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23)






 40. 이반 뇌제의 마지막 시기 (1570 - 1584 년)  


 1570 년대에 이르러 이반 뇌제는 러시아를 피로 물들인 오프리치니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야르 세력은 없어지진 않았지만 이제 차르의 전제 권력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오프리치니나 외에도 리보니아 전쟁, 타타르의 침공 등으로 러시아는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나라는 폐허가 되고 적지 않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타타르의 침공을 막아낸 1572 년 이반 뇌제는 공식적으로 오프리치니나와 자신의 호위부대 겸 오프리치니나의 실행 부대인 오프리치니크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오프리치니나 시기라고 하면 1565 년에서 1572 년을 의미한다. 다만 오프리치니나라는 행정 구획은 좀 더 후에 폐지되었다) 오프리치니크는 이 전쟁에서 정규군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만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스트렐치는 이반 뇌제의 집권 말기 까지 확대되지만 오프리치니크는 결국 해산되기에 이른다. 오프리치니크의 핵심 인물인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1573 년 리보니아 전쟁 중 베이센슈타인 포위 (Weissenstein. 지금의 에스토니아 Paide) 에서 전사했다. 예조프나 베리야와 비교하면 이 정도면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사실 리보니아 전쟁 및 시베리아 진출 부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반 뇌제의 기행은 1570 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희안한 일은 작은 타타르 칸이 갑자기 모든 러시아의 대공이 된 일이었다. 시메온 (Simeon Bekbulatovich) 는 카심 한국 (Khanate of Qasim) 이라는 작은 타타르 한국의 칸으로 태어났다. 이 카심 한국은 오카 (Oka) 강가에 위치했는데 당시에는 러시아의 속국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 시메온 역시 태어날 때는 Sain - Bulat 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시메온으로 이름을 개명하고 1574 년 이슬람 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그런데 1575 년 갑자기 아무 설명도 없이 이반 뇌제는 시메온이 새로운 모든 러시아의 대공 (Grand Prince of All Rus ) 이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모스크바의 이반 (Prince Ivan Moskovsky) 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시메온에게 차르의 의복을 입히고 권좌에 앉혔다. 이때 까지 이반 뇌제가 했던 모든 기행 가운데도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 사건에 러시아의 모든 백성과 보야르,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누구보다 영문도 모르게 권좌에 앉은 시메온이 가장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연극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게 1576 년에 끝났는데 다행히 시메온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트베리와 토르조크의 대공 (Grand Prince of Tver' and Torzho ) 지위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시메온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 아니라 동란의 시대를 거쳐 꽤 오래 살아남았다. 아무튼 이반 뇌제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영원히 알기 힘든 미스테리다.


 이반 뇌제는 1530 년 생이므로 사실 이 시기에도 40 대 후반이였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벌써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의 풍모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법의학적으로 재구성한 이반 뇌제의 실제 모습.  Ivan IV of Russia. Forensic facial reconstruction by M.Gerasimov. Иван Грозный. Реконструкция по черепу профессора М.Герасимова )  


 이반 뇌제의 말년에 있어던 가장 큰 오점은 바로 황태자인 이반을 죽인 것이다.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이반은 이반 뇌제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반 뇌제의 후사는 

By Anastasia Romanovna:


  • Tsarevna Anna Ivanovna (10 August 1548 – 20 July 1550)
  • Tsarevna Maria Ivanovna (17 March 1551 – young)
  • Tsarevich Dmitri Ivanovich (October 1552 – 26 June 1553)
  • Tsarevich Ivan Ivanovich (28 March 1554 – 19 November 1581)
  • Tsarevna Eudoxia Ivanovna (26 February 1556 – June 1558)
  • Tsar Feodor I of Russia (31 May 1557 – 6 January 1598)


By Maria Temryukovna:


  • Tsarevich Vasili Ivanovich (21 March 1563 – 3 May 1563)


By Maria Nagaya:


Tsarevich Dmitri Ivanovich (19 October 1582 – 15 May 1591)


 등이 있었는데 (Tsarevna 는 차르의 딸, Tsarevich 는 차르의 아들로 각각 공주, 왕자로 번역 할 수 있음) 이반은 어려서 죽은 형 드미트리의 이은 둘째 아들이었다. (참고로 맨 아래 드미트리가 나중에 가짜 드미트리 사건에서 이름을 도용당한 인물) 아버지와 이름은 같아도 성격은 다른 이반이 아버지와 대립한 이유는 여러가지 였지만 참사를 빚은 부분은 결혼 문제였다. 


