다. 대신 벨리키예 루키 (Velikiye Luki) 는 러시아에 반환되었으며 프스코프의 포위도 풀었다. 



(얌 자폴스키 조약에 의한 영토 변화. 루블린 연합은 이 조약으로 리보니아를 확보하고 러시아 영토 일부를 할양받아 더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주황색 부분) 특히 스웨덴과 함께 러시아가 발트해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상당 부분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그나마 러시아가 이 정도에서 사태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프스코프의 영웅적인 항쟁 덕분이었다. 사실 노브고르드 학살 이후 프스코프에서도 반역자를 처단한다면서 차르의 명령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처형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10 년 후 러시아의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를 붕괴위기에서 구한 것은 바로 그 프스코프의 시민들이었다.


 한편 해안가에서 러시아 영토를 하나씩 집어먹던 스웨덴 역시 1583 년 프루사 조약 (Treaty of Plussa) 를 맺어 최종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 협상의 결과로 러시아에 남은 것은 발트해로의 아주 좁은 통로 뿐이었다. 결국 스웨덴과 루블린 연합이 힘을 합쳐 러시아를 발트해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은 셈인데 이는 결국 차르 이반 4 세의 평생의 의지를 좌절시킨 것이었다. 


 이로인해 이반 뇌제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은 글로써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리보니아 전쟁을 위해 러시아와 이반 뇌제는 정말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발트해로의 창은 더 멀어졌고 주요 적국인 스웨덴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의 힘은 크게 강해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 및 이반 뇌제와 이 전쟁의 의의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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