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21)






 38. 리보니아 전쟁 : 무엇을 남겼는가 ?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발트해로의 접근을 차단당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좁은 접근로마저 이제는 스웨던과 폴란드에 의해 차단당해 서방으로의 창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 전쟁의 마지막 순간에 그나마 프스코프나 노브고로드 등의 주요 도시라도 지킬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만큼 전황이 좋지 못했다. 


 러시아로써는 25 년간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한 것 치고는 치욕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손실도 막대한 전쟁이었다. 반면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은 이전보다 힘이 더 강해졌으며 특히 스웨덴은 북유럽 7 년 전쟁도 유리하게 마무리 지은데 이어 리보니아에서도 지분을 챙기는 데 성공해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리보니아 전쟁 이후 1600 년 경 구 리보니아 연방 및 인근 지역의 세력 분포  
  Map extract showing the status of Livonia in around 1600, before the Truce of Deulino. Compare with File:Map of Poland and Lithuania after the Union of Lublin (1569).svg.
  •    Poland-Lithuania
  •    Duchies of Poland-Lithuania
  •    Kingdom of Sweden
  •    Denmark-Norway
  •    Russia


 리보니아 전쟁에 러시아가 참전하게 된 것은 사실상 차르 이반 4 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미래를 내다볼 때 발트해로의 창을 확보하기 위해 리보니아 연방에 간섭했던 것은 시대를 앞선 안목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훗날 등장하는 표트르 대제가 비록 우여 곡절도 많았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최대한 효율적으로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이반 뇌제는 러시아 내에서 오프리치니나를 일으키면서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외교적으로 큰 실책을 범해 러시아의 주요 적인 스웨덴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연합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러시아군이 리보니아 방면에 투입된 틈을 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타타르 족이 연합 모스크바와 중부 러시아를 유린하게 만든 점은 이반 뇌제의 최대 실정 (失政) 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때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수만 10 - 15 만명에 달했으며 모스크바는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다. 본래 인구 10 만이 넘던 이 도시는 1580 년에 방문한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인구가 3 만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적들이 분열한 시기인 북유럽 7 년 전쟁 (Northern Seven Years' War  1563 - 1570 년) 을 적절하게 노려 리보니아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반 뇌제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반역자들을 처단한다면서 숙청과 처형, 토지 몰수 - 홋날 오프리치니나로 알려진 - 에 집중해 호기를 놓쳤다. 여기에 잠재적 동맹국이 될 수 있던 스웨덴과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최종적으로 이 전쟁에서 패배를 확정지은 이반 뇌제의 실책이었다.


 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다른 나라 국민들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긴 했지만 리보니아 주민들과 러시아 국민이 입은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현재의 남한 면적만한 작은 나라 때문에 당시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던 러시아가 - 이반 뇌제 당시 400 만 제곱 평방 킬로미터로 영토가 팽창했다 -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특히 러시아가 큰 고통을 받은 것은 1570 년대 초였다. 이 때는 타타르의 침공과 더불어 역병과 기근, 이반 뇌제의 노브고로드 학살 등이 겹쳐 러시아는 백성들의 시체와 불타버린 집들이 넘쳐났다. 물론 25 년 씩이나 강대국들의 전쟁의 무대가 된 리보니아 역시 말할 것 없이 황폐화 되었다.


 이후 리보니아와 인근 발트해 연안은 또 다시 러시아, 폴란드, 스웨덴의 전쟁 무대가 되었으나 이 중에서 특히 스웨덴이 점점 세력을 키워 러시아를 완전히 발트해와 단절 시켰다. 이반 뇌제의 사후인 1590 년에서 1595 년 사이 다시 발발한 러시아 - 스웨덴 전쟁에서 러시아는 결국 스웨덴에 또 밀려 에스토니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그나마 있던 영토까지 내줬다. 스웨덴은 힘을 키워 결국 리보니아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이것이 나중에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발트해 연안 영토를 장악한 스웨덴. 녹색 부분이 스웨덴이 획득한 영토. 나중에 니스타드 조약 Treaty of Nystad (1721 년) 으로 이 영토는 대부분 러시아에 넘어가게 된다.  Map showing the development of the Swedish Empire in the Baltic, 1550-1721, the time of the Truce of Plussa through to the Treaty of Nystad.   http://en.wikipedia.org/wiki/File:Swedish_Empire_in_the_Baltic_(1560-1721).png ) 




(표트르 대제  Русский: Картина Поля Делароша (Paul Delaroche) "Петр Великий"   public domain image)


 사실 러시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던 서유럽과의 무역과 교류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육로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들 - 오스만 투르크, 폴란드 - 리투아니아, 스웨덴 - 으로 막혀있었고 이들은 일종의 철의 장막을 형성하고 서유럽의 근대 문물이 러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오는 것을 차단했다. 이미 서방의 과학기술과 무기가 러시아의 것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반 뇌제가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발트해로의 진출을 국정과제로 삼은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과제를 결국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이반 뇌제의 잘못이었다. 


 결국 이반 뇌제의 원대한 구상은 표트르 대제 시절에 이르러 리보니아 전쟁 이상으로 치열했던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 1700 - 1721 년) 을 치르고 난 뒤 실현되었다. 사실 표트르 대제는 이반 뇌제 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즉 서구식 개혁 - 그러나 반쪽 짜리인 - 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역사의 가정이긴 하지만 이반 뇌제가 리보니아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아마도 대대적 서구화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만 해도 서유럽이 그 정도로 크게 앞섰던 것은 아니었는데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가 특별히 낙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카잔과의 전쟁에서도 잘 사용했던 서유럽의 화포기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유용한 기술을 들여오고 발트해 무역에 참가해서 상당한 이득을 보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표트르 대제식의 제한적 서구화 보다 문화 교류를 더 촉진 시켜 러시아를 더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리보니아 전쟁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면 

 1. 러시아를 발트해에서 사실상 단절시켰다. (전쟁 이전에도 접근이 용이하진 않았지만 더 고립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이로 인해 러시아가 서유럽과 아무 교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한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을 방문했던 표트르 대제는 당시 근대화와 과학 혁명을 겪던 유럽에 비해 러시아가 매우 뒤쳐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서구로 향하는 창은 러시아에 진짜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이반 뇌제의 안목은 시대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필요 없었다면 표트르 대제가 다시 추진했을리 없었을 것이다.     


 2. 리보니아 전쟁 이후 스웨덴은 북유럽의 확실한 강대국이 되었다. 스웨덴 제국은 이후 러시아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대북방 전쟁 초기에도 그런 인식이 적지 않았다. 그 인식을 바꾼 전투가 폴타바 전투 (1709년) 이었다.

 3.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다 이후 동란이 시대 (Смутное время) 에 역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러시아는 이 재앙 이후 다시 일어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4. 루블린 연합 (폴란드 - 리투아니아) 의 힘이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이후 동란의 시기에 이르러 루블린 연합은 러시아 제위에 간섭하는 등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5. 이 전쟁의 결과가 120 년 이후 표트르 대제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리보니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다. 


 사실 이반 뇌제가 리보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 합병과 시베리아 진출에 견줄만한 치적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 이후를 생각해 보면 결국 필요 없는 일을 시도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이반 뇌제 스스로가 자초한 일 -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오프리치니나와 더불어 이반 뇌제 시대의 큰 오점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리보니아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반 뇌제 시기 서방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합병하므로써 시베리아로의 접근로는 활짝 열렸다. 훗날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된 것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이반 뇌제의 치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잠시 이 이야기를 언급해보자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