 황태자 이반의 첫번째 아내는 유도시아 (Eudoxia Saburova) 인데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반 뇌제의 명령에 의해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두번째 아내 (즉 황태자비) 인 프라스코비아 ( Praskovia Solova) 역시 같은 이유로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세번째 아내가 엘레나 ( Yelena Sheremeteva ) 였는데 1581 년에 어렵게 임신을 했다.


 1581 년 11월 이반 뇌제는 황태자에게 병력을 이끌고 프스코프를 지원하기 위해 갈 것을 명령했으나 이 전쟁에 환멸을 느낀 황태자는 이를 거부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인해 이제 부자지간에도 금이 간 상태였는데 문제는 11월 15일에 발생했다. 며느리가 전통적이지 않은 얇은 옷을 입은 것을 본 이반 뇌제가 며느리를 폭행한 후 그녀는 유산했는데 이에 황태자가 폭발해 이반 뇌제에게 따지듯이 덤벼든 것이다. 


 이에 이성을 잃고 분노한 이반 뇌제는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의 머리를 쳤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 나중에 동란의 시기에 차르가 된 인물) 가 이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 역시 왕홀로 맞았다. 그런데 이반 뇌제가 정신을 차려 보니 황태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황태자 이반을 끌어 안은 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th, 1581. Ilya Repin 작  public domain image  )


 그제서야 이반 뇌제는 '내가 미쳤구나 아들을 죽였어' 하면서 울부짓었지만 이미 아들은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다만 바로 죽지는 않았고 잠시 의식을 차렸지만 곧 다시 의식 불명이 되었다. 황태자가 죽은 것은 1581 년 11월 19일이었는데 이반 뇌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아들의 옆에 있었으나 허사였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반 뇌제  Vyacheslav Grigorievich Schwarz (1838-69). Ivan the Terrible meditating at the deathbed of his son Ivan (1861).  public domain image )     
 

 사실 황태자 이반이 오래살고 또 후사도 낳았으면 이후에 발생하는 동란의 시대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이후 러시아 역사는 크게 변했다. 제위를 이은 것은 차르의 셋째 아들 페도르 였는데 그가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러시아는 큰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이반 뇌제의 정신 상태는 더 불안정해졌다. 이반 뇌제에 말기에 있어던 경사 -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 - 직후 이반 뇌제는 아직 50 대였으나 빠르게 노쇠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반 뇌제는 서서히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깨달았고 이를 두려워했다. 또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반 뇌제의 마지막 기행은 1584 년 초 모스크바에서 혜성이 보이면서 시작되었다. 이 불길한 혜성을 본 이반 뇌제는 마술사, 점성술사 등을 불러들여 주문을 외우거나 미래를 점치도록 (예를 들어 차르가 죽는날이 언제인지) 명령했는데 이 명령을 수행한 것은 차르의 측근인 벨스키 (Bogdan Belsky) 였다. 후세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실 벨스키는 이를 통해서 차르가 죽는 날인 3월 18일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차르에게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실은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점차 몸 상태가 나빠졌으므로 1584 년 3월에는 차르도 점성술의 도움없이 자신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착해진다는 격언이 진실인지 이 때가 되자 이반 뇌제도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했다. 그는 아들 페도르를 불러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과 자비의 이름으로 통치를 하도록 유훈을 남겼다. 또 세금을 줄이도록 지시하고 리보니아 전쟁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신하들에게도 자신이 스웨덴과 루블린 연합과의 불필요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 시킨 점을 인정했다.


 1584 년 3월에 침대에 누운 이반 뇌제는 3월 17일에는 몸상태가 약간 좋아져 다음날에는 침대에서 벨스키와 함께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구력 (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18일/ 그레고리력으로는 28일 (공교롭게도 그레고리력이 채택된 것이 1582 년이다) 이반 뇌제는 체스 경기 중 숨을 거두었다. 후세의 추정으로 사인은 뇌졸증이었는데 아무튼 폭풍같은 삶에 비해서는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이반 뇌제의 죽음.  Билибин И., Смерть Ивана Грозного. 1935 г.  public domain image) 


 이반 뇌제의 시신은 먼저간 두 아들 드미트리와 이반 이바노비치와 더불어 교회에 안장되었다. 



 다음이 마지막 글입니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190236957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